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穀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埸 使彼疲於奔命 釋耒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淥之北 可不戰而取矣.”
육년 태종장복행사 조의이위 “고구려의산위성 불가졸발 전대가친정 국인부득경종 소극지성 실수기곡 계이조한 민태반핍식 금약구견편사 경질요기강장 사피피어분명 석뢰입보 수년지간 천리소조 즉인심자리 압록지북 가부전이취의.”
6년(서기 647), 당나라의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고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 이전에 황제가 직접 원정을 나갔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대부분의 백성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만약 적은 수의 군대를 자주 보내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이 방어하는데 지치게 만들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 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朗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제종지 이좌무위대장군우진달 위청구도행군대총관 우무위장군이해안부지 발병만여인 승루강자래주 범해이입. 우이태자담사이세적 위요동도행군대총관 우무위장군손이랑등부지 장병삼천인 인영주도독부병 자신성도입. 양군 개선습수선전자 배지. 이세적군기도요 역남소등수성 개배성거번 세적격파지 분기라곽이환.
황제가 이 말을 따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보좌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병사를 내어 누선(樓舡)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해로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한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朗) 등을 보좌관으로 삼아, 3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의 병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세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남소(南蘇) 등의 몇 개의 성을 지나갔는데, 그 성이 모두 성곽을 등지고 싸웠다. 이세적이 외부 성곽들을 불사르고 돌아갔다.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二千級. 太宗勑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艘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추칠월 우진달이해안입아경 범백여전. 공석성발지 진지적리성하. 아병만여인출전 이해안격극지 아군사자이천급. 태종칙송주자사왕피리등 발강남십이주공인 조개강수백수 욕이벌아. 동십이월 왕사등이자막리지임무 입사죄 제허지.
가을 7월, 우진달과 이해안 등이 우리의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石城)을 공격해 빼앗고, 적리성(積利城)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1만여 명의 우리 병사가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사망한 우리의 군사가 2천 명이었다. 태종은 송주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수백 척의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겨울 12월, 임금이 둘째 아들 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에게 당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 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칠년 춘정월 견사입당조공. 재조우무위대장군설만철 위청구도행군대총관 우위장순배행방부지 장병삼만여인 급루강전함 자래주 범해래격.
7년(서기 648)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 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舟艦 爲水轉 隋末劒南 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하사월 오호진장고신감 장병부해래격. 우아보기오천 전어역산 파지. 기야 아군만여인 습신감강 신감복발 내패. 제위아곤폐 의이명년발삼십만중 일거멸지. 혹이위“대군동정 수비경세지양 비축승소능제 의구주함 위수전 수말검남 독무구도 속자요동지역 검남복불예급 기백성부서의사지조주함.” 제종지.
여름 4월, 오호진(烏胡鎭)의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병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과 기병 5천 명과 역산(易山)에서 맞부딪쳐서 우리를 쳐부수었다. 그날 밤에 1만여 명의 우리 군대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고신감의 복병이 출동하는 바람에 패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해졌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부쳤다.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기를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므로,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劒南)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에게 선박을 만들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따랐다.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추칠월 왕도여산자 일신양두 태종견좌령좌우부장사강위어검남도 벌목소주함 대자혹장백척기광반지 별견사행수고 자무협 저강양 취래주.
가을 7월, 서울의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당 태종이 좌령좌우부장사(左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이 배들을 수로를 통하여 무협(巫峽)에서 강주(江州)와 양주(楊州)를 거쳐 내주로 이동하게 하였다.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淥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淥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 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
구월 군장도하서주 군랑향서행 삼일부절. 태종견장군설만철등래벌. 도해입압록 지박작성남사십리 지영. 박작성주소부손 수보기만여 거지. 만철견우위장군배행방 영보졸급제군승지 아병궤. 행방등진병위지 박작성인산설험 저압록수이위고 공지불발. 아장고문 솔오골안지제성병삼만여인 래원. 분치양진 만찰분군이당지 아군패궤 제우조래주자사이도유 전양급기계 거어오호도장욕대거.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도 떼를 지어 서쪽으로 향해 갔는데 사흘 동안이나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에게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들어와서 박작성(泊灼城)의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성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에게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하게 하자 우리의 병사가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이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우리의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과 안지성(安地城) 등 여러 성에서 온 병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설만철이 군대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의 군대가 패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팔년 하사월 당태종붕 유조파요동지역.
