驟徒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太宗大王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 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취도 사량인 나마취복지자 사실기성 형제삼인 장부과 중취도 계핍실 취도상출가 명도옥 거실제사. 태종대왕시 백제래벌조천성 대왕흥사출전 미결 어시 도옥어기도왈 “오문 위승자 상즉정술업 이복성 차즉기도용 이익야 아형사상문이이 무일선가취 불여종군살신 이보국 ” 탈법의저수복 개명왈취도 의위치취이위도야. 내지병부 청속삼천당 수수군부적장. 급기고상당 지창검돌진역투 살적수인이사.
취도(驟徒)는 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그의 성씨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夫果)요, 가운데는 취도(驟徒)요,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을 도옥(道玉)이라 하고 실제사(實際寺)에 기거했다.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자 왕이 군대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승려된 자로서 윗길은 술업(術業, 음양, 복서 따위의 술법에 종사하는 일)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道)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지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차라리 종군하여 몸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나으리라.”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고쳐 취도라 하니, 이 이름의 뜻은 빨리 가서 병졸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윽고 병부로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전장으로 갔다.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부딪치게 되자 창칼을 집어들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後咸亨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
후함형이년신미 문무대왕발병 사천백제변지지화 수여백제인 전어웅진지남 시부과이당주전사 논공제일. 문명원년갑신 고구려잔적 거보덕성이반. 신문대왕명장토지 이핍실위귀당제감.
그 후 함형(咸亨) 2년 신미(서기 671)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병사를 내어 백제 변경의 벼를 짓밟게 하자, 마침내 백제인들과 웅진(熊津)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부과가 당주(幢主)로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공로를 논하는 데 제일이었다. 문명(文明) 원년 갑신(서기 684)에 고구려의 남은 적들이 보덕성(報德城)에 자리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는데, 핍실을 귀당제감(貴幢弟監)으로 삼았다.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夫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飡.
임행위기부왈 “오이형 기사어왕사 명수불후 오수불조 하득외사이구존호? 금일여이생리 종시사별야 호왕무상.” 급대진 독출분격 참살수십인이사. 대왕문지 유체탄왈 “취도지사소 이격곤제지심 부과핍실역능용어의 불고기신 불기장여?” 개추증관사찬.
그는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내 비록 불초(不肖)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소? 오늘은 당신과 살아서 헤어지지만 결국에는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 사시오!” 적진을 마주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맹렬하게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취도가 죽을 곳을 알아서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부과와 핍실도 또한 의리 앞에 용감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대왕은 모두에게 사찬 벼슬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