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 下
麟德元甲子三月 百濟餘衆 又聚泗沘城反叛. 熊州都督 發所管兵士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 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授之陰謀 以克之.
인덕원갑자삼월 백제여중 우취사비성반반 웅주도독 발소관병사공지 누일무색 불변인물 시고불능전 사백산래고지 유신구지음모 이극지.
인덕(麟德) 원년(서기 664) 갑자 3월, 백제(百濟)의 남은 군사들이 다시 사비성(泗沘城)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熊州) 도독이 자기 휘하의 병사들로 공격했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싸움을 할 수 없어 백산(伯山)을 시켜 사정을 알리니, 유신(庾信)이 계략을 알려 주어 그들을 이겼다.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인덕이년 고종견사양동벽임지고등래빙 겸책유신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 식읍이천로.
인덕 2년(서기 665)에 당 고종(高宗)이 사신 양동벽(梁冬碧)과 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예방하고, 동시에 유신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乾封元年 皇帝勑召庾信長子大阿飡三光 爲左武衛翊府中郞將 仍令宿衛.
건봉원년 황제칙소유신장자대아찬삼광 위좌무위익부중낭장 잉령숙위.
건봉(乾封) 원년(서기 666), 당 황제가 칙명으로 유신의 맏아들 대아찬 삼광(三光)을 불러들여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고 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摠章元年戊辰 唐高宗皇帝 遣英國公李勣 興師伐高句麗 遂徵兵於我 文武大王 欲出兵應之 遂命欽純仁問爲將軍.
총장원년무진 당고조황제 견영국왕자이적 흥사벌고구려 수징병어아 문무대왕 역출병응지 수명 흠순인문위장군.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 무진에 당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우리에게도 병사를 징발케 하였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군사를 내어 호응하고자 흠순(欽純)과 인문(仁問)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欽純告王曰 若不與庾信同行 恐有後悔 王曰 公等三臣 國之寶也 若摠向敵場 儻有不虞之事 而不得歸 則其如國何 故欲留庾信守國 則隱然若長城 終無憂矣
음순고왕왈 약불여유신동행 공유후회. 왕왈 공등삼신 국지보야 약총향적장당유우우지사 이부득귀 즉기여국하 고역유유신수국 즉은연약장성 종무우의.
흠순이 왕에게 아뢰었다.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왕이 말했다. “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의 땅으로 갔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하니 유신을 이곳에 남겨 나라를 지키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장성(長城)과 같아 아무 근심이 없으리라.”
欽純 庾信之弟 仁問 庾信之外甥 故尊事之. 不敢抗 至是 告庾信曰 “吾等不材 今從大王 就不測之地 爲之奈何 願有所指誨.”
흠순 유신지제인문 유신지외생 고존사지. 불감항 지시 고유신왈 “오등부재 금종대왕 취불즉지지 위지내하 원유소지회.”
흠순은 유신의 동생이었으며, 인문은 유신의 여동생의 아들이었던 터라 그들은 유신을 높이 섬기고 있었다. 감히 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저희는 재주가 없는데도 지금 대왕의 뜻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答曰 “夫爲將者 作國之干城 君之爪牙 決勝否於矢石之間.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可得成功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慠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況憑大國明天子之威稜哉 往矣勉焉 無墮乃事.”
답왈 부위장자 작국지간성 군지과아 결승부어시석지간. 필상득천도 하득지리 중득인심 연후가득성공 금아국리충신이존 백제이오만이망 고구려이교만이태. 금약이아지직 격피지곡 가이득지 황빙대국명천자지위능재 왕의면언 무타내사.
유신이 대답했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干城, 방패와 성곽)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전쟁터에서 승부를 내야 되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민심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성과 신의로서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들의 그릇됨을 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큰 나라의 밝으신 천자의 위엄에 힘입고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어서 가서 노력하여 맡은 일에 그르침이 없도록 하라!”
二公拜曰 “奉以周旋 不敢失墮.”
이공배왈 봉이주선 불감실타.
이에 두 사람이 절을 하면서 말했다. “공의 뜻을 받들어 잘 실행하여 감히 실패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穠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문무대왕기여영공 파평양 환도남한주 위군신왈 “석자 백제명농왕재고리산 모침아국 유신지조 무력각간 위장역격지 승승부기왕급재상사인여사졸 이절기충 우기부서현 위양주총관 누려백제전 좌기예 사부득범경.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平壤)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백제 성왕)이 고리산(古利山)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각간 무력(武力)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쳐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旰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고변민안농상지업 군신무소한지우. 금 유신승조고지업 위사직지신 출장입상 공적무언. 약불의뢰공지일문 국지흥망 미가지야 기어직상 의여하야.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와 양잠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돌보는 데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여야 옳겠는가?”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佐 各賜位一級.
