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三國史記

列傳 第四-乙支文德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開皇 當作大業]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을지문덕 미상기세계. 자침지유지수 겸해속문. 수개황[개황 당작대업]중 양제하조정고구려. 어시 좌익위대장군우문술 출부여도 우일위대장군우중문 축낙랑도 여구군지압록수. 문덕수왕명지기영사항 실욕관기허실. 술여중문 선봉밀지 약우왕급문덕래 즉집지. 중문등 장유지 상서우유사룡 위안무사 고지지. 수청문덕귀 심회지 견인태문덕왈 “경욕유의 가복래?” 문덕불고 수제압록이귀. 술여중문 기실문덕 내불자안 술이양진욕환 중문위이정예추문덕 가이유공 술지지 중문노왈 “장군장십만병 불능파소적 하안이견제?” 술등부득이이종지 도압록수추지. 문덕견수군사유기색 욕피지 매전첩배 술등일일지중 칠전개첩 기시취승 우핍군의 수진동 제살수 거평양성 삼십리 인산위영.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고 겸하여 글도 지을 줄 알았다. 수(隋) 개황(開皇)[대업(大業)의 잘못]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게 하자,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鴨淥江)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거짓 항복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의 허실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중문은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붙잡아두라는 밀지를 받은 바 있었다. 이에 따라 우중문 등은 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慰撫使)로 있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꾀며 말했다.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 문덕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쫓으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우문술이 이를 말렸다. 우중문이 성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자그마한 적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소?” 우문술 등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매번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루 동안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무리의 의견에 떠밀려,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문덕유중문시왈 “신책구천문 묘산궁리지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 중문답서유지 문덕우견사사항 청어술왈 “역선사자 당봉왕조행재소.” 술견사졸피폐 불가복전 우평양성험고 넌이졸발 수인기사이환 위방진이행. 문덕출군 사면초격지 술등차전자행지살수. 군반제 문덕진군 격기후군 살우둔위장군신세웅. 어시재군구궤 불가금지 구군장사분환 일일일야 지압록수 행사백오십리. 초 도요 구군삼십만오천인 급환지요동성 유이천칠백인.

 

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신기한 책략은 천문에 다하였고,

묘한 지혜는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다.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대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 올리겠소.”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곤하고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당장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것을 기회 삼아 돌아가기로 하고 방진(方陣)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문덕이 군대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는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가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군대가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 문덕이 군대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들이쳐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을 죽였다. 그러자 모든 군대가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의 장졸이 급히 달아나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이날 간 거리가 4백50리였다. 처음 요수(遼水)를 건너올 때 9군이 30만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遼東城)에 돌아갔을 때는 고작 2천7백 명뿐이었다.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사관이 논평한다. 양제의 요동(遼東) 싸움은 군대를 일으킨 성대함이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이를 막아내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의 군사를 거의 다 없앨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좌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列傳 第四-居道  (0) 2020.03.18
列傳 第四-居柒夫  (0) 2020.03.17
列傳 第三-金庾信 下  (0) 2020.03.16
列傳 第二-金庾信 中  (0) 2020.03.14
列傳 第一 -金庾信 上  (0) 2020.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