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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 始祖溫祚王


백제 건국 설화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백제시조온조왕 기부 추모 혹운주몽 자북부여도난 지졸본부여 부여왕무자 지유삼여자 견주몽 지비상인 이제이녀처지 미기 부여왕훙 주몽사위 생이자 장왈비류 차왈온조(혹운 주몽 도졸본 취월군녀 생이자.)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얼마 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越郡) 출신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이는 후대의 삽입으로 보인다. 월군이란 지명이나 인명이 불상)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굽주몽재북부여소생자 래위태자 비류온조 공위태자소불용 수여오간마려등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비류욕거어해빈 십신간왈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기천험지리 난득지세 작도어사 불역의호 비류불청 귀미추홀이거지.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물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물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가서 살았다.

 

이 부분 역시 후대 加筆로 보인다. 바로 다음 문장을 비교하면...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온조도하남위례성 이십신위보익 국호십제 시전한성제홍가삼년야 비류이미추 토습수함 부득안거 귀견위례 도읍정정 인민안태 수참회이사 기신개어위례 후이래시백성악종 개호백제 기세계여고구려 동출부여 소이부여위씨.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기원전 18)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라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일운 시조비류왕 기부우태 북부여왕해부루서손 모소서노 졸본인연타발지녀 시귀우우태 생자이인 장왈비류 차왈온조 우태사 과거우졸본 후주몽불용어부여 이전한건소이년. 춘이월 남분지졸본 입도호고구려 취소소노위비 기어개기창업 파유내조 고주몽총첩특후 대비류등여기자 급주몽재부여생소예씨자유류래 입지위태자 이지사위언 어시 비류위제온조왈 시 대왕피부여지란 도귀지차 아모씨경가재 조성방업 이근노다의 급대왕염세 국가속어유류 오등사재차 울울여우체 불여봉모씨 남유복지 별립국도.”

 

(일설에는, 시조는 비류왕인데,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기원전 37)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나라를 세우는 데 소서노의 내조가 많았기 때문에 주몽이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비류와 온조를 자기의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래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수여제솔당류 도패대이수 지미추홀이거지 북사급수서 개운 동명지후유 구태 독어인신 초립국우대방고지 한요동태수공손도이여처지 수위동이강국 미지숙시)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사(北史)및 수서(隋書) 모두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 하오월 입동명왕묘.

 

원년(기원전 18) 여름 5,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웠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이년 춘정월 왕위군신왈 말갈연아북변 기인영이다사 의선병적곡 위거수지계.” 삼월 왕이족부을음 유지식담력 배위우보 위이병마지사.

 

2(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길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 임금은 족부(族父: 부족장) 을음(乙音)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하여 우보(右輔)의 직을 제수하고 병사의 일을 맡겼다.

 

여기보면 말갈이 북쪽경계와 맞닿아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반도 사관으로 말이 되나?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삼년 추구월 말갈침북경 왕수경병 급격대패지 적생롼자 십일이. 동시월 뢰 도리화.

 

3(기원전 16) 가을 9,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긴급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살아서 돌아간 적병은 열에 한둘이었다.

겨울 10, 우레가 치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사년 춘하 한 기 역. 추구월 견사낙랑수호.

 

4(기원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기근이 들었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오년 동시월 순무북변 렵획신록.

 

5(기원전 14) 겨울 10, 북쪽 국경을 두루 돌아보고 백성을 위로하고, 사냥으로 신록(神鹿)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 辛未晦 日有食之.

육년 추칠월 신미회 일유식지.

 

6(기원전 13) 가을 7,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팔년 춘이월 말갈적병삼천래위위례성 왕폐성문불출 경순 적량진이귀 왕간예졸 추급대부현일전극지 살노오백여인. 추칠월 축마수성 수병산책 낙랑태수사고왈 경자 칭문결호 의동일가 금ㅊ칩아강 조립성책 옥자기유잠식지모호 약불유구호 휴성파책 즉무소시의 구혹불연 청일전이결승부. 왕보왈 설험수국 고금상도 이감이차 유유어화호 의약집사지소불의야 약집사시강출사 즉소국역유이대지이 유시 여낙랑실화.

8(기원전 11) 2,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 卽退.

십년 추구월 왕출렵 획신록 이송마한. 동시월 말갈구북경 왕견병이백 거전어곤미천상 아군패속 의청목산자보. 왕친수정기일백 출봉현 구지 적견지 즉퇴.

 

10(기원전 9) 가을 9, 임금이 사냥을 나가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임금이 병사 2백 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근처에서 싸우게 했으나, 우리 병사가 패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거하여 지키고 있었다. 임금이 친히 정예 기병 1백 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가 구원하니, 적병이 보고 곧 물러갔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십일년 하사월 낙랑사말갈습파병산책 살략일백여인. 추칠월 설독산구천양책 이색낙랑지로.

 

11(기원전 8) 여름 4,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말갈과 낙랑 두 집단과 접경한 지역이 반도내에 있나?????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십삼년 춘이월 왕도노구화위남. 오호입성. 왕모훙 년육십일세. 하오월 왕위신하왈 국가동유낙랑 북유말갈 침일강경 소유녕일 황금요상누견 국모기양 세불자안 필장천국. 여장출순 솬한수지남 토양고유 의도어피 이도구안지계. 추칠월 취한산하 입책 이위례성민호. 팔월 견사마한 고천도 수화정강장 북지패하 남한웅천 서궁대해 동극주양. 구월 입성궐.

 

13(기원전 6) 2,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 성과 궁궐을 쌓았다.

 

*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으면 발해만 바다속이 백제????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십사년 춘정월 천도. 이월 왕순무부락 무권농사. 추칠월 축성한강서북 분한성민.