군신왈 “성여왕지.” 어시 수태대서발한지직 식읍오백호. 잉사여장 상전불추. 기제요좌 각사위일급.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참으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전에 오를 때도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도 각각 직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宣慰 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獎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傳於家 至五世孫失焉.
총장원년 당황제 기책영공지공. 수견사선위 제사조전 겸사금백. 역수조서어유신 이포장지 차유입조 이불과행. 기조서전어가 지오세손실언.
총장 원년(서기 668)에 당나라 황제가 영공의 전공을 포상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군대를 내어 싸움을 도와준 데 대하여 위로를 베풀고 금과 비단을 하사했다. 또한 유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궁에 들어와 조회하라고 유시하였는데, 유신이 가지는 못하였다. 이 조서는 그의 집안에 전하여 오다가 5세손 때 잃어버렸다.
咸亨 四年癸酉 是文武大王十三年 春 妖星見地震 大王憂之 庾信進曰 “今之變異 厄在老臣 非國家之災也 王請勿憂.” 大王曰 “若此則寡人所甚憂也.” 命有司祈禳之.
함형 사년계유 시문무대왕십삼년 춘 요성현지진 대왕우지. 유신진왈 “금지변이 액재노신 비국가지재야 왕청물우.” 대왕왈 “약차즉과인소심우야.” 명유사기양지.
함형(咸亨) 4년(서기 673) 계유는 곧 문무대왕 13년이다. 그해 봄에 요성(妖星)이 나타나고 지진이 나자 대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유신이 나아가 말했다. “오늘의 변괴는 그 재액이 소신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대왕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과인의 큰 걱정거리요.” 왕은 담당관에게 재액을 물리치도록 기도하게 명하였다.
夏六月 人或見戎服持兵器數十人 自庾信宅泣而去 俄而不見. 庾信聞之曰 “此必陰兵護我者 見我福盡 是以去 吾其死矣.” 後 旬有餘日 寢疾 大王親臨慰問.
하유월 인혹견융복지병기수십인 자유신댁읍이거 아이불견. 유신문지왈 “차필음병획아자 견아복진 시이거 오기사의.” 후 순유여일 침질 대왕친임위문.
여름 6월에 융복(戎服,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에서 울면서 나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간혹 있었다.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陰兵)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십여 일 지나서 유신이 병으로 눕게 되자 대왕이 몸소 행차하여 위문하였다.
庾信曰 “臣願竭股肱之力 以奉元首 而犬馬之疾至此 今日之後 不復再見龍顔矣.”
유신왈 신원갈고굉지력 이봉원수 이견마지질지차 금일지후 불복재견용안의.
유신이 말하였다. “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임금을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大王泣曰 “寡人之有卿 如魚有水 若有不可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대왕읍왈 “과인지유경 여어유수 약유불가휘 기여인민하 기여사직하?”
대왕은 울면서 말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오. 만약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이 왕조는 어찌하란 말이오!”
庾信對曰 “臣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所幸者 明上 用之不疑 任之勿貳 故得攀附王明 成尺寸功.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隳廢 甚可痛也. 伏願 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和於上 民物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王泣而受之
유신대왈 “신우불초 이능유익어국가? 소행자 명상 용지불의 임지물이 고득반부왕명 성척촌공. 삼한위일가 백성무이심 수미지태평 역가위소강. 신관자고계체지군 미불요초 선극유종. 누세공적 일조휴폐 심가통야. 복원 전하 지성공지불이 영수성지역난 소원소인 친근군자 사조정화어상 민물안어하 화한불작 기업무궁 즉신사차무감.” 왕읍이수지.
유신이 대답하였다. “신은 어리석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고, 변치 않고 임무를 맡겨 주셨기에, 대왕의 밝으심에 의지하여 하찮은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옵건대 예로부터 제왕의 자리를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하지 않는 이 없지만 끝까지 이루어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을 편안하게 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대대로 왕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면서 이 말을 받아들였다.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지추칠월일일 훙우사제지정침 향년칠십유구 대왕문부진동 증부채백일천필조이천석 이공상사 급군악고취일백인 출장우금산원 명유사립비 이기공명 우정입민호 이수묘언.
