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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第二-金庾信 中

金庾信 中

 

二年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爲五道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僵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

이년추팔월 백제장군은상 내공석토등칠성. 왕명유신급죽지진춘천존등장군 출어지. 분삼군위오도격지 호상승부 경순불해 지어강시만야 유혈부저 어시든어도살성하 갈마향사 이도재거 시유수조동비 과유신지막 장사견지 이위불상. 유신왈 차부족괴지 위중왈 금일필유백제인래첩여등양부지 물감수하.” 우리순우군중왈 견벽부동 대명일원군지 연후결전.”

 

진덕왕 2(서기 649) 가을 8, 백제(百濟) 장군 은상(殷相)이 쳐들어와서 석토(石吐)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였다. 진덕왕은 유신(庾信)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삼군을 다섯 갈래의 길로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서로간에 이기고 지고 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신라군은 도살성(道薩城, 충남 천안) 아래 주둔하면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서 다시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신의 군막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불길하게 여겼다. 유신이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 반드시 백제인이 정탐하러 올 것이다. 너희는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 말라.” 그리고는 군중에 명령을 내렸다.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온 다음에 결전을 하겠다.”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 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첩자문지 귀보은상. 은상등위유가병 불능불의구. 어시 유신등일시분격 대극지. 생획장군달솔정중사졸일백인 참좌평은상달솔자견등십인급졸팔천구백팔십인 획마일만필 개일천팔백령. 기타기계칭시. 급귀환 노견백제좌평정복여졸일천인항 개방지. 임기소왕 지경성 대왕영문 노위우후.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신라의 병력이 증가된다는 사실에 의심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신 등이 일시에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은 장군 달솔 정중(正仲)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自堅) 10명과 군사 898십 명의 목을 베었고, 1만 필과 갑옷 1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밖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들이 돌아올 때 길에서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므로 이들을 모두 풀어주어 가고 싶은 데로 가게 하였다. 경성(京城)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며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飡謀 迎春秋伊飡 卽位 是爲太宗大王.

영휘오년 진덕대왕훙 무사. 유신여재상알천이찬모 영춘추이찬 즉위 시위태종대왕.

 

영휘(永徽) 5(서기 654), 진덕대왕(眞德大王)이 돌아가셨으나 대를 이를 자식이 없었다. 유신은 재상인 이찬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이찬 춘추(春秋)를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 사람이 바로 태종대왕(太宗大王)이다.

 

永徽六年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押級飡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押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未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영휘육년을묘추구월 유신입백제 공도비천성극지. 시시 백제군신 사태음일 불휼국사 민원신노 재괴누견 유신고어왕왈 백제무도 기죄과어걸주 차성순천조민벌죄지추야.” 선시 조미압급찬위부산현령 피노어백제 위좌평임자지가노. 종사근각 승무해만 임자련지불의 종기출입. 내도귀이백제지사 고유신. 유신지조미압충정이가용 내어왈 오문임자전백제지사 사유이여모이미유자기위아 재귀언지.” 답왈 공불이복위불초 이지사지 수사무회.”

 

영휘 6(서기 655) 을묘 가을 9, 유신은 백제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때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은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변괴가 여러 번 나타났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였다. “백제가 무도하여 그 죄악이 걸()ㆍ주()보다 심하니, 이제는 진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죄 있는 자들을 벌할 때입니다.” 이에 앞서 급찬 조미압(租未押)이 부산(夫山)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에 잡혀가서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일을 보살펴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도망하여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보고하였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쓸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에게 말하길 나는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들었다. 내가 그와 의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아직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임자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라.” 조미압이 대답하였다. “공이 저를 못나고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고 일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 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押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수복입어백제 고임자왈 노자이위기위국민 의지국속 시이 출유누순불반 불승견마연주지성 고차래이.” 임자신지불책 조미압사간보왈 전자 외죄불감직언 기실 왕신라환래 유신유아래고어군왈 방국흥망 불가선지 약군국망 즉군의어아국 아국망 즉오의어군국. .

 

조미압이 마침내 다시 백제로 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저의 생각에 기왕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겠기에 수십일 동안 구경 다니며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처럼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그 말을 믿고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이 틈을 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대로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신라에 갔다 왔습니다. 유신이 주인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며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에 의탁하고, 우리나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의 나라에 의탁하기로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任子聞之 嘿然無言 租未押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押驚恐而對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 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 愈急幷呑之謀.

