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藏
王 諱藏(或云寶藏)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蓋蘇文 弑之 立臧繼位.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왕 휘장(혹운보장) 이실국고무시 건무왕제대양왕지자야 .건무왕재위제이십오년 개소문 시지립장계위. 신라모벌백제 견김춘추걸사 불종.
임금의 이름은 장(藏 혹은 보장寶藏)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그는 건무왕(建武王)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蓋蘇文)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김춘추(金春秋)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이를 따라주지 않았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並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이년 춘정월 봉부위왕 견사입당조공. 삼월 소문고왕왈 “삼교비여정족 궐일불가 금유석병흥이도교미성 비소위비천하지도술자야 복청견사어당 구도교이훈국인 대왕심연지 봉표진청 태종견도사숙달등팔인 겸사노자도덕경 왕희 취증사관지
2년(서기 643) 봄 정월, 임금이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3월, 연개소문이 임금에게 말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므로,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므로 천하의 도술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소서.” 임금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주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帝曰 “善”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藏 器懷昭 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王 高句麗王.” 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乞兵救援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윤유월 당태종왈 “개소문시기군 이전국정 성불가인 이금일병력 취지불난 단불욕노백성 오욕사거란말갈요지 하여?” 장손무기왈 “소문자지죄대 외대국지토 엄설수비 폐하고위지은인 피득이자안 필경교타 유사기악 연후토지 미만야.” 제왈 “선” 견사지절비례책명 조왈 “회원지규전왕영전 계세지의 열대구장 고구려국왕장 기회소 민 식우상정 조습예교 덕의유문 조승번업성관선저 의가작명 윤자고실 가상주국요동군왕 고구려왕.” 추구월 신라견사어당 언 “백제공취아사십여성 복여고구려연병 모절입조지로 걸병구원.” 십오일 야명불견월 중성서류.
윤 6월, 당나라의 태종이 물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는데, 이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빼앗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므로, 거란과 말갈에게 그들을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하였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죄를 엄하게 물을 것이 두려워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먼저 인내하면 그는 방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그의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좋다.” 당 태종이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 예를 갖추어서 임금을 책봉하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 나라를 포섭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며, 세대를 계승케 하는 것은 역대의 오래된 규칙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사람됨이 밝고 명민하고 식견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부터 예교를 배워 덕망과 의리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제 처음으로 번방(藩邦, 번국)의 왕위를 계승하여 성실과 정성이 이미 드러났다.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주어야 할 것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요동군왕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으로 책봉함이 옳도다.”
가을 9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백제가 40여 개의 우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주기를 바랍니다.”
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獎 賫璽書賜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戢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 玄獎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玄獎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獎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釁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玄獎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 莫離支竟不從 玄獎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侵暴鄰國 不可以不討.
삼년 춘정월 견사입당조공 재명사농승상리련장 재새서사왕왈 “신라위질국가 조공불핍 이여백제 각의집병 약경골지 명년발병 격이국의.” 현장입경 개소문이장병격신라 파기양성 왕사소지 내환. 현장유이물침신라 개소문위현장왈 “아여신라원극이구 왕자 수인입구 신라승흔 탈아지오백리 기성음개거유지 자비귀아침지 병공미능이.” 현장왈 “기왕지사 언가추론 금요동제성 본개중국군현 중국상차불언 고구려이득필구고지?” 막리지경불종 현장환. 구언지장 태종왈 “개소문시기군 적기대신 잔학기민 금우위아조명 침폭린국 불가이불토.”
3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어 임금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신라는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그대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병사를 내어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상리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어 연개소문을 소환하여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라고 타이르자, 연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날 수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그 기회를 틈타 우리의 땅 5백 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상리현장이 말했다. “지난 일을 어찌 추궁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다.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그러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상리현장이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보고하자 태종이 말했다.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자기 나라의 대신들을 해쳤으며, 제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이웃나라를 함부로 침략했으니 그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秋七月 帝將出兵 勑洪饒江三州 造舡四百艘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 及契丹奚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卿韋挺 爲餽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少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추칠월 제장출병 칙홍요강삼주 조강사백수 이재군량 견영주도독장검등 수유영이도독병 급거란해말갈 선격요동 이관기세 이대리경위정 위궤수사 자하북제주 갸수정절도 청이변의종사 우명소경소예 전하남제주양입해.
