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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七-官昌

官昌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太宗大王.

관창[일운관장] 신아장군품일지자 표도아 소이위화랑 선여인교. 년십육 능기마만궁 대감모천지태종대왕.

 

관창(官昌)[혹은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용모가 우아하였으며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16세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떤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지당현경오년경신 왕출사 여당장군침백제 이관창위부장 지황산지야 양병상대 부품일위왈 이수유년 유지기 금일시립공명취당귀지시 기가무용호?”

 

당 현경(顯慶) 5년 경신(서기 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병사가 대치하였는데 아버지 품일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쏘냐?”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擣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俾脫冑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관창왈 즉상마횡창 직도적진 치살수인. 이피중아과 위적소로 생치백제원수계백전. 계백비탈주 애기소차용 불인가해 내탄왈 신라다기사 소년상여차 황장사호?” 내허생환.

 

관창은 그렇습니다.”라 하고,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의 원수(元帥) 계백(階伯)의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기고 그가 어린 나이인데도 용맹한 것을 애틋하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빼어난 인물이 많구나. 소년조차 이러하거늘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이에 관창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掬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관창왈 향오입적중 불능참장건기 심소한야 재입필능성공.” 이수국정수 음흘 재돌적진질투. 계백금참수 계마안송지. 품일집기수 유식혈왈 오아면목여생 능사어왕사 무소회의.”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맹렬하게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내 아들의 얼굴 모습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랏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으리.”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噪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飡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삼군견지 강개유입지 고조진격 백제대패 대왕증위급찬 이례장지 부기가당연삼십필이십승포삼십필곡일백석.

 

전군이 그 광경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뜻을 다지고는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나라 비단 30필과 이십승포 30,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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