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 同姓也.
김유신 왕경인야. 십이세조수로 부지하허인야. 이후한건무십팔년임인 등귀봉 망가락구촌 수지기지개국 호왈가야 후개위금관국 기자손상승 지구세손구래[혹운구차휴] 어유신위증조 라인 자위소호금천씨후 고성김 유신비역운 ‘헌원지예 소호지윤’ 즉남가야시조수로여신라 동성야.
김유신(金庾信)은 서라벌 사람이다. 그의 12대조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알수없지만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년)에 귀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아홉 촌을 살펴보았고 마침내 그 땅에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加耶)라 했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다 한다. 그 자손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仇亥)[혹은 구차휴(仇次休)라 한다.]에 이르렀는데, 유신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조무력 위신주도행군총관 상영병획백제왕급기장사인 참수일만여급. 부서현 관지소판대양주도독안무대량주제군사 안유신비운 ‘고소판김소연 부지서현록경명야 혹소연시자야. 의고양존지.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유신의 비문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舒玄)’으로 이믈을 고친 건지 아니면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알 수 없다. 확실치 않아서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赴萬弩郡.
초 서현로견갈문왕입종지자숙흘종지여만명 심열이목도지 불대매작이합. 서현위만노군태수 장여구행. 숙흘종시지여자여현야합 질지수어별제 사인수지. 혹뇌진옥문 수자경란 만명종두이출 수여사현부만노군.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꾀어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합쳤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가 되자 만명과 함께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숙흘종이 그제야 자신의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딸을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홀연히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지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는 틈에, 만명은 틈으로 빠져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舒玄庚辰之夜 夢熒惑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況古之賢人有名庾信 盍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서현경진지야 몽형혹진이성강어기 만명역이신축지야 몽견동자의금갑 승운입당중 심이유신. 이십월이생유신. 시진평왕건복십이냔 수문제개황십오년을묘야 급역정명 위부인왈 “오이경지야길몽 득차아 의이위명 연예불이일월이명 금경여유자상사 진여신성상근 황고지현인유명유신 개이명지.” 수명유신언[만노군 금지진주 초이유신태장지고산 지금위지태령산]
서현은 경진일 밤에 형혹(熒惑, 화성)과 진(鎭,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도 역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여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인 을묘(서기 595)였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부인에게 말하길 “내가 경진(庚辰)일 밤에 좋은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당연히 이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예법에는 날짜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오. 그러하나 이제 생각해보니 경(庚)은 유(庾)와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발음이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의 현인 중에도 유신(庾信)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이를 이름으로 삼지 않겠소?” 하고는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만노군(萬弩郡)은 지금의 진주(鎭州)인데, 애초에 유신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고 한다.]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眞平王建福二十八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 侵軼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中嶽石堀 齋戒告天誓盟曰 “敵國無道 爲豺虎以擾我封埸 略無寧歲 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공년십오세위화랑 시인흡연복종 호용화향도. 진평왕건복이십팔년신미 공연십칠세 견고구려백제말갈 침일국강 강개유평구적지지. 독행입중악석굴 제계고천서맹왈 “적국무도 위시호이요아봉역 략무녕세 복시일개미신 불량재력 지청화한 유천강감 사구어아.”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서기 611) 신미년, 공의 나이 17세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길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의 영역을 침략하니 거의 편안할 해가 없습니다. 저는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려보지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힘을 빌려 주시옵소서.”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答曰 “長者 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憫我精誠 授之方術.”
거사일 홀유일노인 피갈이래왈 “차처다독충맹수 가외지지 귀소년원래독처 하야?” 답왈 “장자 종하허래 존명가득문호.” 노인왈 “오무소주 행지수연 명즉난승야.” 공문지 지비상인 재배진왈 “복신라인야 견국지수 통심질수 고래차 기유소우이 복걸장자민아정성 수지방술.”
4일이 지나자,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한 노인이 와서 물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존함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인연 따라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難勝: 당할자 없다)’이라 하노라.” 공은 이 말을 듣고는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채고, 곧바로 두 번 절하고 다가가서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와서 누구라도 만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老人黙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乃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노인묵연무언 공체루간청불권 지우육칠 노인급언왈 “자우이유병삼국지심 불역장호.” 내수이비법왈 “신물망전 약용지불의 반수기앙.” 언흘이사 행이리허 추이망지 불견 유산상유광 란연약오색언.
하지만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쉬지 않고 간청하니, 노인은 그제야 말하였다. “그대가 어린 나이에도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장하지 아니한가!” 그리고는 곧바로 비법을 주면서 말하였다.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불의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 작별하고 2리쯤 갔는데, 유신이 뒤쫓아가 바라보았지만 노인의 흔적은 없고 다만 산 위에 오색찬란한 빛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建福二十九年 隣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若在中嶽誓辭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角二星 光芒赫然下垂 劒若動搖然.