가을 7월, 당나라의 태종은 병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였다.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파견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도독의 병사와, 거란, 해(奚),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餽輸使)로 삼아서 하북(河北)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하고, 그에게 명령이 없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경(少卿),소예(蕭銳)에게 명령하여 하남(河南)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강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여기서 하남 하북성은 소위 내륙... 거기서 군사와 군량을 조달한다는 말과 해란 단어와 서로 맞지 않는다. 海는 종종 큰 강을 의미하기에 요하로 봄이 타당하다.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楮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郜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讎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구월 막리지공백금어당 저수량왈 “막리지시기순 구이소불용 금장토지 이납기금 차곡정지류야 신위불가수 제종지 사자우언 막리지견관오십 입숙위 제노위사자왈 여조개사고무 유관작 막리지시역 여조불능복수 금경위지유세 이기대국 죄숙대언?” 실이속대리.
9월, 막리지가 당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수량(楮遂良)이 말했다. “막리지가 자신의 임금을 시해한 죄는 동방의 모든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장차 그를 토벌하려고 하면서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곡정(郜鼎 :곡(郜)에서 만든 큰 솥이다.)과 같은 부류일 것입니다. 저는 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고구려의 사신이 또한 말했다. “막리지가 관리 50명을 궁중 숙위(宿衛)로 보내려고 합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모두 고무(高武, 영류왕)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왕을 시해하고 반역했음에도 너희들은 복수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선전하고 다님으로써 대국을 속이려 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황제는 말을 마치고 사신들을 모두 대리(大理, 형벌을 맡은 관리)에게 맡겨버렸다.
곡정(郜鼎): 곡정(郜鼎)은 춘추시대 곡(郜)에서 만든 큰 솥이다. 송(宋)의 화보독(華父督)이 군주 여이(與夷)를 살해하고 장공(莊公)을 세우자, 노(魯)나라의 환공(桓公)이 제(齊),진(陳),정(鄭) 등과 함께 그를 치려 했다. 이때 송에서 노나라에 곡정을 뇌물로 바치고 나머지 나라에도 뇌물을 주어 무마하였다.
冬十月 平壤雨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 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約 子若孫從我行者 我能拊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群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 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 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동시월 평양우색적 제욕자장토지 소장안기노 노왈 “요동 고중국기 이막리지적살지구 짐장자행경략지 고야부노액 자약손종아행자 아능부순지 무용휼야 즉후사포속 군신개권제무행. 제왈 오지지의 거본이취말 사고이취하 석근이지원 삼자위불상 벌고구려 시야. 연개소문시군 우륙대신이령 일국지인 연경대구 의자고미량이 어시북수속영주 동저속고대인성.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색의 비가 내렸다. 당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고자 수도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옛날 중국의 국토이고 막리지가 그의 왕을 시해하였으니,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 따라서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로하고 어루만질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 황제는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황제에게 원정에 참가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향하고,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롭지 않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고, 또한 대신들을 도륙하여 정사를 제멋대로 한다. 그러므로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 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십일월 제지낙양 전의주자사정천숙 이치사 제이기상종수양제벌고구려 소지행재문지 대왈 “요동도원 양전간조 동이선수성 불가졸하. 제왈 ”금일비수지비 공단청지.“
11월, 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전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천숙(鄭天璹)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하여, 그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東夷)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빠른 시기에 함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硤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艘 自東萊州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 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士 造梯衝於安蘿山 時 遠近勇士應募 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이형부상서장량 위평양도행군대총관 수강회영협병사만 장안낙양모사삼천 전함오백수 자동래지범래 취평양 우이태자담사좌위솔이세적 위요동도행군대총관 수보기육만 급만하이주항호 취요동 양군합세 대집어유주 견행군총관강행본소감구행엄 선독중사 조제충어안라산. 시원근용사응모 굽헌공성기계자 불가승수. 제개친가손익 취기편이.
