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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八-嬰陽王


嬰陽王

 

 

嬰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隋文帝遣使拜王 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영양왕(일운평양) (일운대원) 평원왕장자야. 풍신준상 이제세안민자임 평원재위칠년 입위태자. 삼십이년 왕훙 태자즉위 수문제견사배왕 위상개부의동삼사 급작요동군공 사의일습.

 

영양왕(嬰陽王=평양平陽)의 이름은 원(혹 대원 大元)이며, 평원왕(平原王)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서기 565)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나라의 문제(文帝)가 사신을 보내와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 임명하고, 평원왕의 요동군공(遼東郡公)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의관 한 벌을 가져왔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이년 춘정월 견사입수 봉표사은진봉 인청봉왕 제허지. 삼월 축봉위고구려왕 잉사거복. 하오월 견사사은.

 

2(서기 591)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서 은혜에 감사하고 선물을 바친 다음, 임금으로 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문제가 이를 허락하고 3월에 임금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주었다.

여름 5,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은혜에 감사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삼년 춘정월 견사입수조공.

 

3(서기 592)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팔년 하오월 견사입수조공.

 

8(서기 597) 여름 5,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구년 왕솔말갈지중만여 침요서 영주총관위충격퇴지. 수문제문이대노 명한왕양왕세적위원수 장수육삼만래벌. 하유월 제하조출왕관작 한왕양군출임투관 치수요 궤전불계 군중핍식복우질역. 주나후자공해범해 취명양성 역조풍 강가표몰. 추구월 사환 사자십팔구 왕역공구 견사사죄. 상표칭요동분토신모제어시파병 대지여초. 백제왕창견사봉표 청위군도 제하조 유이고구려복죄 짐이사지 불가치벌후기사이견지 왕지기사 침략백제지경.

 

9(서기 598), 임금이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우리의 군사를 물리쳤다. 수나라의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한왕(漢王) ()과 왕세적(王世積) 등을 모두 원수(元帥)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 문제가 조서를 내려 임금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渝關)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나후(周羅睺)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그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 임금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 미천한 곳의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하였다. 문제가 그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의 왕 창(, 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향하는 수나라 군사의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하였다. 문제가 백제의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

그리고 문제가 백제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십일년 춘정월 견사입수조공 조 태학박사이문진 결고사위진집오권 국초시용문자시 유인기사 일백권 명왈유기 지시책수.

 

11(서기 600)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 때에 정리하고 수정한 것이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 過漢水 城中鼓噪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십사년 왕견장군고승 공신라북한산성 라왕솔병 과한수 성중고조상의 승이피중아과 공불극이퇴.

 

14(서기 603), 임금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자, 성 안에서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이 우리 군사가 많고 자기네 군사가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勑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郡 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 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십팔년 초 양제지행계민장야. 아사자재계민 계민불감은 여지견재 황문시랑배구설제왈 고구려본기자소봉지지 한진개위군현 금내불신 별위이역 선제역정지구의. 단양량불초 사출무공당폐하지시래우홍선지왈 짐이계민성심봉국 고친지기장 명년당왕탁군 이환일어이왕 선조래조 말물의구 물자의구 존육지례 당여계민 구역불조 장수계민 왕순피토.” 왕구 번예파궐 제장토지 계민 돌궐가한야. 하오월 견사공백제송산성 불하 이습석두성 노남여삼천이환.

 

18(서기 607), 초기 수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의 사신이 마침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 우리의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의 사신과 함께 양제를 참배하였다. 이때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裴矩)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箕子)를 봉했던 땅으로,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 현으로 삼았었습니다만 지금은 신하의 나라가 아닌 구별된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 황제께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량(楊諒)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인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교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牛弘)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내년에는 응당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자마자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나를 조알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도 계민을 보호하듯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의 왕이 내게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공격하리라.” 임금이 제후의 나라로써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침범해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 즉 추장이다.

여름 5,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여 3천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십구년 춘이월 명장습신라북경 노획팔천인. 하사월 발신라우명산성.

 

19(서기 608) 2,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이십이년 춘이월 양제하조 토고구려. 하사월 거개지탁군지임삭숭 사방병개집탁군.

 

22(서기 611) 2, 수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도착했을 때,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汔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이십삼년 춘정월임오 제하조왈 고구려소추 미혼불공 숭취발갈지간 천식요예지경 수복한위주륙 소혈잠경 난이다조 종낙환집 췌천수어왕대 파식번이흘금. 권피화양 전위이류 역년영구 악임기영

 

23(서기 612)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길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침입으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자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면 잘리워 나가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천도화음 망징이조. 난상패덕 비가승도 엄닉회간. 유일부족 이고지엄 미상면수조근지례 막긍궁친 유납망반 부지기극 충척변수 극노봉후. 관석이지부정 생인위지폐업. 재석박벌 이루천망 기완전금지륙 미즉후복기주 승불회은 번위장악 내겸거란지당 처유해수 습말갈지복 침일요서.