8년(서기 649) 여름 4월,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태종의 유언으로 요동 정벌이 중지되었다.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논왈 초 태종유사어요동야 간자비일 우자안시선군지후 자이불능성공 심회지. 탄왈 “약사위징재 불사아유차행야 급기장복벌야.” 사공방현령병중상표 간이위 ‘노자왈 지족불욕 지지불태 폐하위명공덕 기운족의. 척지개강 역가지의.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만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安市城)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할 때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간하기를,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 만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 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차폐하매결이중수 필영삼복오진 진소선 지음악자. 중인명야. 금구무죄지사졸 위지봉인지하 사간뇌지 독부족민호 향사고구려위실신절 주지가야 침요백성 멸지가야 타일능위중군환 제지가야.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반드시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고, 우리의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뒷날에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耻 外爲新羅報讎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금무차삼조 이좌번중국 내위전대설치 외위신라보수 이비소재자소 소손자대호. 원폐하허고구려자신 분능파지강 파응모지중. 자연화이경뢰 원소이안 양공장사지언 순순약차 이제불종 사욕구허동역이자쾌 사이후이.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작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파도를 헤쳐 나갈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화에는 경사가 깃들고, 한인과 이족이 신뢰를 회복할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梁公)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욕심내다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史論曰 好大喜功 勒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曰 駐蹕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 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
사론왈 호대희공 늑병어원자 비차지위호? 유공권소설왈 주필지역 고구려여말갈합군 방사십리 태종망지 유구색 우왈 ‘육군위고구려소승 채장불진 후자고영공지휘 흑기히위 제대공 수종어자탈 이위구여피 이신구서 급사마공통감 불언자 이비위국휘지자호
사가들이 논한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네. 영공(英公)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 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秋七月 霜雹害穀 民饑.
구년 하유월 반룡사진덕화상 이국가봉도 불신불법 남이완산고대산. 추칠월 상박해곡 민기.
9년(서기 650) 여름 6월,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국가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져서 곡식을 해쳤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십일년 춘정월 견사입당조공.
11년(서기 65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 曰 “汝君臣 奢侈無度 敗亡無日矣.”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 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십삼년 하사월 인혹언 어마영상 현신인 왈 “여군신 사치무도 패망무일의.” 동시월 왕견장안고출사 급말갈병 격거란 송막도독이굴가어지 대해아군어신성.
13년(서기 654)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령(馬嶺)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가 끝이 없으므로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장수 안고(安固)에게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三月 高宗遣營州都督名振 左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夏五月 程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端水.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십사년 춘정월 선시 아여백제말갈 침신라북경 취삼십삼성 신라왕김춘추 견사어당구원. 삼월 고종견영주도독명진 좌위중랑장소정방 장병래격. 하오월 정명진등 도요수 오인견기병소 개문도귀단수. 역전 명진등분격 대극지 살획천여인 분기외곽급촌락이귀.
14년(서기 655) 봄 정월, 이보다 앞서서 우리가 백제 및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의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 당나라 고종(高宗)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오자, 우리는 상대방 병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가 맞받아 싸웠다. 정명진 등은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1천여 명의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곽 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冬十二月 遣使入唐 賀冊皇太子.
십오년 하오월 왕도우철. 동십이월 견사입당 가책황태자.
15년(서기 656)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십칠년 하유월 당영주도독겸동이고호종명잔우영군중랑장설인귀 장병래공 불능극.
17년(서기 658) 여름 6월, 당나라의 영주도독겸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십팔년 추구월 구호일시입성식인 초지불회. 동십일월 당우령군중랑장설인귀등 여아장온사문 전어횡산 파지.
18년(서기 659)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이들을 포획하려다 놓치고 말았다.
겨울 11월, 당나라의 우령군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의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웠는데, 우리의 군사를 쳐부수었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십구년 추구월 평양하수혈색 범삼일. 동십일월 당우효위대장군계필하력 위패강도행군대총관좌무위대장군소정방 위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장군유백영 위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자사덩명진 위누방도총관 장병분도래격.
19년(서기 660)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나라에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臚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이십년 춘정월 당모하남북회남육십칠주병 득사만천여인 지평양누방행영 우이홍려경소사업위부여도행군총관 수회흘등제부병 지평양.