건복이십구년 린적전박. 공유격장심 독휴보검 입인박산심학지중 소향고천 기축약재중악서사 잉도 천관수광 강령어보검 삼일야 허각이성 광망혁연불수 검약동요연.
건복 29년(서기 612), 이웃나라 적군들이 점점 더 압박해왔다. 공은 더더욱 비장한 마음이 격동되어서 보검을 차고 홀로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중악에서처럼 맹세하고 기도했는데 그때 천관신이 빛을 비추어 보검에 영기를 내려 주었다. 3일째 밤에 허(虛)수와 각(角)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 비추니, 검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建福四十六年 己丑秋八月 王遣伊飡任末里波珍飡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冑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蓋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迺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건복사십육년 을축추팔월 왕견이찬임말리파진찬용춘백룡 소판대인서현등 솔병공고구려낭비성. 여인출병역격지 오인실리 사자중다 중심절뉵 무복투심 유신 시위중당당주 진어부전 탈주이고왈 “아병패배 오평생이충효자기 임전불가불용 개문 진영이구정 제강이강장 오기위강령호 내과마발검 도갱출입적진 참장군 제기수이래. 아군견지 승승분격 참살오천여급 생금일천인. 성중흉구감항 개출항.
건복 46년(서기 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 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 서현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했다.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유신은 이때 중당 당주였는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저는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더니 적장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군이 이를 보고 승세를 타서 떨쳐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베어 죽이고 1천 명을 사로잡았다. 성 안에선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陀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선덕대왕십일년임인 백제퍄대량주 춘추공여자고타소랑 종부품석사언. 춘추한지 욕청고구려병이보백제지원 왕허지. 장행 위유신왈 “오여공동체 위국고굉 금아약이피견해 즉공기무심호.” 유신왈 “공약왕이불환 즉복지마적 필천어려제양왕지정 구불여차 장하면목이견국인호?” 춘추감열여공호서수지 삽혈이맹왈 오계일육순내환 약과차불래 즉무재견지지의 수상병 후유신위압량주군주 춘추여훈신사간 빙고구려 행지대가현 현인두사지사간 증청포삼백보.
선덕대왕(善德大王) 11년(서기 642) 임인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 경남 합천)를 함락시켰다. 그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는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군대를 청해서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추가 길을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 나라의 고굉지신(股肱之臣, 임금이 가장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신하)이 되었소.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소?”하니 유신이 “공께서 만일 가서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춘추가 감격해 기뻐하며, 공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마시고 맹세하여 말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약 이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는 드디어 작별하였다. 그 뒤에 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 군주가 되었다. 춘추가 훈신사간(訓信沙干)과 함께 고구려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두사지사간(豆斯支沙干)이 푸른 베 3백 보(步)를 주었다.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蓋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기입피경 여왕견태대대로개금관지 연향유가. 혹고여왕왈 “신라사자 비용인야 금래 재욕관아형세야 왕기도지 비무후환.” 왕욕횡문 인기난대이욕지 위왈 “마목현여죽령 본아국지 약불아환 즉부득귀.” 춘추답왈 “국가토지 비신자소전 신불감문명.”
고구려 땅 안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 연개소문)을 보내 머물 곳을 정해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런데 어떤 자가 고구려왕에게 아뢰었다.
“신라 사자(使者)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이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대책을 마련하셔서 후환이 없게 하옵소서.” 왕은 춘추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여 그를 욕보이고자 하여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일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니 춘추의 답은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니, 신은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 했다.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왕노수지 욕참미과 춘추이청포삼백보 밀증왕지총신선도해. 도해이찬구래 상음주감 희언왈 ”자역상문귀토지설호? 석 동해용녀병심 의언 ‘득토간합약 즉가요야.’ 연해중무토 불나지하 유일귀백룡왕언 ‘오능득지 ’수등육견토언 ‘해중유일도 청천백석 무림가과 한서불능도 응준불능침이약득지 가이안거무환.’ 인부토배상 유행이삼리허.