임자문지 묵연무언 조미압황구이퇴 댜죄수월 임자환이문지왈 여전설유신지언 약하? 조미압경공이대 여전소언. 임자왈 이소전 아이실지 가귀고지 수래설 겸급중외지사 정녕상실 어시 유급병탄지모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압은 두려워하며 물러나왔다. 대죄(待罪)한 지 수개월이 지나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전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임자의 말을 전하고 더불어 백제의 안팎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유신은 백제를 병탄(幷呑)할 계획을 더욱 더 급히 하였다.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入唐請師波珍飡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艘 載兵士會之. 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沘之城 太子來告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칠년경신하유월 대왕여태자법민 장벌백제 대발병 지남천이영. 시입당청사파진찬김인문 여당대장군소정방유백영 령병십삼만 과해도덕물도 선견종자문천래고. 왕명태자여장군유신진주천존등 이대선일백수 재병사회지. 태자견장군소정방 정방위태자왈 오유해로 태자등육행이칠월십일 회우백제왕도사비지성.” 태자래고 대왕솔장사 행지사라지정.

 

태종대왕 7(서기 660) 경신 여름 6,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을 데리고 백제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남천(南川)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때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던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의 대장군 소정방(蘇定方)ㆍ유백영(劉伯英)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 덕적도)에 도착하여 먼저 종자 문천(文泉)을 보내 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병사들을 태우고 가서 회합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泗沘城, 충남 부여)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태자가 돌아와서 왕께 고하니, 왕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사라정(沙羅停)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技伐浦 海岸泥濘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 唐皇帝聞之 遣使褒嘉之. 將軍定方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爲食邑 以酬厥功 如何.” 庾信對曰 大將軍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抃之不暇 而吾等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장군소정방김인문등 연해입기벌포 해안니녕 함불가행. 내포유석 이출사. 당라합격백제멸지. 차역야 유신지공위다. 어시 당황제문지 견사포가지. 장군정방위유신인문량동삼인왈 오수명이편의종사 금이소득백제지지 분석공등위식읍 이수궐공 여하.” 유신대왈 대장군이천병래 부과군지망 설고국지수 과군급일굴긴민 희변지불가 이오등독수사이자리 기여의하.” 수불수.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은 연해를 따라 기벌포에 이르렀으나 해안이 진창이어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들로 자리를 만들어 깔아놓고 군대를 내리게 하였다. 당과 신라는 연합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싸움에서 유신의 공적이 많았다. 당 황제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를 치하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 인문, 양도(良圖) 등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재량껏 일을 처리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소. 지금 싸워 얻은 백제 땅을 공들에게 식읍으로 나누어 주어 여러분의 공에 보답코자 하는데 어떻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대장군이 귀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에 부응하고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주니,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만이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는 끝내 받지 않았다.

 

 

 

唐人旣滅百濟 營於泗沘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群臣問策 多美公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沘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旣獻俘.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 如父兄 雖小不可謀也.”

당인기멸백제 영어사비지구 음모침신라. 아왕지지 소군신문책 다미공진왈 영아민 사위백제지인 복기복 약욕위적자 당인필격지 인여지전 가이득지의.” 유신왈 사언가취 청종지.” 왕왈 당군위아멸적 이반여지전 천기우아야.” 유신왈 견외기주 이주답기각 즉교지 이가우난 이부자구호 청대왕허지.” 당인첩지아유비 노백제왕급신료구십삼인졸이만인 이구월삼일 자사지범선이귀 유낭장유인원들 진수지 정방기헌부. 천자위자지왈 하불인이벌신라?” 정방왈 신라기군인이애민 기신충이사국 하지인사기상 여부형 수소불가모야.”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사비(泗沘) 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를 침공할 것을 은밀히 꾀하였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하길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가장하여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말하였다. “이 의견이 취할 만하니 따르시길 바라나이다.” 왕이 말했다. “당군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없애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유신은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소서.” 하였다. 당나라가 우리가 대비하고 있음을 염탐하여 알고, 백제왕과 신하 93,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93일에 사비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며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정방이 귀국하여 천자에게 포로를 바쳤다. 천자가 정방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정방이 말했다. “신라는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飡品日蘇判文王大阿飡良圖等 爲將軍 往伐之 不克. 又遣伊飡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濟師. 高句麗靺鞨謂 新羅銳兵皆在百濟 內虛可擣. 發兵 水陸並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원년춘 왕위백제여신상재 불가불명 이이찬품일소판문왕대아찬량도등 위장군 왕벌지 불극 .우견이찬흠순[일작흠춘]진흠천존소판죽지등제사. 고구려말갈위 신라예병개재백제 내허가도. 발병 수륙병진 위북한산성 고구려영기서 말갈둔기동 공격협순 성중위구. 홀유대성낙어적영 우뇌우진격 적등의해 해위이둔. 초유신문적위성왈 인력기갈 음조가자 예불사 설단기도 회유천변 개위지성소감야.”