황제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江), 회(淮), 영(嶺), 협(硤)의 병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및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동래주(東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하였다. 황제는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에게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사다리와 성을 공격하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멀고 가깝고 할 것 없이 모집에 호응하는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장비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이 전투 장비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 仁愛其民 以思亂之軍 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우수조유천하 “이고구려개소문 시주학민 정하가인 금욕순행유계 문죄요갈 소과영둔 무위노비.” 차언 “석 수양제잔촉시하 고구려왕 인애기민 이사란지군 격안화지중 고불능성공 금약안 필승지도유오 일왈 이대격소 이왈 이순토역 삼왈 이리승란 사왈 이일적노 오일 이열당원 사우불극 초고원원 물위의구.”
또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니, 행군 도중에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또 이어서 말했다. “이전에 수나라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의 왕은 백성들에게 어질었으며 그들을 사랑하였다. 이처럼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었으므로 수나라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이치가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요,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요, 셋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요, 넷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쁨으로 충만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이라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减者太半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어시 범둔사공비지구 감자태반 조재군급신라백젤해거란 분도격지.
이에 모든 숙소와 공급 및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ㆍ백제ㆍ해ㆍ거란 등에 조서를 내려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 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報子弟之讎 高句麗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사년 춘정월 이세적군 지유주. 삼월 제지정주 위시신왈 “요동본중국지지 수씨사출사 이불능득 짐금동정 욕위중국보자제지수 고구려설군부지치이. 차방우대정 유차미평 고급짐지미노용사대부여력 이취지.”
4년(서기 645) 봄 정월,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황제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여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시해 당한 왕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 구석구석까지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남은 힘을 가지고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제발정주 친패궁시 수결우의어안후 이세적군발유성 다장형세 약출회원진자 이잠사북취용도 출아불의.
황제가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신의 손으로 매달았다. 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夏四月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懼 無敢出者.
하사월 세적자통정 제요수 지현토. 아성읍대해 개폐문자수. 부대총관강하왕도종 장병수천 지신성 절충도위조삼량 인십여기 직압성문 성중경구 무감출자.
여름 4월, 이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의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 태세로 들어갔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은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고,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은 1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성문을 압박하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 攻盖牟城 拔之 獲二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영주도독장검 장호병위전봉 진도요수 추건안성 파아병 살수천인. 이세적강하왕도종 공개모성발지 획이만인양십만석 이기지위개주 장향수주사 자동래도해 습비사성 성사면현절 유서문가상 정명진인병야지 부총관왕대고선등.
영주도독 장검이 오랑캐 병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내달아 우리의 병사를 물리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빼앗아 2만 명을 사로잡고 10만 섬의 양곡을 탈취하였으며, 개모성을 개주(盖州)로 개칭하였다.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程名振)이 병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에 올랐다.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淖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 布土作橋 軍不留行 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 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 以待車駕之至.
오월 성함 남녀팔천구몰언. 이세적진지요동성하 제지요택 니뇨이백여리 인마불가통. 장작대장염입덕 포사작교 군불유행 도택동 왕발신성국내성보기사만 구요동 강하왕도종 장사천기역지군중개이위중과현절 불약심구고루 이대거가지지.
5월, 성이 함락되어 8천 명의 남녀가 죽었다. 이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황제는 요동의 늪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지대 동쪽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 임금이 신성과 국내성에 있는 4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고 하니, 강하왕 도종은 4천 명의 기병으로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모두 병력의 차이가 너무 크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도종왈 “적시중유경아심 원래피돈 격지필패 당청로이대승여 내경이적유군부호.” 도독마문거왈 “불우경적 사리현장사?”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는 그들의 숫자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이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황제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황제 앞에 적을 남겨드림이 옳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사의 능력을 드러내겠느냐?”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退走 唐兵敗衄.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책마분격 소향개미 중심초안 기합전 행군총관장군예퇴주 당병패뉵 도종수산졸 등고이망견아군진란 여료기수천충지 이세적인병조지 아군대패 사자천여인.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우리의 군사가 쓰러지니 당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군예(張君乂)가 밀려 달아나고, 당나라 병사가 패하였다. 도종은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섰다. 그는 우리 군대의 진영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어 돌격해왔다. 그때 이세적이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1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帝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里. 鼓噪聲振天地.
