裂起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沍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열기 사실족성. 문무왕원년 당황제견소정방 토고구려 위평양성. 함자도총관유덕민전선국왕 송군자평양. 왕명대각간김유신 수미사천석조이만이천이백오십석 도장색 풍설호한 인마다동사. 려인지병피 욕요격지. 거당영삼만여보이불능전 욕이서이난기인. 시역디이보기감보행 진이언왈 “소수노건 원비행인지수.”
열기(裂起)는 기록에 집안의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다. 문무왕(文武王) 원년(서기 661)에 당 황제가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국왕에게 황제의 명령을 전하여, 군수물자를 평양으로 보내라 하였다. 왕이 대각간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쌀 4천 섬과 조 2만2천2백5십 섬을 수송하게 하였는데, 유신이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바람과 눈이 매섭게 차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인들은 우리 병사가 지쳐있음을 알고 요격하려 하였다. 당 군영까지 3만여 보를 남겨놓고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고,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때 열기가 보기감(步騎監)으로 행군을 돕고 있었는데 나와 말하였다. “제가 비록 둔하고 굼뜨지만 심부름하러 가는 사람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飡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飡 而未副功勞 願加位沙飡.”
수여군구구근등십오인 지궁검주마 여인망지 불능차알. 범양일치명어소정방 당인문지 희위회서. 열기우양일회 유신가기용 여급찬위. 급군환 유신고왕왈 “열기구근 천하지용사야. 신이변의허위급찬 이미부공로 원가입사찬.”
드디어 군사(軍師) 구근(仇近) 등 열다섯 사람들과 함께 활과 칼을 지니고 말달려 나가니, 고구려인들이 바라만 보고 막지 못하였다. 이틀 만에 그들이 소정방에게 명을 전달하니, 당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위로하고 회신을 주었다. 열기가 다시 이틀이 지나서 돌아오니 유신이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의 벼슬을 주었다. 군대가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유신이 왕에게 아뢰었다.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의 직위를 허락하였으나 공로에 비하면 미흡하오니 사찬의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王曰 “沙飡之秩 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왕왈 “사찬지질 불역과호?” 유신재배왈 “작록공기 소이수공 하위과호?” 왕윤지.
왕은 “사찬의 관직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유신이 재배하고 말했다. “벼슬과 녹봉은 공공의 그릇으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온대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太守.
후유신지자삼광집정 열기취구군수 불허. 열기여지원사긍순경왈 “아지공대 청군부득 삼광태이부사이망아호.” 순경설삼광 삼광수이삼년산군태수.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찾아와 군수 자리를 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祗園寺)의 승려 순경(順憬)에게 말했다. “나의 공로가 큰데도 군수의 자리를 청했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광은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도 나를 잊어버렸나보다.” 순경이 삼광에게 이를 말하였더니, 삼광이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북 보은) 태수직을 주었다.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구근종원정공 축서원술성 원정공개인언 위태어사 장지.. 구근왈 “복상여열기입불측지지 불욕대각간지명 대각간불이복위무능 대이국사 슴이부언죄지 평생지용 무내차언 원정문지 종신수회.
구근이 원정공(元貞公)을 따라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한다 여겨 곤장을 쳤다. 구근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열기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땅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지 않고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지금 허황된 말을 믿고 나에게 죄를 씌우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원정공이 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워하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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