 

용삭(龍朔) 원년(서기 661) , 왕은 백제의 잔당이 아직 남아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찬 품일(品日), 소판 문왕(文王), 대아찬 양도(良圖) 등을 장군으로 삼아 백제로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찬 흠순(欽純)[혹은 흠춘(欽春)이라 한다.], 진흠(眞欽), 천존(天存)과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병력을 추가하였다. 고구려(高句麗)와 말갈(靺鞨)은 신라의 정예병이 모두 백제에 가 있어 내부가 비어 있으므로 신라를 공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군사를 출동시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성의 서쪽에 진을 치고 말갈은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열흘 동안 공격을 계속하자 성 안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때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고 우레가 쳤다. 그러자 적들은 당혹스럽고 놀라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처음에 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말했다.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으니 하늘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절에 가서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였는데, 마침 하늘에서 괴변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이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라고 말하였다.

 

庾信嘗以中秋夜 領子弟 立大門外 忽有人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有底事乎?” 其人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但以實告 又不言 庾信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유신상이중추야 영자제 입대문외. 홀유인종서래 유신지고구려첩자 호사지전왈 이국유저사호?” 기인부이불감대 유신왈 무외야당이실고 우불언 유신고지왈 오국왕 상불위천의 하불실인심 백성흔연 개악기업 금이견지 왕고이국인.” 수위송지 여인간지왈 신라수소국 유신위상 불가경야.”

 

유신이 일찍이 추석 날 밤에 자제들을 데리고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오는데 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인 것을 알고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서는 물었다.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을 못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사실대로 고하여라.” 역시 대답이 없었다. 유신이 깨우쳐주며 말하였다. “우리나라 임금께서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흔쾌히 모두 자기의 생업을 즐기고 있다. 이제 네가 이것을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라!” 그리고는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유신이 재상으로 있으니 가벼이 볼 수 없다.”

 

六月 唐高宗皇帝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 文武大王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沘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遮路 不可直前.” 於是 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龔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유월 당고종황제견장군소정방등 정고구려. 입당숙위김인문 수명래고병기 겸유출병회벌. 어시 문무대왕솔유신인문문훈등 발대병향고구려 행차남천주. 진수유인원 이소영병 자사비범선 지혜포하륙 역영어남천주. 시유사보 전로유백제잔적 둔취옹산성차로 불가직전.” 어시 유신이병진이위성 사인근성하 여적장어왈 이국불공 치대국지토 순명자상 불순명자륙 금여등 독수호성자욕하위호 종필도지 불여축항 비독존명 부귀가기야.”

 

6, 당 고종(高宗) 황제가 장군 소정방(蘇定方)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케 하였다. 당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던 김인문(金仁問)이 명을 받고 와서 출병 기일을 보고하고 겸하여 신라에서도 군사를 내어 함께 고구려를 치라는 당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유신, 인문, 문훈(文訓) 등을 인솔하고 대병을 일으켜 고구려로 향하는 중에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다. 백제 땅에서 진영을 수비하던 유인원(劉仁願)도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鞋浦)에 내려 역시 남천주에 진을 쳤다. 이때 유사(有司)가 와서 보고하였다. “앞에 백제의 잔당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옹산성(瓮山城, 대전 계족산성)에 주둔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곧장 전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유신이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로 가까이 접근하여 적장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대국의 토벌을 받게 된 것이다. 명에 순응하는 자는 상을 받고 명을 거역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결국 참혹하게 죽을 수밖에 없으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賊高聲唱曰 雖蕞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將士 劉仁願亦分絹有差. 於是 饗士秣馬 欲往會唐兵.

적고성창왈 수최이소성 병식구족 사졸의용 녕위사전 서불생항.” 유신소왈 궁조인수 유비자구 차지위야.” 내휘기명고공지. 대왕등고견전사 누어격려지 사졸분돌 봉인불고. 구월이십칠일 성함 착적장육지 방기민. 논공상장사 유인원역분견유차. 어시향사말마 욕왕회당병.