제도요수 철교이수사졸지심 군어마수산. 노사상하왕도종 초배마문거중랑장 참장군예. 제자장수백기 지요동성하 견사졸부토전참. 제분기우중자 어마상지지 종관쟁부토치성하. 이세적공요동성 주야불식 순유이일. 제인정병회지 위기성수백리. 고조성진천지.
황제는 요수를 건너고는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문거의 직급을 몇 단계 올려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았으며, 장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신의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이세적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세적에게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城有朱蒙祠. 祠有鎖甲銛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성유주몽사. 사유쇄갑섬모 망언전연세천소강. 방위급 식미녀이부신 무언 “주몽열 성필완.”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 태세가 긴박해지자 아름다운 여자를 꾸며 여신으로 삼고 무당이 말하였다. “주몽께서 기뻐하시니 성은 반드시 온전할 것이다.”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絙網 不能拒 以衝車撞陴屋碎之. 時 百濟上金髹鎧 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末 熱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 男女四萬口 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적열포차 비대석과삼백보 소당첩궤. 오안적목위루 결환망 불능거 이충거당비옥쇄지. 시 백제상금휴개 화정소성중 인휘장사등성 아군력전불극 사자만여인 인촉승병만여인 남녀사만구 양오십만석 이지성위요주.
이세적이 포차를 일렬로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내니,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고 충거당(攻城塔)으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황금색으로 칠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 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황제와 이세적의 군사가 합세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민첩한 병사에게 전차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쪽 성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군대는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당나라는 1만여 명의 군사와 4만 명의 남녀 주민을 생포하고, 50만 섬의 양곡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投刀鉞爲信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이세적진공백암성서남 제림기서북 성주손대음 잠견복심청항 임성투도월위신왈 “노원항 성중유불종자” 제이당치여기사왈 “필항자 의립지성상.” 대음입치 성중인이위당병이등성 개종지.
이세적은 백암성(白巖城)의 서남쪽을 공격하고, 황제는 서북쪽으로 갔다.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비밀리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 위에 나와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황제는 당나라의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틀림없이 항복하겠다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 대음이 그 깃발을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은 당나라의 병사가 이미 성에 들어왔다고 판단하고, 모두 손대음을 따라서 항복하였다.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 賞戰士.”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제지극요동야 백암성청항 기이중회 제노기반복 영군뭉왈 “득성 당실이인물 상전사 이세적견제장수기항 수갑사수십인 청왈 ”사졸소이쟁모시석 불고기사자 탐노획이 금성괴발 내아경수기항 고전사지심.
황제가 요동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을 때, 백암성의 사람들이 항복을 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변심을 보고 노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빼앗은 사람과 물건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리라.” 이때 이세적은 황제가 백암성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수십 명의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황제에게 말했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무너져 가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합니까?”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 而虜其妻孥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제하마사왈 “장군언시야 연종병살인 이노기처노 짐소불인 장군휘하유공자 짐이고물상지 서인장군속차일성. 새족내퇴 득성중남여만여구 임수설악 수기항 잉사지식 팔십이상 사백유차 타성지병재백암자 실위유급양장 임기소지. 선시 요동성장사 위부하소살 기성사봉기처자 분백암 제린기유의 사백오필 위장사조영여 귀지평양 이백암성위암주 이손대음위자사.
황제가 말에서 내려와서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볼 수 없다. 장군의 부하로서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내가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다. 장군으로 인하여 이 성이 속죄받기를 원한다.” 세적은 물러나와 성 안에 있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곧 먹을 것을 주고, 80세의 노인에게는 정도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병사로서 백암성에 와있던 자들을 전부 위로하여 타이르고, 그들에게 양식과 군장을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성에서 일을 보던 이가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쳐왔다. 황제는 그의 의리를 좋게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刺史)로 삼았다.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蓋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效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 而滅一家 吾不忍也.” 皆稟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초 막리지견가시성칠백인 수개모성 이세적진노지 기인청종군자효. 제왈 “여기개재가시 여위아전 막리지필살여처자 득일인지력 이멸일가 오불인야.” 개품사견지 이개모성위개주.