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하며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조하여 상사(喪事)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사람)수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내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을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였다.
妻智炤夫人 太宗大王第三女也. 生子五人 長曰三光伊飡 次元述蘇判 次元貞海干 次長耳大阿飡 次元望大阿飡. 女子四人 又庶子軍勝阿飡 失其母姓氏. 後 智炤夫人 落髮衣褐 爲比丘尼.
처지소부인 태종대왕제삼녀야. 생자오인 장왈삼광이찬 차원술소판 차원정해간 차장이대아찬 차원망대아찬 여자사인 우서자군승아찬 실기모성씨.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요,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딸이 넷이었으며 또한 서자로서 아찬 군승(軍勝)이 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후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時 大王謂夫人曰 今 中外平安 君臣高枕而無憂者 是太大角干之賜也 惟夫人宜其室家 儆誡相成 陰功茂焉 寡人欲報之德 未嘗一日忘于心 其餽南城租每年一千石. 後 興德大王封公爲興武大王.
후 지소부인 낙발의갈 위비구니 시 대왕위부인왈 금 중외평안 군신고침이무우자 시태대각간지사야 유부인의기실가 경계상성 음공무언 과인욕보지덕 미상일일망우심 기궤남성조매년일천석 후 흥덕대왕봉공위흥무대왕.
이때 대왕이 부인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각간 유신공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이오. 이는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고 서로 깨우쳐가며 내조한 공로가 컸소. 과인은 이러한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소이다. 그러하니 남성(南城)에서 거두는 조를 매년 1천 섬씩 줄 것이오.” 그 뒤에 흥덕대왕(興德大王)이 공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했다.
初 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 遣師來討. 唐軍與靺鞨 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時 長槍幢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 捉送大將軍之營. 於是 諸幢共言 “長槍營獨處成功 必得厚賞 吾等不宜屯聚 徒自勞耳.” 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 乘其未陣擊之. 吾人大敗 將軍曉川義文等死之.
초 법민왕 난고구려반중 우거백제고지유지. 당고종대노 견사래토. 당군여말갈 영어석문지야 왕견장군의복춘장등어지 영어대방지야. 시 장창당독별영 우당병삼천여인 착송대장군지영. 어시 제당공언 “장창영독처성공 필득후상 오등불의둔취 주자노이.” 수작별병분산. 당병여말갈 승기미진격지. 오인대패 장군효천의문들사지.
처음에 법민왕(法敏王, 문무왕)이 고구려 반군의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당 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당군이 말갈(靺鞨)과 함께 석문(石門) 들판에 진영을 차리자 왕은 장군 의복(義福), 춘장(春長)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여 대방(帶方) 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장창부대만이 따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맞닥뜨려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군영에서 일제히 말했다. “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후하게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각자 부대를 갈라 분산하였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아직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효천(曉川), 의문(義文)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庾信子元述 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 止之曰 “大丈夫 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
유신자원술 위비장 역욕전사 기좌담릉 지지왈 “대장부 비사지난 처사지위난야. 약사이무성 불약새이도후효.”
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이 비장으로서 또한 싸우다 죽으려고 하니, 그를 보좌하던 담릉(淡凌)이 만류하여 말했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때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훗날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答曰 男兒不苟生 “將何面目以見吾父乎?” 便欲策馬而走 淡凌攬轡不放 遂不能死. 隨上將軍出蕪荑嶺 唐兵追及之.
답왈 남아불구생 “장하면목이견오부호?” 변욕책마이주 담릉남비불방 수불능사. 수상장군출무이령 당병추급지.
원술이 대답하였다. “남아는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뵙겠는가?” 그는 곧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쥐고 놓지 않는 바람에 끝내는 죽지 못하였다.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병이 뒤를 추격하여 왔다.
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 謂上將軍曰 “公等努力速去 吾年已七十 能得幾時活也 此時是吾死日也.” 便橫戟突陣而死 其子亦隨而死.
거열주대감아진함일길간 위상장군왈 “공등노력속거 오년이칠십 능득기시활야 차시시오사일야.” 변횡극돌진이사 기자역수이사.
거열주(居烈州) 대감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했다. “공들은 힘을 다하여 속히 가도록 하라. 내 나이 벌써 칠십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가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도 역시 뒤따라서 죽었다.