20년(서기 661) 봄 정월, 당나라가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 등의 67개 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4만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鏤方)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 위구르) 등 여러 부(部)의 병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並進 帝欲自將大軍.
하사월 이임아상 위패강도행군총관 계필하력 위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 위평양도행군총관 여고사업급제로병범삼십오군 수륙분도병진 제욕자장대군.
여름 4월,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浿江道行軍摠管)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소사업과 모든 오랑캐의 군사를 합해 모두 35개 군단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때 황제가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고 하였다.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 帝乃止.
울주자사이군구입언 “고구려소국 하지경중국사지유 여고구려기명 칠발병이수 소발즉위부진 다발즉인부족 이천하피어전수 신위 정지미여물정 멸지미여물멸.” 약회무후간 제내지.
울주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하여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병사를 출동시켜 그곳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때 병사의 수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요,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의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고, 이때에 또한 무후(武后)도 말렸으므로 황제가 중지하였다.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하오월 왕견장군뇌음신 영말갈중 위신라북한산성 협순불해 신라향도절 성중위구 물유대성낙어아영 우뇌우진격 뇌음신등 의해인퇴.
여름 5월, 임금이 뇌음신(惱音信) 장군에게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게 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으니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또한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물러났다.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 守鴨綠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渡水 鼓噪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추팔월 소정방파아군어패강 탈마읍산 수위평양성. 구월 개소문견지자남생 이정병수만 수압록제군부득도 계필하력지 치빙대합. 하력인중승빙도수 고조이진 아군궤분. 하력추수십리 살삼만인 여중실항 남생근이신면. 회 유조반사 내환.
가을 8월, 소정방이 패강(浿江)에서 우리의 군사를 물리쳐서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에게 수만 명의 정병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하게 하니, 당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오니 우리의 군대가 싸움에 져서 달아났다. 계필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3만 명을 죽였다. 남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신의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때 마침 당나라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唐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이십일년 춘정월 당좌료위장군백주자사옥저도총관방효태 여개소문전어사수지상. 거군몰 여기자십삼인 개전사. 소정방위평양 회대설 해이퇴. 범전후지행 개무대공이퇴.
21년(서기 662)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백주자사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에서 싸웠다. 그의 군대가 전멸하였고, 방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처럼 당나라는 앞뒤의 전쟁에서 매번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 云男福)入唐 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初 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男産 留知後事.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 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 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
이십오년 왕견태자복남(신당서 운남복) 시사태산. 개소문사 장자남생대위막리지. 초 지국정 출순제성 사기제남건남산 유지후사. 혹위이제왈 “남생오이제지핍 의욕제지 불여선위계.” 이제초미지신 우유고남생자 왈 “이제공형환탈기권 욕거형불납.”
25년(서기 666), 임금이 태자 복남(福男)[『신당서(新唐書)』에는 남복(男福)이라 하였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泰山)의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할 때, 그의 두 아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조정에 남아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당신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남생잠견소친 왕평양사지. 이제수엄득지 내이왕명소남생. 남생불감귀. 남건자위막리지 발병토지. 남생주거국내성 사기자헌성 지당구애.
남생은 남몰래 자신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머무르면서,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 兼知內外兵馬事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菟郡公. 冬十二月 高宗以李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郝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並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並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並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 給軍用.
유월 고종명좌효위대장군계필하력 수병응접지 남생탈신분당. 추팔월 왕이남건위막리지 겨지내외병마사. 구월 제조남생 수특진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 봉현토군공. 동십이월 고종이이적 위요동도행군대총관겸안무대사 이사열소상백안륙학처준부지 방동선계필하력 병위요동도행군부대총관겸안무대사 기수륙제군총관 병전량사두의적독고경운곽대봉등 병수적처분 하북제주조부 실지요동 금군용.
6월, 당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맞이하게 하니, 남생은 탈출하여 당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임금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하여 맡도록 하였다.
9월, 당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로 삼고, 현도군공(玄菟郡公)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겸안무대사(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인 안육(安陸) 출신인 학처준(郝處俊)에게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동선(龐同善)과 계필하력을 모두 요동도행군부대총관겸안무대사(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轉糧使)인 두의적(竇義積)ㆍ독고경운(獨孤卿雲)ㆍ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 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 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 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氐蒼嵒三城 與泉男生軍合.