 

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비록 하잘것없는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분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유신이 웃으며 말했다. “궁지에 몰린 새나 곤경에 처한 짐승도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는 곧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전사들을 보며 눈물어린 말로 격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분격 돌진하여 칼날을 겁내지 않았다. 927일에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잡아 죽이고 백성들은 놓아 주었다. 공에 따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유인원도 역시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인 다음 당군과 합세하고자 하였다.

 

大王前遣太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대왕전견태감문천 이서소장군. 지시복명 수전정방지언왈 아수명만리 섭창해이토적 의주해안기유월의 대왕군사부지 양도불계 기위태심의 왕기도지.”

 

대왕은 이보다 앞서 태감 문천(文泉)을 소장군에게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다. 이때 문천이 돌아와 복명하고 소정방의 말을 전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먼 곳에서 창해를 건너 적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정박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소. 그러나 대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않아 심히 위태로우니 왕은 대책을 세워주시오.”

 

大王問群臣 如之何而可 皆言深入敵境輸粮 勢不得達矣 大王患之 咨嗟. 庾信前對曰 臣過叨恩遇 忝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 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대왕문군신 여지하이가 개언심입적경수량 세부득달의 대왕환지 자차. 유신전대왈 신과도은우 첨욕중기 국가지사 수사불피 금일시노신진절지일야 당향적국 이부소장군지의.” 대왕전석 집기수하누왈 득공현필 가이무우 약금자지역 망건우소 즉공지공덕 갈일가망. ”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은가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적의 경내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니 대왕이 이를 걱정하며 탄식하자. 유신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였다. “제가 과분한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도 중임을 맡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절개를 다할 때이오니, 제가 적국으로 들어가 소()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왕은 자리를 앞으로 옮겨 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근심할 게 없소. 만약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의 공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庾信旣受命 至懸鼓岑之岫寺 齋戒卽靈室 閉戶獨坐 焚香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書告庾信 出彊之後 賞罰專之 可也.”

유신기수명 지현고잠지수사 제계즉영실 폐호독좌 범향누일야이후출 사자희왈 오금지행 득불사의.” 장행 왕이수서고유신 출강지후 상벌전지 가야.

 

유신은 명령을 받은 후 현고잠(懸鼓岑)의 토굴로 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영실(靈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피운 지 며칠 밤낮이 지나서야 나와서, 혼자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이번 가는 길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떠나려 할 때 왕이 손수 유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국경을 나선 뒤에는 상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粮 入高句麗之界.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怕死 豈合來此?”

십이월십일 여부장군인문진복양도등구장군 솔병재량 입고구려지계. 임술정월이십삼일 지칠중하 인개공구 불감선등 유신왈 제군약파사 이합래차?”

 

1210, 부장군 인문, 진복(眞服),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양곡을 싣고 고구려 경계로 들어갔다. 임술년(서기 662)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승선하려는 자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제군들이 처벌이 두려워 합류했는가?”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 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䔉壤.

수선자상선이제 제장졸 상수도하 입고구려지경. 여여인요어대로 수자험애이행 지어산양.

 

유신이 마침내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가니, 모든 장졸이 서로 뒤를 따라 강을 건너 고구려 경내로 들어섰다. 고구려군이 큰 길에서 요격할까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䔉壤)에 이르렀다.

 

庾信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埸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俘幼少 以奴使之者 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유신여제장사왈 여제이국 침능하강역 적해아인민 혹노정장 이참륙지 혹부유소 이노사지자 구의 기가불통호? 오금소이불외사부난자 욕자대국지력 멸이성 이설국수 서심고천 이기음조 이미지중심여하. 고언급지 약경적지 필상공이귀 약외적 즉이면기금획호? 의동심협력 무불이일당벡 시소망어제공자야.”

 

유신이 여러 장병들에게 말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우리 백성을 해쳤다. 혹은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어린아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한 일이 오래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에 나선 것은, 대국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멸망시켜 나라의 원한을 씻으려는 것이다. 마음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명의 도움을 기대하는데,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나, 만약 적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하나가 백을 당해내기를 제군들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諸將卒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 乃鼓行向平壤.”

제장졸개왈 원봉장군지명 불감유유생지심 내고행향평양.”

