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歆運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迊飡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時 徒衆言及某戰死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김흠운 내밀왕팔세손야 부달복잡찬 흠운소유화랑문노지문시 도중언급모전사우명지금 흠운갸연유체 유격려사제지모. 동뭉승전밀왈 “차인약부적 필불환야.”
김흠운(金歆運)은 내밀왕(奈密王)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소년 시절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흠운은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웠다.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轉密)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만약 전쟁터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永徽六年 太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駭 顚沛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詫 而吾人之所深羞者矣.”
영휘육년 태종대왕분백제여고구려경변 모벌지 급출사 이흠운위낭당대감. 어시 불숙어가 풍류우목 여사졸동감고. 저백제지지 영양산하 욕진취조천성 백제인승야질구 여명녹루이입. 아군경해 전패불능정. 적인난급격 비시우집 흠운황마악삭대적 대사전지설왈 “금적기암중 지척불상변 공수사 인무식자. 황공신라지귀골 대왕지반자 약사적인수 즉백제소과타 이오인지소심수자의.”
영휘(永徽) 6년(서기 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정벌을 계획했는데, 군대를 내보낼 때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다. 이때에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어두운 틈을 타 빠르게 달려와서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우리 군대가 깜짝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급히 공격해오니 떨어지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쥐고 적을 기다리는데,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이며 대왕의 사위입니다.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크나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
흠운왈 “대장부기이신허국 인지지여부지일야 이감구명호?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매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느냐?”
强立不動 從者 握轡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강립부동 종자 악비권환. 흠운발겁휘지 여적투살구인이사 어시 대감에파소감적득상여전사. 보기당주보용나문흠운사왈 “피골귀이세영 신소애석 이유수절이사 황보용나생이무익 사이무손호!” 수부적 살삼수인이사.
그가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자, 종자가 말고삐를 쥐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때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혈통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아끼는 처지인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득 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날 것 없지 않은가!”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飡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대왕문지상통 증흠운예파위일길찬 보용나적득위대나마 시인문지 작양산가 이상지.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 擧用之. 遂取美貌男子 糚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논왈 라인환무이지인 욕사유취군유 이관기행의 연후 거용지. 수취미모남자 장식지 명화랑이봉지 도중운집. 혹상마이도의 혹상열이가악 유오산수 무원부지. 인차지기사정 택이천지어조. 고대문왈 “현좌충신 종차이수 양장용졸 유시이생자.” 차야 삼대화랑 무려이백여인 이방명미사구여전기. 약흠운자 역낭도야 능치명어왕사 가위불욕기명자야.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인은 인재를 알아 볼 방법이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지어 함께 노닐도록 하고 그 행동거지와 의리를 살핀 후에 등용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뽑아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 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이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겼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에 실려 있는 바와 같다. 흠운 같은 이도 역시 낭도로서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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