왕이 분노하여 춘추를 가두어놓고 죽이려 하였지만 미처 실행하지 않았을 때, 춘추가 선물로 받았던 푸른 베 3백 보를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몰래 주었다. 그러자 도해가 주안상을 차려 와 함께 술을 마시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도해가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그대는 예전에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시오?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사가 토끼의 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소 그러나 바다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지요 그때 마침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제가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오. 드디어 거북이는 육지로 올라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속에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맑은 샘과 흰 돌이 있고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실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사나운 날짐승도 침범할 수 없다. 네가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아무 근심걱정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지요. 그리하여 거북이는 토끼를 등에 업고 이삼리쯤 헤엄쳐 갔다오.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黙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귀고위토왈 금용녀피병 수토간위약 고불탄노 부이래이. 토왈 의 오신명지후 능출오장 세이납지 일자소각심번 수행간심세지 잠치암석지저 문이감언경래 간상재피 하불외귀취간 즉여득소구 오수무간상황 이불양상의제. 귀신지이환 재삼환. 도탈입초중 위귀왈 우재여야 이유무간이생자호? 귀민묵이퇴. 춘추문기언 유기의.
거북이는 토끼를 돌아보며 ‘지금 용왕님의 따님이 병이 들었는데, 반드시 토끼 간으로 약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를 마다않고 너를 업고 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토끼가 이를 듣고는, ‘아차! 나는 천지신명의 후예인지라 오장(五藏)을 꺼내어 씻어서 다시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해서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다. 그런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오는 바람에 간이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 어찌 돌아가 간을 가져 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려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더라도 살 수 있으니, 어찌 둘 다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지요. 거북이는 그 말을 믿고 다시 돌아갔는데, 언덕에 오르자마자 토끼는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어찌 간이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더냐?’ 하였습니다. 거북이는 민망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춘추는 이 말을 듣고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 令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이서어왕왈 “이령 본대국지 영신귀국 청오왕환지 위여불신 유여교일.” 왕내열언.
그는 고구려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할 수 있게 해주시면 저희 왕에게 청하여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고구려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춘추입고구려 과육순미환 유신간득국내용사삼천인 상어왈 “오문견위치명 임난망신자 역사지지야 부일인치사당백인 백인치사당천인 천인지사당만인 즉가이횡행천하 금국지현상 피타국지구집 기가와불범난호?”
춘추가 고구려에 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천 명을 뽑아 놓고 크게 외쳤다. “내 듣건대, 위태로움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해서는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烈士)의 뜻이라고 했다. 무릇 한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백 사람을 대적할 수 있고, 백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천 사람을 대적할 수 있고, 천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만 사람을 대적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천하를 우리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잡혀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어려운 일을 마다하겠는가?”
於是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以定行期. 時 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어시중인왈 수출만사일생지중 감불종장군지영호. 수청왕이정행기. 시 고구려첩자부도덕창 사고어왕 왕전문춘추맹사 우문첩자지언 불감복유 후례이귀지.
그러자 용사들이 모두 말하였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나아갈지언정, 어찌 감히 장군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드디어 선덕왕에게 출정할 날짜를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고구려 첩자인 중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고구려왕에게 보고하였다. 고구려왕은 이전에 춘추가 맹세하는 말을 들었고, 또 첩자의 말을 들은지라 더는 붙잡아둘 수 없어서 후한 예로 대우하여 춘추를 돌려보냈다.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此與本記 眞平王十二年[善德王十一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급출경 위송자왈 오욕석감어백제 고래청사 대왕불어지 이반구토지 차비신소득사 향여대왕서자 도환사이[차여본기 진평왕십이년[선덕왕십일년]소서 일사이소이 이개고기소전 고양존지]
춘추는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전송하던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고 싶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와서 군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번에 대왕에게 글을 보낸 것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내용은 본기의 진평왕 12년[사실은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기록과 동일한 일인데 약간 다르다. 그러나 모두 옛 기록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므로 다 남겨둔다.]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乙巳正月歸 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 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出 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不憚勞遄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유신위압량주군주 십삼년위소판. 추구월 왕명위상장군 사령병벌백제가혜성성열성동화성등칠성 대극지. 인개가혜지진 을사정월귀 미견왕 대인급보 백제대군래 공벌매리포성. 왕우배유신위상주장군 영거지. 유신문명즉가 불견처자 역격백제군주지 참수이천급. 삼월 환명왕궁 미귀가 우급고 백제출병 준우기국계 장대거병침아. 왕복고유신왈 “청공불탄노천행 급기미지비지.” 유신우불입가 연군선병 향서행.