 

하늘의 도리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기에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난 바 어지러움이 일상이고 도덕을 되살릴 방도가 없는게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부족한 건 엄명을 무시하고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나를 직접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았다. 반란의 세력들에 끌려 할 도리를 알지 못하고 변방을 노려 제후들의 경계심을 날카롭게 하였다. 판단이 안정되지 못해 가뜩이나 시달린 삶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文帝의 치밀하지 않은 정벌에 그물 빠져나가듯 죽음을 면하고 처벌을 받지 않아서 감사함을 모르고 외려 악함을 키워 거란의 무리들과 해변을 차지하고 말갈의 복장으로 요서를 침입하곤 했다.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朔 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 爰曁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

우청구지표 감수직공 벽해지빈 동품정삭 수복탈양침신 알절왕래 학급불고 성이우화 유거봉사 원기해동 정절소차 소경번경 이옹색도로 거정뢍인 무사군지심 이위신지례 차이가인 숙불가용?

또한 대양에 연한 청구=동방 나라들이 제 맡은 기능을 하며 같은 때에 소식을 전하는데 고구려는 그런 관계를 방해하고 가책도 없이 가혹하여 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고구려는 도로를 막아서니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를 신하의 예의라 할수 있나 이를 참아낸 자가 누군가?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徭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숙불가용 차법령가혹 부험번중 강신호족 함집국균 붕당비주 이지성속 회화여시 원왕막신 중이잉세재흉 차옥기근 병과불식 요역무기 역갈전수 신전구학 백성수고 원수적종. 경내애황 불승기폐.

 

또한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을 너무 많이 부과하며, 권력 있는 신하들과 세도 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뇌물이 상거래처럼 흔해 (법보다 돈이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앙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 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모두 소모하다가 몸으로 벽과 구덩이가 되는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구를 쭞아야 도움을 얻을까?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届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阽危 協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회수면내 각회성명지도 황발치치 함흥혹독지탄. 성속관풍 원계유삭 조인문좌 무사재가. 어시 친총육 용신구벌 증궐점위 협종천의 진자포예 극사선모.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今宜授律啓行 分麾届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戈按甲誓旅而後行. 三先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금의수율계행 분휘계로 엄발해이뢰진 역부여이전소 비벌안갑서여이후행. 삼선오신필승이후전. 좌십이군 출등도 우십이군 출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둔숙신갈성동이대방양평등도 락역인도 총집평양.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떠날 것이며,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12군은 각 도에서 진군할 것이오,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冑纓拂旗旛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범일백십삼만삼천팔백인 호이백만 기궤수자배지 의사어남상건수상 유상제어임삭궁남 제마조어계성북 제친수절도 매군상장아장각일인 기병사십대 대백인 십대위단. 보졸팔십대 분위사위 위각유편장일인 기개주영불기번 매단이색. 일견일군 상거사십리 연영점진 종사십일발내진 수미상계 고각상문 정기긍구백육십리 어영내 합십이위삼대오성구사 분예내외전후좌우육군 차후발 우긍팔십리 근고출사지성 미지유야.

 

군사의 총수는 11338백 명이었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桑乾水)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 지내고, 임삭궁(臨朔宮)의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上將), 아장(亞將)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되, 서로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60리에 뻗쳤다. 양제의 진영에는 12(), 3(), 5(), 9()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다다랐다. 근래에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적이 없었다.

 

二月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이월 어제수진지요수 중군총회 임수위대진. 아병조수거수 수병부득제. 제먕공부상서우문개조부교삼도어요수서안. 기성인교취동안 단불급안장여 아병대지 수병효용자 쟁부수접전 아병승고격지 수병부득등안 사자심중.

 

2, 양제가 군대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들어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의 병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우리의 병사가 강하게 공격하였다. 수나라의 병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벌였으나 우리의 병사들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度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맥철장약등안 여전사웅맹차등 개전사 내검병인교 복취서안. 경명소부감하조접교 이일이성. 제군상차계진 대전우동안 아병대패 사자만계. 제군승승 진위요동성. 즉한지양평성야 거가도요하조사천하 명형부상서위문긍등 무요좌지민 급복십년 건치군현 이상통섭.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의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래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간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夏五月 初 隋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事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嬰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勑諸將 高句麗若降 則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赴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하오월 초 수제장지동하야 제계지왈 범군사진지 개수주문대보 무득전천.” 요동수출전불리 내영성고수 제명제군공지 우래제장 고구려약항 즉의무납 부득종병 요동성장함 성중인첩언청항 제장봉지 불감부기 선영치주 비보지 성중수어역비 수출거전 여차재삼 제종불오 기이성구불하.