大將軍等 微行入京 大王聞之 問庾信曰 “軍敗如此 奈何?” 對曰 “唐人之謀 不可測也 宜使將卒各守要害 但元述不惟辱王命 而亦負家訓 可斬也.” 大王曰 “元述裨將 不可獨施重刑” 乃赦之.
대장군등 미행입경 대왕문지 문유신왈 “군패여차 내하?” 대왈 “당인지모 불가측야 의사장졸각수요해 단원술불유욕왕명 이역부가훈 가참야.” 대왕왈 원술비장 불가독시중형 내사지.
대장군 등이 남모르게 조용히 서울로 들어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유신에게 물었다. “군대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을 시켜 제각기 긴요한 곳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대왕은 “원술은 비장인데 그에게만 유독 중형을 내릴 수는 없다.”라고 하고 용서해 주었다.
元述慙懼 不敢見父 隱遁於田園. 至父薨後 求見母氏 母氏曰 “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 宜從於子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 遂不見之.
원술참구 불감견부 은둔어전원. 지부훙후 구견모씨 모씨왈 부인유삼종지의 금기과의 의종어자 약원술자 기부득위자어선군 오언득위기모호 수불견지.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은둔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부인에게는 삼종의 도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좇아야 할 것이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비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하며 만나지 않았다.
元述慟哭擗踴而不能去 夫人終不見焉.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 乃入太伯山.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원술통곡벽용이불능거 부인종불견언 원술탄왈 “위담름소오 지어차극” 내입태백산. 지을해년 당병래 공매소천성 원술문지 욕사지 이설전치 수력전유공상 이불용어부모 분한불사 이종기신.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며 “담릉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고 곧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갔다. 을해년(서기 675)에 당병이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했다. 원술이 이 소식을 듣고 죽음으로 전날의 치욕을 씻고자 마침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지만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벼슬하지 않은 채 생을 마쳤다.
嫡孫允中 仕聖德大王 爲大阿飡 屢承恩顧 王之親屬 頗嫉妬之. 時 屬仲秋之望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以娛 命喚允中.
적손윤중 사성덕대왕 위대아찬 누승은고 왕지친속 파질투지. 시 속중추지망 왕등월성잠두조망 내여시종관 치주이오 명환윤중.
유신의 적손(嫡孫, 정실 부인의 자손) 윤중(允中)은 성덕대왕(聖德大王) 때 벼슬이 대아찬에 이르고 여러 차례 왕의 은총을 입자, 왕의 친족들이 그를 몹시 시기하였다. 때는 8월 보름날이었는데, 왕이 월성(月城) 꼭대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侍從官)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어 즐기다가 윤중을 불러오라 하였다.
有諫者曰 “今 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豈所謂親親者乎.”
유간자왈 “금 종실척리 이무호인 이독소소원지신 이소위친친자호.”
어떤 자가 간언하였다. “지금 종친과 인척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유독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이것이 어찌 이른바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겨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王曰 “今 寡人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祖之德也 若如公言 忘棄之 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群臣觖望而已.
왕왈 금과인여경등 안평무사자 윤중조지덕야 약여공언 망기지 즉비선선급자손지의야 수사윤중밀좌 언급기조평생 일만고퇴 사절영산마일필 군신결망이이.
왕이 말했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하고 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의 조부의 덕이다. 만약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드디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일생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마(絶影山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은 서운해 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開元二十一年 大唐遣使敎諭曰 “靺鞨渤海 外稱蕃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 相爲掎角 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 須差此人爲將.”
개원이십일년 대당견사교유왈 “말갈발해 외칭번한 내회교활. 금욕출병문죄 경역발병 상위기각문유구장김유신손윤중재 수차차인위장.”
개원(開元) 21년(서기 733)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말갈(靺鞨)과 발해(渤海)가 겉으로는 변방의 울타리라고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다. 이제 병사를 내어 죄를 묻고자 하니, 경도 병사를 출동시켜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라. 옛 장군 김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고 들었으니, 반드시 이 사람을 차출하여 장수로 삼도록 할 지어다.”
仍賜允中金帛若干. 於是 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 率兵會唐兵 伐渤海.
잉사윤중금백약간. 어시 대왕명윤중제윤문등사장군 솔병회당병 벌발해.
그리고 윤중에게 약간의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에 대왕이 윤중과 그의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당병과 합세하여 발해를 정벌하게 하였다.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飡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憮然曰 “不圖吾子之明達 至於此也”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윤중서손암 성총민 호습방술. 소장위이찬 입당숙위 간취사 학음양가법 문일우 즉반지이삼우 자술둔갑입성지법 정어지사 사무연왈 부도오자지명달 지어차야 종시이후 불감이제지대지.