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있다가 선덕왕 13년(서기 644)에 소판(蘇判)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개의 성을 치게 하니, 유신이 크게 이겼다. 이로 인하여 가혜(加兮)의 나루를 개설하였다. 을사년(서기 645) 정월에 돌아와 미처 왕을 뵈옵지도 못하였을 때,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관리)이 백제의 대군사가 매리포성(買利浦城, 경남 거창)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하였다. 왕은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듣자 즉시 말을 몰았다. 처자도 만나지 않고 백제군을 맞받아쳐서 쫓아버리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군이 국경선에 주둔하여 크게 군사를 내어 우리를 침략할 것 같다는 급보가 있었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였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오기 전에 방비하길 바라오.” 유신은 또다시 집에 들르지 못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于時 其家人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五十步許 駐馬 令取漿水於宅 啜之曰 “吾家之水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猶如此 我輩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埸 百濟人望我兵衛 不敢迫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우시 기가인개출문외대래 유신과문 불고이행 지오십보허 주마 영취장수어택 철지왈 “오가지수 상유구미” 어시 군중개운 “대장군유여차 아배이이이별골육위한호?” 급지강역 백제인망아병위 불감박내퇴. 대왕문지심희 가작상.
이때에 그 집안 사람들이 다 문 밖에 나와 기다렸는데, 유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오십 보쯤 지나 말을 세우고 집의 장(漿)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시고는 말하였다. “우리 집의 물맛이 예전 그대로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니 백제인들이 우리의 진영을 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이내 물러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벼슬과 상을 더해 주었다.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 士卒呼吼聲振地.
십육년정미 시선덕왕말년 진덕왕원년야. 대신비담염종 위여주불능선리 거병욕폐지 왕자내어지 비담등둔어명활성 왕사영어월성 공수십일불해. 병야대성낙어월성 비담증위사졸왈 “오문낙성지하 필유유혈 차태여주패적지조야.” 사졸호후성진지.
16년 정미(서기 647)는 선덕왕 말년이요, 진덕왕(眞德王) 원년이다. 대신(大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병사를 일으켜 폐위하려 하였으나 선덕왕은 안에서 이를 막아내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군영을 두어 공방을 열흘간 하였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월성에 별이 떨어지자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말하였다. “별이 떨어진 곳에는 꼭 피를 흘리는 일이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반드시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다.” 병졸들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抱火 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曰 “天道則陽剛而陰柔 人道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
대왕문지 공구실차 유신견왕왈 “길흉무상 유인소소. 고주이적작망 노이획린쇠 고종이치구흥 장공이용투창 고지덕승어요 즉성진변이 부족외야 청왕물우.” 내조우인포화 재어풍연이양지 약상천연. 익일 사인전언어로왈 작야 낙성환상 사적군의언. 우형백마 제어낙성지지 축왈 “천도즉양강이음유 인도즉군존이신비 구혹역지 즉위대란 금비담등이신이모군 자하이범상 차소위난신적자 인신고동질 천지소불욕 금천약무의어차 이반견성괴어왕성 차신지소의혹이불유자야 유천지위 종인지용 선선오악 무작신수.” 어시 독제장졸분격지 비담등패주 추참지 이구족.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하니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하고 흉한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1)가 모여 들었지만 주(紂)가 망하였고, 기린2)을 얻었어도 노(魯)나라가 쇠퇴했으며, 꿩3)의 울음으로 인해 고종(高宗)이 흥기했고, 용4)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鄭公)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그리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씨를 넣어 연에 실어 날렸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길거리에 말을 퍼뜨려 적군들이 의심하게 하였다. 또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며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天道)에는 양(陽)이 굳세고 음(陰)이 부드러우며, 인도(人道)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바뀌는 경우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 아래에서 위를 범하려 합니다.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령이 모두 미워하는 바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 일에 무심하시어 도리어 왕성에 별의 변괴를 보인 것이라면, 신은 의혹됨이 있어 깨우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 백성들의 바람을 좇아 선(善)을 선하게 여기고 악(惡)을 미워하시어 신령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장졸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들이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니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1) 적작(赤雀)은 봉황(鳳凰)으로, 주(周) 문왕(文王)이 그것을 얻었기 때문에 은(殷) 주왕(紂王)이 망하고 주가 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기린(麒麟)은 인수(仁獸)라 하여 성인이 출현했을 때에만 사람의 눈에 띈다고 하는데, 노(魯) 애공(哀公)이 사냥에서 기린을 쏘아 잡아 이로부터 주(周)가 쇠하였다는 것이다.
3) 은(殷) 고종(高宗)이 제사를 지낼 때 꿩이 울어 주변에서 불길한 징조라고 하였는데, 현신(賢臣) 조기(祖己)가 『상서(尙書)』의 구절을 들어 그릇됨을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4) 춘추시대 정(鄭)나라에 용이 성문 밖에서 싸우자 수신(水神)이 노한 것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신하 자산(子産)이 이를 말려 그만두게 하였고 이후로 정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것이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동시월 백제병래 위무산감물동잠등삼성. 왕견유신 솔보기일만거지. 고전기갈 유신위비녕자왈 “금일지사금의 비자 유능격중심호.” 비녕자배왈 “감불유명지종 수부적 자여진급가노합절수지 돌검극 역전사지 군사망지 감려쟁진 대패적병 참수삼천여급.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와서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등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기운이 빠지자 유신은 비녕자(丕寧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들자, 비녕자의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도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감동해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眞德王大和元年戊申 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隣患.