잇ㅂ육년 추구월 이적발신성 사계필하력수지 적초도요 위제장왈 “신성 고구려서변요해 불선득지 여성미이취야.” 수공지 성인사부구등 박성주 개문항. 적인병진격 이십육성개하 방동선고간상재신성 천남건견병습기영 좌무위장군설인귀 격파지. 간진지금산 여아군전패 아군승승푹배 설인귀인병횡격지 살아군오만여인 발남소목저창암삼성 여천남생군합.
26년(서기 667) 가을 9월, 이적이 신성을 무너뜨리고, 계필하력에게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인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적이 병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의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방동선과 고간(高侃)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남건(泉男建)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우리를 물리쳤다. 고간이 금산(金山)으로 나와서 우리의 군대와 싸워 패하였다. 우리 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설인귀가 병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5만여 명의 우리 군사를 죽이고, 남소(南蘇)ㆍ목저(木氐)ㆍ창암(蒼嵒) 등 3성을 빼앗은 뒤에 천남생(泉男生)의 군대와 합세하였다.
郭待封以水軍 自別道 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 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淥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淥津 唐兵不得度.
곽대봉이수군 자별도 취평양 적견별정풍사본 재량장이자지 사본강파실기. 대봉군중기군 욕작서여적 공위타소득 지기허실 내작리합시 이여적 적노왈 “군사방급 하이시위 필참지.” 행군관기통사사인원만경 위석기의. 적내경견양장부지. 만경작격문왈 “부지수압록지험.” 천남건보왈 “근문명의” 즉이병거압록진 당병부득도.
곽대봉(郭待封)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적은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파견하여 곽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예정된 날짜를 놓치고 말았다. 곽대봉은 군사들이 굶주리고 물자가 부족하여 이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암호로 쓴 시를 지어 이적에게 보냈다. 이적이 이를 보고 화를 내며 말하였다. “군대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반드시 목을 베겠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적은 그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곽대봉에게 보냈다. 원만경이 격문(檄文)을 써서 말하였다.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 천남건이 알려 말하였다. “삼가 명령을 듣겠다.” 그리고 즉시 병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치니, 당나라의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郝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糒 簡精銳 擊敗之.
고종문지 유만경어영남 학처준재안시성하 미급성열 아군삼만엄지 군중대해 처준거호상 방식간지 간정예 격패지.
당 고종이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嶺南)으로 유배하였다. 학처준(郝處俊)이 안시성 아래에서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3만 명의 우리 군대가 습격하자 당나라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학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간이식을 먹다가, 정예병을 선발하여 우리를 물리쳤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 爲遼東道副大摠管 郝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 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 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 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州中四十餘城 皆請服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이십칠년 춘정월 이우상유인궤 위요동도부대총관 학처준김인문부지. 이월 이적등 발아부여성 설인귀기파아군어금산 승승 장삼천인 장공부여성 제장이기병소지지. 인귀왈 “병불필다 고용지하여이 수위전봉이진 여아군전 승지 살획아군 수발부여성. 부여주중사십여성 개청복 사어사고언충봉사 자요동환.
27년(서기 668) 봄 정월, 당 고종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과 김인문(金仁問) 등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적 등이 우리의 부여성(扶餘城)을 점령하였다. 설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의 군대를 물리쳐서, 승세를 타고 3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편의 병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설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으며, 우리의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아 마침내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부여주 안에 있는 40여 개의 성이 모두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釁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兄弟䦧狠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荐饑 人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蚡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
제문 “군중운하.” 대왈 “필극 석 선제문죄 소이부득지자 노미유흔야.” 언왈 군무매 중도회 금남생형제혁랑 위아향도 노지정위 아진지지 장충사력 긴고왈필극. 차고구려비기왈 ‘불극구뱍년 당유팔십대장 멸지.’ 고씨자한유국 금구백년 척년팔십의. 노잉천야 인상략매 지진열 랑호입성 분혈어문 인심위해 시행부재거의.
고종이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의 황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까닭은 적에게서 빈틈을 찾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사작전도 빌미꺼리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편이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는 ‘9백 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80 대장이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서로 노략질하고 팔려가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 遇於薛賀水 合戰敗 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敬宗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
천남건복견병오만인 구부여성 여이적등 우어설하수 합전패 사자삼만여인. 적진공대행성. 하사월 혜성견어필묘지간. 당허경종왈 “혜견동북 고구려장멸지조야.”