애초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에 있던 7백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개모성(蓋牟城)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이세적은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들은 당나라의 군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우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하여 한 집안을 멸망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황제는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 돌려보냈다.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耨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潦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제지안시성 진병공지 북부욕살고연수남부욕살고혜진 수아군금발갈병십오만 구안시. 제위시신왈 “금위연수책유삼 인병직전 연안시성위루 거고산지험 식성중지속 종말갈략오유마 공지불가졸하 욕귀즉니요위저 좌곤오군 상책야. 발성중지중 여지소둔 중책야. 부도지능 래여오전하책야. 경조관지 피필출하책 성금재오목중의.”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욕살(北部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耨薩) 고혜진(高惠眞)이 우리의 군대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지금 고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병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고, 되돌아가려 해도 늪지에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것이 상책이다. 둘째, 성 안의 무리를 이끌고 야간도주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중책이다. 셋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반드시 하책을 가지고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曰 “秦王內芟羣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시 대노고정의연노습사 위연수왈 “진왕내삼군웅 외복융적 독립위제 차명새지재 금거해내지중이레 불가적야. 위오계자 막약둔병부전 광일지구 분견기병 단기양도 양식기진 구전부득 욕귀무로 내가승.”
이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가 고연수에게 말했다. “진왕(秦王, 당 태종)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혼자 힘으로 서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다스리라는 하늘의 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대적할 수가 없다. 나의 계책은 병사를 정돈해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다가, 기습병을 보내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尒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연수불종 인군직진 거안시성사십리. 제공기저회부지 명대장군아사나사이 장돌궐천기이유지 병시교이위주 연수왈 “이여이” 경진승지 지안시성동남팔이 의산이진.
그러나 고연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나아갔다. 황제는 고연수가 주저하면서 나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에게 명령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나라의 병사가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자 연수가 말했다. “다루기가 쉽구나.” 앞을 다투어 기세를 타고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렀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旆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筭耳 今日之事 乞陛下指蹤.”
제실소제장문계 장손무기대왈 “신문 임적장전 필선관사졸지정 신적행경제영 견사골문고구려지 개발도결패 희형어색. 차필승지병야. 폐하미관 신친행진. 범출기제승 개상품성모 재정봉성산이 금일지사 걸폐하지종.”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전부 불러 놓고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하였다. “저는 적을 만나서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들의 마음 상태를 살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여러 병영을 다니는데,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달면서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승리할 병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왕관을 벗어놓고 직접 진지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한 것은, 위로 폐하의 지략을 받들어 모든 장수들이 성공을 이루어낸 것뿐입니다. 오늘 일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제소왈 “제공이차견양 짐당위제공상도 내여무기등 종수백기 승고망지 관산천형세 가이복병급출입지소 아군여말갈합병위진 장사십리 제망지 유구색. 강하왕도종왈 ”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여러 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사양하니, 내가 여러 공들을 위하여 방법을 구상하겠노라.” 황제는 곧 장손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고지에 올라 둘러보고, 산천의 형세 가운데 군사를 숨길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관찰하였다. 이때 우리의 군대는 말갈군과 연합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진의 길이가 40리에 달했다. 황제가 이를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강하왕 도종(道宗)이 말했다. “고구려는 전력을 다하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의 수비에는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군 5천 명을 주시어 그들의 본거지를 뒤엎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帝不應 遣使紿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제불응 견사태연수왈 “아이이국강신시기중 고래문죄 지어교전 비오본심 입이경 추속불급 고취이수성 사이국수신례 즉소실필복위.” 연수신지 불복설비.
황제는 이를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고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왕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의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의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더는 방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勑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제야소문무계사 명이세적장보기만오천 진어서령 장손무기우진달 장정병만일천 위기병 자산북출어협곡 이충기후. 제자장보기사천 협고각 언기치 등산 제칙제군 문고각 제출분격 인명유사 장수항막어조강지측 시야 유성추연수영.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에게 정예군 1만1천 명을 주어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담당자에게는 항복받을 군막을 조당(朝堂)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旦日 延壽等 獨見李世勣軍小 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噪並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 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단일 연수등 독견이세적군소 칙병욕전 제망견무기군진기 명작고각 거기치. 제군고조병진 연수등구 욕분병어지 이기진이란 회 유뢰전 용문인설인귀 저기복 대호함진 소향무적 아군피미.