 

14(기원전 5)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 임금이 부락을 순시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 한강(漢江)의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십오년 춘정월 작신궁실 검이불누 화이불치.

 

15(기원전 4) 봄 정월,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십칠년 춘 낙랑내침 분위예성. 하사월 입조이사국모.

 

17(기원전 2) ,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여름 4,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 동쪽 낙랑이 위례성을 쳐들어왔다면????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십팔년 동시월 말갈엄지 왕수병 역전어칠중하 노획추장소모 송마한 기여적진갱지. 십일월 왕욕습낙랑우두산성 지구곳 우대설 내환.

 

18(기원전 1) 겨울 10,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이십년 춘이월 왕설대단 친사천지 이조오래상.

 

20(서기 2) 2, 임금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몸소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더니 기이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이십이년 추팔월 축석두고목이성. 구월 왕수기병일천 엽부현동 우말갈적 일전파지 노획생구분사장사.

 

22(서기 4) 가을 8, 석두(石頭)와 고목(高木) 2개의 성을 쌓았다.

9, 임금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났다. 한 번 싸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이십사년 추칠월 왕작웅천책 마한왕견사책양왈 왕초도하 무소용족 오할동북일백리지지 안지기대왕불위불후 의사유이보지. 금이국완민취 위막여아적 대설성지 침범아봉강 기여의하.” 왕참수괴기책.

 

24(서기 6) 가을 7, 임금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니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여 말하였다. “왕이 처음에 강을 건너왔을 때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내가 동북의 1백 리 땅을 내주어 편하게 살게 하였다. 이는 왕을 후하게 대접한 것이니, 왕은 마땅히 보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을 크게 쌓고 우리 땅을 침범하려 하는데,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부끄러워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 마한 동북쪽이 백제.... 마한은 진도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이십오년 춘이월 왕궁정수폭일 한성인가마생우 일수이신 일자왈 정수폭일자 대왕발흥지조야 우일수이신자 대왕병린국지응야.” 왕문지희 수유병단진마지심.

 

25(서기 7) 2,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임금이 듣고 기뻐하며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이십육년 추칠월 왕왈 마한점약 상하이심 기세불능구 당위타소병 즉순망치한 뢰불가급 불여선입이취지 이면후간.” 동시월 왕출사 양언전렵 잠습마한 수병기국읍 유원산면현이성고수불하.

 

26(서기 8) 가을 7,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이십칠년 하사월 이성항 이기민어한산지북 마한수멸. 추칠월 축대두산성.

 

27(서기 9) 여름 4,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이십팔년 춘이월 입원자다루위태자 위이배외병사. 하사월 운상해맥.

 

28(서기 10) 2,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무를 맡겼다.

여름 4, 서리가 내려 보리를 상하게 하였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 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삼십일년 춘정월 분국내민호 위남북부. 하사월 박. 오월 지진. 유월 우진.

 

31(서기 13) 봄 정월, 나라의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다.

여름 4, 우박이 떨어졌다.

5, 지진이 났다.

6, 또 지진이 났다.

 

三十三年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삼십삼년 춘하대한 민기상식 도적대기 왕무안지. 추팔월 가치동서이부,

 

33(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도적이 크게 일어나니 임금이 어루만지어 안정시켰다.

가을 8, 동서 2부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삼십사년 동시월 마한구장주근 거우곡성반. 왕궁수병오천 토지 주근자경 요참기시 병주기처자.

 

34(서기 16) 겨울 10,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죽였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삼십육년 추칠월 축탕정성 분대구성읍호 거지. 팔월 수집원산금현이성 축고사부리성.

 

36(서기 18) 가을 7,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 원산과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삼십칠년 춘삼월 박대여계자 조작우자사. 하사월 한 지유월내우 한수동북부락기황 망인고구려자일천여호 패대지간 공무거인.

 

37(서기 19) 3,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주민이 없게 되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天地.

삼십팔년 춘이월 왕순무 동지주양 북지패하 오순이반. 삼월 발사권농상 기이불급지사요민자개제지. 동시월 왕책대단 사천지.

 

38(서기 20) 2, 임금이 두루 돌아보고 백성을 위로하였다. 동쪽으로는 주양(走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를 거쳐 50일 만에 돌아왔다.

3, 사자를 보내어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모두 금지하였다.

겨울 10, 임금이 큰 제단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사십년 추구월 말갈래공술천성. 동십일월 우습부현성 살략백여인 왕명경기이백 거격지.

 

40(서기 22) 가을 9,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1, 말갈이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기병 2백 명에게 막아서 물리치도록 시켰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사십일년 춘정월 우보을음졸 배북부해루위우보. 해루 본부여인야 신식연오 년과칠십 려력불건 고용지. 이월 발한수동북재부락인년십오세이상 수영위례성.

 

41(서기 23)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죽었다.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지식이 많고 나이는 70세가 넘었는데도 기력이 변함이 없으므로 등용하였다.

2,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에서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 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사십삼년 추팔월 왕전아산지원오일. 구월 홍안백여집왕궁 일자왈 홍안 민지상야 장유원인래투자호.” 동시월 남옥저구파해등이십여가 지부양남관 왕납지 안치한산지서.

 

43(서기 25) 가을 8, 임금이 아산(牙山)의 언덕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일자(日者,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말하였다.“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하니 장차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귀순해오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겨울 10,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五年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사십오년 춘하대한 초목초고. 동시월 지진 경도인옥.

 

45(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초목이 말라 죽었다.

겨울 10,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무너졌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사십육년 춘이월 왕훙.

 

46(서기 28) 2, 임금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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