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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六 - 故國原王


故國原王

 

故國原王(一云國罡上王) 諱斯由(或云釗) 美川王十五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春 王薨 卽位.

고국원왕(일운국강상왕) 휘사유(혹운쇠) 미천왕십오년 입위태자. 삼십이년 춘 왕훙 즉위.

 

고국원왕(故國原王 또는 국강상왕 國罡上王)의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쇠;)이다. 미천왕(美川王) 15년에 태자가 되었고, 32년 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 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이년 춘이월 왕여졸본 사시조묘 순문백성 노병진급. 삼월 지자졸본.

 

2(서기 332) 2,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冬十二月 無雪.

사년 추팔월 증축평양성. 동십이월 무설.

 

4(서기 334) 가을 8,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五年 春正月 築國北新城. 秋七月 隕霜殺穀.

오년 춘정월 축국북신성. 추칠월 운상살곡.

 

5(서기 335) 봄 정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가을 7, 서리가 내려 곡식에 큰 해를 입혔다.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 貢方物.

육년 춘삼월 대성류서북 견사여진 공방물.

 

6(서기 336) 3,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임금이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王乞盟 乃還.

구년 연왕황래침 병급신성 왕걸맹 내환.

 

9(서기 339), ()나라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十年 王遣世子 朝於燕王皝.

십년 왕견세자 조어연왕황.

 

10(서기 340), 임금이 연나라의 왕 모용황에게 세자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冬十月 燕王皝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 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皝從之.

십이년 춘이월 수집환도성 우축국내성. 추팔월 이거환도성. 동시월 연왕황천도용성 입위장군한청 선취고구려 우위우문 연후중원가도고구려유이도 기북도평활 남도험협 중욕종북도. 한왈 노이상정료지 필위대군종북도 당중북이경남 왕의수예병 종남도격지 출기불의 환도부족취야 별견편사 풀북도 종유차질 기복심이궤 사지무능위야 황종지.

 

12(서기 342) 2,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후,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킨 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모용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요시하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왕께서 마땅히 정예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을 택하여 기습 공격을 하면, 환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그들은 전의를 상실할 것입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말을 따랐다.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備南道.

십일월 왕자장경병사만 출남도. 이모용한모용패위전봉 별견장사왕우등 장병만오천 출북고이래침 왕견제무 구정병오만 거북도 자수영병이비남도.

 

11, 연나라의 왕 모용황이 굳세고 강한 4만 명의 병력을 몸소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에게 병사 15천 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하게 하였다. 임금은 아우 무()에게 정예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慕容翰等先至戰 皝以大衆繼之 我兵大敗. 左長史韓壽 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埿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會 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皝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모용한등선지전 황이대중계지 아병대패 좌장사한구 참아장아불화도가 재군승승 수입환도. 왕단기주입단웅곡 장군모여니 추획왕모주씨급왕비이귀. 회 왕우등전어북도 개패몰 .유시 황불복궁추 견사초왕 왕불출.

이때 모용한 등이 먼저 쳐들어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도착한 모용황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가 우리 병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그 기회를 타서 마침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임금은 가족을 버리고 단웅곡(斷熊谷)으로 도주하였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추격하여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때 연나라의 장군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병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임금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임금이 자신에게 몸소 찾아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이에 나가지 않았다.

 

皝將還 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 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황장환 한수왈 고구려지지 불가술수 금 기주망민산 잠복산곡 대군기거 필복구취 수기여진유족위환 청재기부시 수기생모이귀 사기속신자귀 연후반지 무이은신 책지상야.”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왕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지만,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반드시 나머지 병사를 다시 모을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왕 아버지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어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간 후, 고구려왕이 제발로 와서 사죄를 하면, 그 시체와 생모를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皝從之 發美川王廟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황종지 발미천왕조묘 재기시 수기부고루세지보 노남여완여구 소기궁실 훼환도성이환.

 

모용황이 한수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궐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皝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십삼년 춘이월 왕견기제 칭신입조어연 공진이이수천 연왕황내환기부시 유류기모위질. 추칠월 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 견사여진조공. 동시월 설오척.

 

13(서기 343) 2, 임금이 자신의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게 하면서 조회하게 하고, 천여 가지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치도록 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곧 임금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보내고, 임금의 어머니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가을 7, 임금이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이주하였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고 있다. 임금이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11,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十五年 冬十月 燕王皝使慕容恪來攻 拔南蘇 置戍而還.

십오년 동시월 연왕황사모용각내공 발남소 치수이환.

 

15(서기 345) 겨울 10,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十九年 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 燕王雋赦之 更名曰活 拜爲中尉.

삽구년 왕송전동이호군송황우연 연왕주사지 경명왈활 배위중위.

 

19(서기 349), 임금이 이전의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에 돌려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慕容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이라고 고쳐서 중위(中尉)로 삼았다.

 

二十五年 春正月 立王子丘夫爲王太子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刁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

이십오년 춘정월 입왕자구부위왕태자. 동십이월 왕견사지연 납질수공 이청기모 연왕전허지 견전중장군고감 송왕모주씨귀국 이왕위정동대장영주자사 봉낙랑공 왕여고.

 

25(서기 355) 봄 정월, 임금이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에게 왕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

삼십구년 추구월 왕이병이만 남벌백제 전어치양 패속.

 

39(서기 369) 가을 9, 임금이 병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침입하도록 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四十年 秦王猛 伐燕破之 燕太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

사십년 진왕먕 벌연차지 연태부모용평래분 왕집송어진.

 

40(서기 370), ()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帥 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사십일년 동시월 백제왕수 병삼만 래공평양성 왕출사거지 위류시소중 시월이십삼일 훙 장우고국지원(백제개로왕표위왈 효참쇠수 과사야)

 

41(서기 371) 겨울 10, 백제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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