아침에 고연수 등이 이세적 군대의 수가 적은 것만을 보고 병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고 하였다. 황제는 장손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병사를 나누어 방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영은 이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리의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가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어 우리의 군사가 쓰러졌다.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二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 拜伏請命.
댜군승지 아군대궤 사자이만여인 제망견인귀 배유격장군 여누등장여중 의산자고 제명제군위지 장손무기실철교량 단기귀로. 연수혜진 수기중삼만육천팔백인 청항 입군문 배복청명.
당나라의 대군이 이때를 틈타 공격해왔다. 우리의 군대는 큰 혼란에 빠지고,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황제가 멀리서 설인귀를 바라보다가 그를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자체 수비를 견고히 하였다.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자신의 군사 3만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의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帝簡耨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它器械稱是 更名所幸山 曰駐驆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제간욕상이하관장삼천오백인 천지내지 여개종기 사환평양 수말갈삼천삼백인 실갱지. 획마오만필우왐두명광개만령 사기계칭시 경명소행산 왈주필산 이고연수위홍려경 고혜진위사농경.
황제는 욕살(褥薩) 이하의 지휘관 3천5백 명을 선발하여 당나라의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은 전부 생매장하였다. 말 5만 필, 소 5만 두, 명광(明光) 갑옷 1만 벌을 빼앗았으며, 다른 장비도 그에 달할 만큼 빼앗았다. 황제가 올랐던 산의 이름을 고쳐서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으며,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小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제지극백암야 위이세적왈 “오문 안시성험이병정 기성주재용 막리지지란 성수불복 막리지격지불능하 인이여지. 건안병약이양소 약출기불의 공지필극. 공가선공건안 건안하 즉안시재오복중 차병법소위성유소불공자야.” 대왈 “건안재남 안시재북 오군양개재요동 금유안시 이공건안 약려인단오양도 장약지하 불여선공안시 안시하 즉고행이취건안이.” 제왈 “이공위장 안득불용공책 물오오사.”
황제가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 이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병사가 강하며, 그 성주의 재주와 용맹은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을 정도이다.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성(建安城)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그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만 함락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쓰지 않겠느냐? 부디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噪.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耨薩老耄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이세적수공안시 안시인망견제기개 첩승성고조. 제노 세적청극성지일 남자개갱지. 안시인문지 익견수 공구불하. 고연수고혜진청어제왈 “노기위신대국 불감불헌기성. 욕천자조성대공 노득여처자상견. 안신인고석기가 인자위전 미역졸발. 금 노이고구려십여만중 망기저궤 국인담파 오골성욕살노모 불능견수 이병임지 조지석극 시여당도소성 필망풍분궤. 연후수기자량 고앵이전평양필불수의.”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日傘)을 보자마자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질렀다. 황제가 분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 안시성의 남자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여 당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빼앗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고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요, 그밖의 길에서 맞닥뜨리게 될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忷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군신역언 “장량병재사성 소지 신숙가지 승고구려흉구 병역발오골성 도압록수 치취평야 재차거의.”
여러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장량의 병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信宿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는 틈을 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 “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徼幸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向烏骨 皆躡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雞彘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 烟火日微 今鷄彘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제장종지 독장손무기이위 “천자친정 이어제장 불가승위격행 금건안신성지노중 유십만 약향오골 개섭오후 불여선차안시 취건안 연후장구이진 차만전지책야. 제내지 제장급공안시 제문성중치체성 위세적왈 “위성적구 성중 연화일미 금계체심원 차필향사 욕야출습아 의엄병비지.”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홀로 나서서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라 하니, 황제는 곧 이전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서둘러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을 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병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是夜 我軍數百人 縋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餘軍退走.
시야 아군수백인 추성이하. 제문지 자지성하 소병급격 아군사자수십인 여군퇴주.
