烽上王
烽上王(一云雉葛) 諱相夫(或云歃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二十三年 薨. 太子卽位.
봉상왕(일운치갈) 휘상부(혹운삽시루) 서천왕지태자야. 유교일다위기 서천왕이십삼년 훙. 태자즉위.
봉상왕(烽上王 다른 이름으로 치갈雉葛)의 이름은 상부(相夫 혹은 삽시루 歃矢婁)이며, 서천왕(西川王)의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3년에 서천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원년 춘삼월 살안국군달가 왕이매재제부지행 유대공업 위백성소담망 고의지모살 국인왈 미안국군 민불능면양맥숙신지란 금기사의 기장언탁 무불휘제상조. 추구월 지진.
원년(서기 292) 봄 3월, 임금이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죽였다. 임금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의심하여 음모로 죽였던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안국군이 없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했을 것인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났다.
二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廆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廆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九月 王謂其弟咄固有異心 賜死 國人以咄固無罪哀慟之 咄固子乙弗出遯於野.
이년 추구월 모용외래침 왕욕왕신성피적 행지곡림 모용외지왕출 인병추지 장급 왕구. 시 신성제북부소형고노자 영왭끼영왕 봉적분격지 외군패퇴. 왕희 가고노자작위대형 겸사곡림위식읍. 구월 왕위기제돌고유이심사사. 국인이돌고무죄애통지 돌고자을불출둔어야.
2년(서기 293) 가을 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임금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임금이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가 임금이 도망간 것을 알고 병사를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들의 손에 거의 잡힐 듯하자 임금이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 태수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맞이하고, 적군과 만나 분발해 그들을 공격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났다. 임금은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더해 대형(大兄)으로 삼고, 아울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9월, 임금은 그의 동생 돌고(咄固)가 반역할 마음을 가졌다 하여 자결을 명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몹시 슬퍼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교외로 도망쳤다.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삼년 추구월 국상상루졸 이남부대사자상조이위국상 진작위대주부.
3년(서기 294) 가을 9월, 국상 상루(尙婁)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五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群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埸 爲之奈何?” 國相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太守 善政有威聲 慕容廆不復來寇.
오월 추팔월 모용외래침 지고국원 견서천왕묘 사인발지 역자유폭사자 역문광내유악성 공유신내인퇴 왕위군신왈 “모용씨 병마정강 누범아강장 위지내하?” 국상창조리대왈 “북부대형고노자 현차용 대왕약욕어구안민 비고노자 무가용자 왕이 고노자위신성태수 선정유위성 모용외불복래구.
5년(서기 296) 가을 8월, 모용외가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렀다. 그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일하던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이가 생기고 또한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모용씨는 병사가 강력하여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거든, 고노자가 아니면 쓸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고 고노자가 선정을 베풀어 권력과 명성이 높아지니, 모용외는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 頗極侈麗 民饑且困 群臣驟諫 不從. 十一月 王使人索乙弗 殺之不得.
칠년 추칠월 상박살곡 민기. 동시월 왕증영궁실 파극치려 민기차곤 군신취간 불종, 십일월 왕사인색을불 살지부득.
7년(서기 298)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 임금이 궁실을 증축하였는데, 생각보다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궁핍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여 간언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임금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팔년 추구월 귀곡우봉산 객성범월. 동십이월 뢰 지진.
8년(서기 299) 가을 9월, 귀신이 봉산(烽山)에서 울었다. 객성(客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겨울 12월, 우레가 치고 지진이 났다.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不雨 年饑 民相食.
구년 춘정월 지진. 자이월지추칠월불우 년기 민상식.
9년(서기 300) 봄 정월, 지진이 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팔월 왕출국내남여연십오이상 수리궁실. 민핍어식 곤어역 인지이유망.
8월, 임금이 국내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 수리를 맡겼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궁핍해지고 일의 고통으로 인해 도망치고 흩어졌다.
倉助利諫曰 “天災荐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况比鄰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창조리간왈 “천지천지 년곡부등 여민실소 장자유리사방 노유전호구학 차성외천우민 공구수성지시야. 대왕증시불사 구기아지인 곤목석지역 심괴위민부모지의 이황차린유강경지적 약승오폐이래 기여사직생민하 원대왕숙계지.”
창조리가 간언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되어 곡식이 자라지 않고,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계곡과 구덩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염려하여 몹시 조심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배고픈 백성들을 몰고 가서 토목공사의 부역에 시달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백성의 부모 된 뜻에 매우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가까운 곳에 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가 피폐한 때를 타서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王慍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왕온왈 “군자 백성지소첨망야 궁실불장려 무이시위중 금국상개욕방과인 이간백성지예야.”
임금이 화를 내어 말하였다. “임금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권력과 중후함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과인을 헐뜯어 백성들의 칭송을 들으려고 하는 것 같구나.”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復言.”
조리왈 “군불휼민 비인야 신불갈군 비충야 신기승핍국상 불감불언 이감간예호” 왕소왈 “국상욕위백성사야 기무복언.”
창조리가 말하였다. “임금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국상이라는 보잘것없는 자리를 이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들으려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겠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群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조리지왕지불준 차외급해. 퇴여군신동모 폐지 영을불위왕. 왕지불면 자경 이자역종이사. 장어봉산지원 호왈봉산왕.
창조리는 임금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을 알았고, 또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금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아 임금으로 삼았다. 임금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그의 두 아들 역시 따라 죽었다. 봉산(烽山)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봉상왕(烽上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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