 

모든 장졸들이 말했다.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감히 갖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곧 북을 치며 행진하여 평양(平壤)으로 향했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 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僵仆.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出汗 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로봉적병 역격극지 소득갑병 심다. 지장색지험 회천한열 인마피비 왕왕강부. 유신노견집편 책마이전구. 중인견지 노력분주출한 불감언한. 수과험 거평양불원. 유신왈 당군핍식군박 의선보지.” 내환보기감열기왈 오소여이유 지이지절 금욕치의어소장군 이난기인 여가행부?”

 

도중에 적병을 만나 역습하여 이기고 갑옷과 무기를 많이 노획하였다. 험한 길에 막히고 때마침 날씨가 몹시 차고 사람과 말이 지쳐서 왕왕 쓰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어깨와 팔뚝을 걷어붙이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힘껏 달리어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험한 곳을 지나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당군이 식량이 떨어져 궁색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먼저 소식을 알려야겠다.” 그는 보기감 열기(裂起)를 불러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다. 이제 소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使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致資粮 已達近境定方喜以書謝之.

열기왈 오수불초 람중군직 황욕장군사령?” 수사지일 유생지년. 수여장사구근등십오인 지평양견소장군왈 유신등영병치자량 이달근경 정방희이서사지.

 

열기가 제가 비록 불초한데도 외람되게 중군의 직책에 있는데, 하물며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설사 오늘 죽는다 해도 살아있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드디어 장사 구근(仇近) 1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했다. “유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수송하여 이미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소.” 소정방이 기뻐하여 감사의 글을 전했다.

 

庾信等行抵楊隩 見一老人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隩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餽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粮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유신등행저양오 견일노인문지 구실적국소식. 사지포백 사불수이거. 유신영양오 견해한어저인문양도급자군승등 달당영 이왕지궤군량. 정방이식진병치 불능역전 급득량 변회당. 양도이병팔백인 범해환국.

 

유신 등이 양오(楊隩)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상황을 물었는데, 노인이 적국의 소식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유신은 노인에게 베와 비단을 주었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버렸다. 유신이 양오에 진영을 만들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인문, 양도와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당의 진영에 보내 왕의 뜻을 전달하고 군량을 주게 하였다. 소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힘껏 싸우지 못하다가 식량을 얻게 되자 바로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도 병력 8백 명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時 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以鼓及桴 繫群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 潛行至薸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 賞賜封邑爵位有差.

시 여인복병 욕요격아군어귀로. 유신이고급부 계군우요미 사휘격유성 우적시초연지 사연화부절. 야반 잠행지포하 금도안휴병. 여인지지래추 유신사만노구발. 여군차퇴 솔여제당장사분발거격패지. 셍금장군일인 참수일만여급. 왕문지 견사노지 급지 상사봉읍작위유차.

 

이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잠복시켜 우리 군사를 귀로에서 요격하려고 하였다. 유신은 북과 북채를 여러 마리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고는 후려쳐서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고, 또한 섶풀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는 밤에 몰래 행군하여 포하(薸河)에 이르자 급히 강을 건너 병사들을 쉬게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쫓아오자, 유신은 1만의 쇠뇌를 일시에 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후퇴하므로 모든 진영의 장병들을 독려하여 무리를 나누어 들이쳐 무너뜨리고, 장군 한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공의 정도에 따라 봉읍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용삭삼년계해 백제제성 잠도흥부. 기거수서두솔성 걸사어왜위원조. 대왕친솔유신인문천존죽지등장군 이칠월십칠일 정토. 차웅진주 여진수유인원합병 팔월십삼일 지우두솔성. 백제인여왜인출진 아군역전대패지 백제여왜인개항. 대왕위왜인왈 유아여이국 격해분강 미상교구 단결호강화 빙문교총 하고금일여백제동악 이모아국? 금이군졸재아장악지중 불인살지 이기귀고이왕.”

 

용삭 3(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熊津州)에 가서 진수관(鎭守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나와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찍이 서로 다툰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우호관계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교유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아귀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厭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임기소지 분병격제성항지 유임존성 지험성고 우이양다 시이동지삼순 불능하 사졸피곤염병. 대왕왈 금수일성미하 이제여성보개항 불가위무공.” 내진여이환.

 

그리고 왕은 그들을 마음대로 가게 하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오직 임존성(任存城) 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한 데다 군량마저 풍족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따라서 군사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해져 싸울 뜻이 없자 대왕이 말했다. “지금 성 하나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동시월이십일 지경 사유신전오백결 기여장졸상사유차.

 

겨울 1120, 서울에 당도하여 유신에게 밭 5백 결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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