이날 밤, 수백 명의 우리 군사들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병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의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侵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礮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足 帝親爲之針 築山 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강하왕도종 독중축토산어성동남우 침핍기성. 성중역증고기성 이거지. 사졸분번 교전일육칠합 충거포석 괴기루첩 성중수립목책. 도종상족 제친위지침. 축산 주야불식 범육순용공오십만 산정거성수장 하림성중.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차츰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성 높이를 더 올려서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씩 싸움을 벌였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 수레와 포석이 누대와 성 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나라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 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 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
도종사과의부복애 장병준산정 이비적 산퇴압성 성붕 회복애사리소부 아군수백인 종성결출전 수탈거토산 점이수지. 제노 참복애이순 명재장공지. 삼일불능극. 도종사선지기하 청죄. 제왈 “여죄당사 단짐이한무살왕회 불여진목용맹명 차유파개모요동지공 고특사여이.”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며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때 부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고,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의 목을 베어 돌려 보이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한무제(漢武帝)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은 진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勑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제이요좌조한 초고수동 사카난구유 차양식장진 칙반사 선발요개이주호구 도요 내요병어안시성하이선 성중개병적불출.
황제는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와 개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縑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潦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翦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鞘 以助役.
성주등성배사 제가기고수 사겸백소 이려사군 명세적도종 장보기사만위전 지요동도요수 요택니뇨 거마불통 명무기 장만인 전초전도 수심처 이거위량 제자게신어마초 이조역.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고,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내려주어 임금을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황제는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는데,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말 손잡이에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冬十月 帝至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勑燃火於道以待之 凡捗玄菟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동시월 제지박구주마 독전도 제군도발착수 폭풍설 사졸점습다사자. 칙연화어도이대지 범보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우황십성 사요개암삼주호구 입중국자칠만인. 고연수자항후 상분탄 심이우사 혜진경지장안.
겨울 10월, 황제가 박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황제는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도ㆍ횡산ㆍ개모ㆍ마미ㆍ요동ㆍ백암ㆍ비사ㆍ협곡ㆍ은산ㆍ후황 등 10개 성을 함락시키고,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들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心火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新城建安駐蹕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신성건안주필삼대전 아군급당병마사망자 심중. 제이불능성공 심회지 탄왈 “위징약재 불사아유시행야.”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 당나라 공신)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論曰 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논왈 당태종 성명불새출지군 제안차어탕무 치리기어성강 지어용병지제 출기무궁 소향무적이동정지공 패어안시 즉기성주 가위호걸비상자의. 이사실기성명 여양자소운 제노대신 사실기명 무이 심가석야.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하여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임금이다. 난을 평정하기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이치에 통달하기는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과 비슷하였으며, 병법에는 기묘한 전술이 무궁하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 정벌의 공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므로 그 성주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그의 성명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楊子)가 이른바 제(齊)와 노(魯)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 靖曰 “此 道宗所解.”
오년 춘이월 태종환경사 위이정왈 “오이천하지중 곤어소이 하야” 정왈 “차 도종소해.”
5년(서기 646) 봄 2월, 태종이 도읍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정이 대답했다. “이는 도종이 풀어드릴 것입니다.”
帝顧問道宗 具陳 在駐蹕時 乘虛取平壤之言 帝悵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
황제는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틈을 이용하여 평양을 점령하자고 한 말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황제가 한탄하며 말했다.
“당시에는 무척 급하고 바쁜지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겠다.”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 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하오월 왕급막리지개금 견사사되 병헌이미녀. 제환지 위사자왈 “색자인소중 연민기거친척이상내심 아불취야.” 동명왕모소상 읍혈삼일.
여름 5월, 임금과 막리지 개금(蓋金,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명의 미인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했다. “미녀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과 떨어져 애태우는 것이 불쌍하므로 내가 이를 받지 않겠다.” 흙으로 만든 동명왕 어머니의 석상이 사흘 동안 피를 흘리며 울었다.
初 帝將還 帝以弓服賜盖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勑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초제장환 제이궁복사개소문 수지불사 이우익교자 난견사봉표 시언솔개궤탄 우대당사자거오상규사변극. 누칙령불공신라 이침능부.지 태종조물수기조공 경의토지.
애초에 당 태종이 돌아가려 할 때 연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주었었다. 연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비록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편지를 올렸지만, 그의 말은 거짓에 가깝고 황당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는 당나라의 사신을 거만하게 대하였으며,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여러 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게 하였으나, 이를 업신여기고 침공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의 조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를 칠 것을 다시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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