천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5만의 병사를 보냈는데, 설하수(薛賀水)에서 이적 등과 마주쳐 싸우다가 패하여 3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적은 대행성(大行城)을 공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畢)성과 묘(昴)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의 허경종(許敬宗)이 말하였다.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淥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 相繼. 契苾何力先引兵 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藏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추구월 이적발평양 적기극대행성 제군출타도자 개여적회 진지압록책 아군거전 적등패지. 추분이백여리 발역이성 제성순도급항자 상계. 계필하력선인병 지평양성하 적군계지 위평양월여 왕장견천남산 수수영구십팔인 지백번 지적항 적이예접지.
가을 9월, 이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大行城)에서 승리하자, 다른 방면으로 출동하였던 모든 군대가 이적과 만나 압록책(鴨淥柵)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의 군대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적 등에게 패하였고, 이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계필하력이 먼저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적의 군대가 뒤따라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이 천남산에게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항복하게 하니 이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噪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천남건유폐문거수 빈견병출전 개패 남건이군사위부도신성 신성여소장오사요묘등 밀견인지적청위내응 후오일 신성개문 적종병등성 고조분성 남건자자불사 집왕급남건등.
그러나 천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병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하였다. 천남건은 승려 신성(信誠)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이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자, 이적이 병사를 풀어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천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임금과 천남건 등이 붙잡혔다.
여기 보면 천남생 천 남건이란 이름이 나온다.
개소문의 아들....
과연 연개소문이란 이름의 근거는 뭔가???? 본문에서 然 蓋蘇文 그리하여 개소문이... 란 언급 뿐이다.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 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十二月 帝受俘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 四十二州 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叅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동시월 이적장환 고종명 선이왕등헌우소릉 구군용 진개가 입경사 헌우대묘. 십이월 제수부우함원전 이왕정비기출 사이위사평태상백원외동정 이천남산위사재소경 승신성위은청광록대부 천남생위우위대장군. 이적이하 봉상유차 천남건유검주 분오부 백칠십육성 육십구만여호위구도독부 사십이주 백현 치안동도호부어평양 이통지. 탁아장수유공자 위도독자사현령 여화인참리. 이우위위대장군설인귀 검교안동도호 총병이만인 이진무지 시고종총장원년무지세야.
겨울 10월, 이적이 귀국하려고 하자, 당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임금 등을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호)에 참배하게 하고,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도읍으로 들어와 다시 대묘(大廟)에도 참배하도록 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자신이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하므로 그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천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다. 이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그 공로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다. 천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의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를 삼아,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도와주고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가 고종 총장(摠章) 원년 무진년이었다.
二年 己巳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二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 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이년 기사이월 왕지서자안승 솔사천여호 투신라. 하사월 고종이이만팔천삼백호어겅회지남 급산남경서재주공광지지.
문무왕 2년(서기 669) 기사 2월, 임금의 서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당 고종이 2만8천3백 가구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지함형원년경오세 하사월 검모잠욕흥복국사 반당 입왕외손안순(라기작승)위주 당고종견대장둔고간 위동주도행군총관 발병토지 안순살검모잠 분신라.
함형(咸亨) 원년(서기 670) 경오 여름 4월, 검모잠(劒牟岑)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의 외손 안순(安舜 신라본기에는 勝)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二年辛未歲 秋七月 高侃破餘衆於安市城.
이년신미세 추칠월 고간파여중어안시성.
2년 (서기 671) 신미 가을 7월, 고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무리를 물리쳤다.
三年壬申歲 十二月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水山 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삼년임신세 십이월 고간여아여중 전우백수산 파지. 신라견병구아 고간격극지 노획이천인.
3년(서기 672) 임신 12월,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쳐부수었다. 신라에서 병사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이를 다시 물리쳐서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白水山: 현재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다?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摠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俘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사년계유세 하윤오월 연산도총관대장군이근행 파아인어호로하 부획수천인 여중개분신라.
4년(서기 673)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燕山道摠管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瀘河)에서 우리의 백성들을 쳐부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瓠瀘河 현 임진강??? 함경남도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전장이었다????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의봉이년정축세 춘이월 이항왕위요동주도독 봉조선왕 견귀요동 안집여중 동인선재제주자 새견여왕구귀. 잉이안동도호부어신성 이통지 왕지요동 모반 잠여말갈통.