윤중의 서손(庶孫)인 암(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방술(方術)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면서 간간히 스승을 찾아 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세 가지를 이해하였다. 저 혼자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지어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놀라서 말했다. “내 아들도 이 정도에 이를 정도로 똑똑하지 않은데”라며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大曆中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太守 復爲執事侍郞浿江鎭頭上.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대력중환국 위사천대박사 역양강한삼주태수 복위집사시랑패강진두상. 소지진심무자 삼무지여 교지이육진병법 인개편지. 상유황충 자서입패강지계 준연폐야 백성우구. 암등산정 분향기천롱풍우대작 황충진사.
대력(大曆)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세 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시랑(執事侍郞),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이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돌보며, 삼무(三務, 봄ㆍ여름ㆍ가을 세 계절의 농사일)의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백성들이 모두 이를 편하게 여겼다. 한번은 메뚜기떼가 발생하여 서쪽으로부터 패강 부근까지 온 들을 뒤덮자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암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 메뚜기떼가 다 죽었다.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本國 其國王 知其賢 欲勒留之. 會 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대력십사년기미 수명빙일본국 기국왕 지기현 욕륵유지. 회 대당사신고학림래 상견심환 왜인인암위대국소지. 고불감유내환.
대력 14년(서기 779) 기미에 그가 왕명을 받고 일본국(日本國)을 예방하였는데 일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지로 머물게 하였다. 그때 마침 대당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니, 왜(倭)인들이 이를 보고 암이 대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夏四月 旋風坌起 自庾信墓 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 聞之恐懼 遣大臣致祭謝過 仍於鷲仙寺 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 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하사월 선풍분기 자유신묘 지시조대왕지릉 진무암명 불변인물. 수릉인문기중약유곡급비탄지성 혜공대왕 문지공구 견대신지제사과 잉어취선사 납전삼십결 이자명복. 시사 유신평려재이국 소영립야.
여름 4월, 회오리바람이 솟아올라 유신의 무덤에서 시조 대왕의 능에 이르기까지 먼지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다. 능지기가 듣자니 그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혜공대왕(惠恭大王)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을 보내 제사를 올려 사과드리고, 이어 취선사(鷲仙寺)에 밭 30결을 바치어 명복을 비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이 절은 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곳이다.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유신현손신라집사랑장청 작행록십권 행어세. 번다양사 고산락지 취기가서자 위지전.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論曰 唐李絳對憲宗曰 “遠邪侫進忠直 與大臣言 敬而信 無使小人參焉 與賢者遊 親而禮 無使不肖預焉 誠哉.” 斯言也 實爲君之要道也. 故書曰 “任賢勿貳 去邪勿疑.”
논왈 당이강대헌종왈 원사망진충직 여대신언 경이신 무사소인참언 여현자유 친이례 무사불초예언 성재 사언야 실위군지요도야 고서왈 임현물이 거사물의.
당의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에게 아뢰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자를 등용하며, 대신과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음 있게 하여 소인배가 참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어진 사람과 교유할 때에는 친하게 지내되 예절을 갖추어 불초한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말이야 말로 참으로 옳은 말이며, 실로 임금이 갖추어야 할 요긴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길 때는 변심하지 말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 委任而不貳. 謀行言聽 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관부신라지대유신야 친근이무간 위임이불이. 모행언청 불사원호불이 가위득육오동몽지길. 고유신득이행기지 여상국협모 합삼토위일가 능이공명종언.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계책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 지략과 의견을 쓰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니 육오동몽(六五童蒙: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육오(六五)는 괘(卦)의 육효(六爻) 중 제오효(第五爻)의 음효을 말한다. 五의 귀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동몽(童蒙), 즉 어린이같이 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것이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합하여 삼국통일의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을 말한다.)의 길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어 상국과 협력하여 삼국을 합쳐서 한 나라로 만들었고, 공명을 얻어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臯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 可也 至於蒭童牧豎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수유을지문덕지지약장보고지의용 미중국지서 즉민멸이무문. 약유신 즉향인칭송지 지금불망.사대부지지 가야 지어추동목수 역능지지 즉기위인야 필유이이어인의.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 같은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꼴 베는 아이나 목동까지도 그를 아는 것은 그 사람됨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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