 

여름 5, 수나라의 장수들이 동쪽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대가 나아가고 물러날 때,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때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고 생각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병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무너질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그러나 양제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성의 방어가 다시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유월기미 제행요동성남 관기성지형세 힐책지왈 공등자이관고 우시가세 욕이암나대아야? 재도지일 공등개불원아래 공견병패이 아금래차 정욕관공등소위 참공배이 공금외사막긍진력 위아불능살공야?”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벼슬이 높다고, 혹은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려고 하는가? 전일 내가 도읍에 있을 때 너희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단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겠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잘못된 행실을 판단하여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쏟지 않고 있으니, 내가 너희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제장함전구실색 제인유지성서수리 어육합성 아제성견수불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六合城)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병사들은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우익위대장순래호아 수강회수군 축로수백리 부해선진입자채수 거평양육십리 여아군상우 진격대파지 획아욕승승취기성 부총관주법상지지 청사제순지구진 호아불청 간정갑수만 직조성하 아장복병어라곽내공사중 출병여호아전 이위패.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의 병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수만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곧장 성의 바로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우리의 장수는 외성들 사이에(羅郭) 있는 빈 절간에 병사를 숨겨 놓고, 병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護兒逐之入城 縱兵俘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호아축지입성 종병부략 무복부오 복병발 호아대패 근이획면 사졸환자 불과수천인 아근추지강소. 주법상정진대지 아군내퇴. 호아인병환둔해포 불감복류응접제군.

 

내호아는 성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처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숨어있던 우리 병사들이 출동하여 내호아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나라의 장수 주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군대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선창가로 돌아가서 주둔하여, 다시는 감히 다른 군대와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 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 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 出玄菟道 右禦衛將軍張瑾 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 出碣石道 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 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 出增地道 皆會於鴨綠水西.

좌익위대장순우문술 출부여도 우익위대장순우중문 출낙랑도 좌효위대장순형원항 출요동도. 우일위대장순설세웅 출옥저도 우준위장순신세웅 출현토도 우어위장순장근 출양평도 우무후장군조효재 출갈석도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최홍승 출수성도 검교우어위호분랑장위문승 출증지도 개회어압록수서.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으로 출동하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으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로 출동하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로 출동하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襄平)으로 출동하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으로 출동하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城)으로 출동하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矟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 掘坑埋之 纔行及中路 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술둥병 자노하회원이진 임나개습백일량 우급비갑창삭병자융구화막 인별삼석이상 중막능승치 하령군중 견지미속자참 사졸개어막하 굴갱매지 재행급중로 양이장진 왕견대신을지문덕지기영사항.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기재, 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병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술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리하여 겨우 중간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때 임금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수나라의 군영으로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實欲觀虛實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실욕관허실 우중문선봉밀지 약우왕습문덕래자 필금지 중문장집지 상서우승유사룡 위위무사고지지 중문수청 문덕환 기이회지 견인태문덕왈 경욕유언 가복래.”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실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는 기회가 있으면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 와 있다가 이를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하였다. 우중문은 금방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아와도 좋다.”

 

文德不顧 濟鴨綠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문덕불고 제압록수이거 중문여술등 기실문덕 내불자안 술이양신욕환 중문의정예추문덕 가이유공 술고지지. 중문노왈 장군장십만지중 불능파소적 하안이견제 차중문차행 고지무공 하즉 고지양장 능성공자 군어지사 결재일인 금인각유심 하이승적?”

 

그러나 을지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기에 돌아가려 하였다. 우중문이 우문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우문술이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수가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時 帝以仲文有計劃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 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시 제이중문유계획 영제군자품절도 고유차언 유시 술등부득이이종지 여제장 도수추문덕 문덕견술군사유기색 고욕피지 매전첩주.

 

당시 양제는 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모든 부대에게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중문이 이와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마지못해 우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술이일지중 칠전개첩 기시취승 우핌군의 어시 수진동제살수 거평양성삼십리 인산위영 문덕복견사사항 청이술왈 약선사자 당봉천 조행재소.”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 번을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임금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술견사졸피폐 불가복전 우평양성험고 도난졸발 수인기사이환 술등위방진이행 아군사면초격술등차전차행.

 

우문술은 자신의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듣고 돌아갔다. 우문술은 방진(方陣)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때 우리의 군대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繫述等 癸卯引還.