진덕왕대화원년갑술 춘추이부득청어고구려 수입당걸사. 태종황제왈 “문이국유신지명 기위인야여하 대왈 유신수소유재지 약부적천위 이역제린환.”
진덕왕 대화(大和) 원년(서기 648) 무신, 춘추가 고구려에서 군사를 얻지 못하여 마침내 당(唐)나라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황제(太宗皇帝)가 물었다. “그대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다.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춘추가 대답했다. “유신이 비록 자그마한 재주와 지혜가 있다고 하나, 천자의 위력을 빌리지 않고 어찌 주변의 우환을 쉽사리 제압하겠습니까?”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勑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慵惰如之何.”
제왈 “성군자지국야.” 내조허 칙장군소정방 이사이십만 조정백제 시유신위압량주군주 약무의어군사 음주작악 누경순월 주인이유신위용장 기방지왈 “중인안거일구 역유여 가이일전 이장군용타여지하.”
황제가 “참으로 군자의 나라다.”라고 하고, 조서를 내려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주둔군 사령관)로 있었는데 군무에는 뜻이 없는 듯이 음주와 풍악으로 수개월을 보냈다. 주민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로 여기고 비방하기를 “백성들이 편안하게 있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번 싸워 볼 만한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同心同德 今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유신문지 지민가용 고대왕왈 “금관민심 가이유사 청벌백제 이보대량주지역.” 왕왈 “이소촉재 위장내하.” 대왈 “병지승부 부재대소 고기인심하여이. 고주유억조인 이심이덕 불여주가십란동심동덕. 금오인일의 가여동사생 치백제지부족외야.”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을 부릴 때가 되었다 여기고 대왕께 고하였다. “지금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할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을 보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왕이 말하였다. “작은 힘으로 큰 세력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덕이 떠나버려 주(周)의 열 명5)의 신하가 한 마음 한 생각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왕내허지 수간련주병부적 지대량성외 백제역거지 양배불승 지옥문곡. 백제경지 대솔중래. 복발격기전후 대패지 획백제장군팔인 참획일천급.
마침내 왕이 허락하여 유신은 드디어 고을의 병사를 뽑아 조련하여 적을 향해 대량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반격하여 대항하였다. 거짓으로 패하여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달아나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백제는 이를 얕잡아보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왔다. 그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 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可乎?”
어시 사고백제장군왈 “아군주품석급처김씨지골 매어이국옥중 금이비장팔인 견착어아포부청명 아이호표수구산지의 미인살지 금이송사이인지골 이생팔인가호?”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백제의 장군에게 말했다. “우리 군주 품석(品釋)과 그 아내 김씨(金氏)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지금 너희들의 비장 8명이 나에게 붙잡혀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다. 나는 여우와 표범이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두는 뜻을 생각하여 그들을 차마 죽이지 않았다. 그러하니 이제 너희는 죽은 두 사람의 유해를 보내어 여덟 명의 산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櫝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遂乘勝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백제중상[일작충상]좌평언어왕왈 “라인해골 유지무익 가이송지 약라인실신 불환아팔인 즉곡재피 직재아 하충지유 내굴품부처지골 독이송지 경신일 일낙엽 무림무소손 일진집 대산무소증 허팔인생환 수승승입백제지경 공발옥성등십이성 참수이만여급 생획구천인.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혹은 충상(忠常)이라 한다.]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는 것이요, 우리는 옳은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내 품석 부부의 유골을 파서 관에 넣어 보냈다. “잎새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숲이 손실되지 않으며, 티끌 하나가 더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여덟 사람을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論功 增秩伊飡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其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논공 증질이찬 위상주행군대총관. 우입적경 도진예등구성 참수구천여급 노득육백인. 춘추입당청득병이십만애 견유신왈 “사생유명 고득생환 복여공상견 하행여언” 유신대왈 하신장국위령재여벡제대전 발성이십 참획삼만여인 우사품석공급기부인지골 득반향리 차개천행소치야 오하역언.“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으로 벼슬을 높여주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進禮) 등의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생포하였다. 춘추가 당에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유신을 만나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천명에 달려서인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소.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엄을 빌어, 두 번을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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