의봉(儀鳳) 2년(서기 677) 정축 봄 2월, 항복한 우리의 임금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 있던 자들을 모두 임금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임금은 요동에 도착하여 배반을 도모하고자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
여기서 표현의 차이 歲와 年... 단위의 차이는 문화 또는 국가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고로 년을 歲라는 표현을 쓰는 기록이 끼워진 걸로 봐야 한다.
開耀元年 召還卬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頡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개요원년 소환앙주 이영순초사 증위위경 조송지경사 장힐리묘좌 수비기간, 산사기인허하남롱우제주 빈자유안동성방구성 왕왕몰어신라 여중산입말갈급돌궐 고씨군장수절.
개요(開耀) 원년(서기 681), 임금이 앙주(卬州)로 소환되었다가 영순(永淳) 초(서기 682)에 돌아가셨다. 당 고종이 위위경(衛尉卿)으로 품계를 높여주고, 조서를 내려 서울로 옮겨오게 하여 힐리(頡利, 돌궐의 왕)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으며, 묘 앞에 비를 세웠다. 임금의 휘하 사람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의 옛날 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 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使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 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 獻樂工.
수공이년 이항왕손보원 위조선군왕 지성력초 진좌응양위대장군 경봉충성국왕 사통란동구부불행. 명년 이항왕자덕무 위안동도독 후초자국 지원화십삼년 견사입당 헌악공.
수공(垂拱) 2년(서기 686), 항복한 임금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聖曆) 초(서기 698)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部)들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임금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원화(元和) 13년(서기 818)에 이르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악공(樂工)을 바쳤다.
論曰 玄菟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
논왈 현토낙랑 본조선지지 기자소봉 기자교기민 이예의전잠직작 설금팔조 시이기민불상도무문로지폐 부인정신불음 음식이변두 차인현지화야 이우천성유순 이어삼방. 고공자도교불행욕부부해이거지 유이야.
현도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써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여덟 조목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으며,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籩豆(과일그릇과 국그릇)를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夷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신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뗏목을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는데, 이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夫然而易之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子有司. 亂世則英雄特起 僭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埸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부연이역지효 이다예 사다구 근야. 고구려자진한지후 개재중국동북우 기북린 개천자유사. 난세즉영웅특기 참절명위자야 가위거다구지지 이무겸손지의 침기봉장이수지. 입기군련이거지 시고병연화결 약무영세.
그러나 주역에 ‘6효(六爻)의 둘째는 명예가 많으나 넷째는 두려움이 많은 바, 서로 동전의 앞뒤와 같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ㆍ한 시대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자리했고 북쪽의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중국의 왕이 아닌 하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난세(춘추전국)에 영웅들이 나타나 분에 넘치게 하늘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포스런 세상에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이, 천자의 영역을 불법으로 차지하여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천자의 영역에 들어가 살려하니 전쟁이 계속되고 재앙이 넘쳐 평안한 해가 없어졌다.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급기동천 치수당지일통 일유거조명이불순 수왕인어토실. 기완연불외여차 고루치문죄지사 수혹유시설기이함대구 이종어항 국멸이후지.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의 통일을 이루자 동쪽으로 옮겨 중국의 통치에 따르지 않고 중국의 사신을 토실(土室)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를 묻는 전쟁을 자초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임금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연관시말 당기상하화 중서목 수대국 불능이취지. 급기불의어국 불인어민 이흥중원 즉붕궤이부자진. 고맹자왈 “천시지리 불여인화” 좌씨왈 “국지흥야 이복 기망야 이화.” 국지흥야 시민여상 시기복야 기망야 이민위토개 시기화야.”
그 전말을 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주변 대국들이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左氏)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피니 복이요 망하는 나라는 백성을 흙먼지나 검불로 보니 재앙이 된다.”고 했다.
有味哉 斯言也. 夫然則凡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强宗之聚斂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유미재 사언야. 부연즉범유국가자 종폭리지구박 강종지취험 이실인심 수욕이이불란 존이불망우하이강주이악취자호?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다면 무릇 세가 큰 무리가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가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된다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하지 않게 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과음하고 주정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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