추칠월 지살수 군반제 아군자후격기후군 우둔위장군신세웅전사. 어시제군구궤 불가금지 장사분황. 일일일야 지압록수 행사백오십리 장군천수왕인공위전 격아군각지 래호아문술등패 역인환. 유위문승일군독전. 초 구군도요 범삼십만오천 급환지요동성 유이천칠백인. 자저기계거만계 실망탕진 제대노 쇄계술등 계인인환.

 

가을 7,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나라의 장군으로서 천수(天水) 사람인 왕인공(王仁恭)이 후미 부대가 되어 우리의 군대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물러났다. 다만 위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7백 명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覘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智牟 入隋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초 백제왕장견사 청토고구려 제사지점아동정. 장내여아잠통. 수군장출 장사기신국지모 입수청사기. 제대열 후가상사 견상서기부랑석율 지백제 고이기회. 금수군도요 백제역엄병경상 성언조수. 실지양단 시행야 유어요수서 발아무려라 치요동군급통정진이이.

 

애초에 백제왕 장(, 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에게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에게 수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수나라는 요수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武厲邏)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况此虜乎乃復議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이십사년 춘정월 제조징천하병 집탁군 모민위효과 수요동고성 이저군량. 이월 제위시신왈 고구려소노 모만상국 금 발해이산 유망극과 황차노호 내복의벌 좌광록대부곽영간왈 융적실례 신라지사 천균지노 불위혜서발기 내하친욕만승 이적소구호?“ 제불청.

 

24(서기 613) 봄 정월, 수나라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涿郡)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 군직명)로 삼아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 양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리고 양제가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언하였다. “오랑캐가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들이 처리할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嬰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橦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하사월 거가도요 견우문술여양의신 취평양 왕인공출부여도 진군지신성. 아병수만거전 인공수경기일천 격파지. 아군영성고수. 제명제장공요동 청이변의종사. 비루장운제지도 사면구진 주야불식.

 

여름 4,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에게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 왕인공(王仁恭)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수만 명의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왕인공의 강한 기병 1천여 명에게 패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 하고, 그들에게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飛樓: 삐죽 나온 망루), (: 장대), 운제(雲梯: 사다리), 지도(地道: 땅굴)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 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絙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아응변거지 이십여일불발. 주객사자심중. 충제간장십오장 효과심광승기단 임성여아군전 단병접살십수인. 아군경격지 이타미급지 적우간유수환 광접이복상. 제망견장지 즉배조산대부.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의 군대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의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재빠르게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 벼슬을 주었다.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요동성구불하 제견조포낭백여만구 만저토 욕적위어량대도 활삼십보 고여성재 사전사등이동지 우작팔륜거 고출어성 협어량도 욕부사성내 지기장공 성내위축.

요동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자, 양제는 1백만 여 개의 자루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자루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둑길을 쌓게 하고, 병사들에게 그 위에 올라서서 성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여덟 개의 바퀴 달린 고공 수레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둑길에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하자 성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魚梁: 수상 임시 사다리...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 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회 영현감반서지 제대구. 우문달관자제개재현감소 익우지. 병부시랑곡사정 소여현감선 내불자안 래분. 제야밀소제장 사인군환. 군자기계공구 적여구산 영루장막 안도부동.

 

그러나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양제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때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부터 양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쳐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자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다.

 

案堵: 방어막

 

衆心忷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噪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躡.

중심흉구 무복부분 재도분산 아군즉시각지 연불감출 단어성내고조 지래일오시 방점출외 유의수군하지 경이일 내출수천병추섭.

 

하지만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대는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였다.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午時)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병사를 내어 추적해 갔다.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鈔擊 殺略數千人.

외수군지중 불감핍 상상거팔구십리 장지요수 지어영필도 내감핍후군 시후군유수만인 아군수이초격 살약수천인.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십 리에서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의 군대가 따라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者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 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이십오년 춘이월 제조백료 의벌고구려 수일무감언자 조복징천하병 백도구진. 추칠월 거가파회원진. 시 천하이란 소징병가실기부지 오국역곤폐 래호아지비사성 아병역전 호아격극지. 장취평양 왕구 견사걸항 수송곳사정 제대열 견사지절 소호아환.

 

25(서기 614) 2,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병사를 소집하여 여러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大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勑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팔월 제자회원진반사. 동시월 재환서경 이아사자급곡사정 고대묘 잉징왕입조 왕경불종 칙장수엄장 경도후거 경불과행.

 

8,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겨울 10, 양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또한 우리의 임금에게 수나라의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嬰陽王.

이십구년 추구월 왕훙 호왈여양왕.

 

29(서기 618) 가을 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영양왕(嬰陽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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