榮留王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嬰陽王異母弟也 嬰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 휘건무(일운성) 영양왕이모제야 영양재위이십구년훙 즉위.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 혹 성成)이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이년 춘이월 견사여당조공. 하사월 왕행졸본 사시조묘. 오월 왕지자졸본.
2년(서기 619) 봄 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5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사년 추칠월 견사여당조공.
4년(서기 621)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輯睦 永敦聘好 各保疆埸 豈非盛美?
오년 견사여당조공. 당고조감수말전사다함어북 사왕조서왈 “짐공응보명 군림솔토 시순삼령회유만국 보천지하 정균무자 일월소소 함사예안. 왕통섭요좌 세서번복 사품정삭 원둔직공 고견사자 발섭산천 신포성간 짐심가언. 방금 육합영안 사해청평 옥백기통 도로무옹 방신집목 영동빙호 각보강장 이비성미?
5년(서기 62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당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나라에 붙잡힌 것을 염두에 두고,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ㆍ지ㆍ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므로,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제후국의 자격으로 중국의 역법을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거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거듭 펴 보이니, 나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여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撫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단수씨계년 연병구난 공전지소 각실기맹 수사골육괴리. 가가분석 다력년세 원광불신. 금 이국통화 의무저리 재차소유고구려인등 이령추고라 심즉견송 피처소유차국인자 왕가방환 무진무육지방 공홍인서지도 어시 실수괄화인이송지 수지만여 고조대희.
다만 수나라의 말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난이 얽혀서, 서로 싸우던 곳에서는 각각 자국의 백성들이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부모와 형제들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었으니 의(義)에 어긋난 바가 없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보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넓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이었고 당나라의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육년 동십이월 견사여당조공.
6년(서기 623)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칠년 춘이월 왕견사여당 청반력 견형부상서심숙안 책왕위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국왕 명도사이천존상급도법 왕위지강노자. 왕내국인천지. 동십이월 견사입당조공.
7년(서기 624) 봄 2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임금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국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天尊)의 화상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임금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八年 王遣人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팔년 왕견인입당 구학불노교법 재허지.
8년(서기 625),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므로,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朱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구년 신라백제견사어당 상언 고구려폐도 사부득조 우루상침략 제견산기시랑주자사 지절유화오아봉표사죄 청여이국평.
9년(서기 626),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 당나라 황제가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사(朱子奢)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임금이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와 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頡利可汗 兼上封域圖.
십일년 추구월 견사입당 하태종금돌권힐리기한 겸상봉역도.
11년(서기 628)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封域圖, 지도)를 올렸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십이년 추팔월 신라장군김유신 래침동변 파낭비성. 구월 견사입당조공.
12년(서기 629) 가을 8월,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娘臂城)을 빼앗았다.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십사년 당견광주사마장손사 임예수전사해골 제지. 훼당시소립경관. 춘이월 왕동중축장성 동북자부여성 서남지해천유여리 범일십육년필공.
14년(서기 631), 당나라에서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를 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 전사자 합동묘)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임금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쪽은 부여성(扶餘城)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衄.
이십일년 동시월 침신라북변칠중성 신라장군알천역지 전어칠중성외 아병패뉵.
21년(서기 638)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였다.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맞받아 칠중성의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의 군사가 패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 入唐朝貢. 太宗勞慰 賜賚之特厚 王遣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이십삼년 춘이월 견세자완권 입당조공 태종노위 사뢰지특후 왕견자제입당 청입국학. 추구월 일무광 경삼일복명.
23년(서기 640) 봄 2월, 당나라에 세자 환권(桓權)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임금이 당나라에 자제들을 보내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해가 빛을 잃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瘵未復 吾不欲勞之耳.”
이십사년 제이아태자입조 견직방낭중진대덕답노. 대덕입경 고지성읜 이릉기후향관수자왈 “오아호산수 차유승처 오욕관지” 수자희도지 여력무소부지. 유시 실득기섬곡. 견화인수말종군몰유자 위도찬척존망 인인수제. 고소지사여렵도관지. 왕성진병위 인견사자. 대덕인봉사점국허실 오인부지. 대덕환주 제열. 대덕언어제왈 “기굿문고창망 대구 관후지근 가어상수” 제왈 “고구려본사군지이 오발졸수만 공요동 치필경국구지 별견주사출동래 자해도축형양 수륙합세 취지불난 단산동주현 조채미복 오불욕노지이.”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고창(高昌, 중국 신강 지방에 있던 나라)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에서 접대하는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 명의 병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東萊)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여러 고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東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이십오년 춘정월 견사입당조공. 왕명동부대인개소문 감장성지역. 동시월 개소문시왕. 십일월 태종문왕사 거애어원중 조승물삼백단 견사지절조제.
25년(서기 64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다.
11월, 당 태종은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의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부절을 가진 공식 사절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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