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川王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혹운동양) 휘우위거 소명교체 산상왕지자 모주통천인 입위산상소루 사실기족성 전왕십칠년 입위태자 지시사위. 왕성관인 왕후욕시왕심 후왕출유 사인절왕로마렵. 왕환왈 마무렵가련 우영시자진식시 양복갱어왕의 역불노.
동천왕(東川王 혹은 동양東襄)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며, 어릴 때 이름은 교체(郊彘)이고,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으나, 역사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 임금은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임금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임금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다. 임금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 왕후가 또 모시는 사람을 시켜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임금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역시 화내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이년 춘이월 왕여래본 사시조묘 대사. 삼월 봉우씨위왕태후.
2년(서기 228) 봄 2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于氏)를 왕태후로 책봉했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사년 추칠월 국상고우루졸 이우태명림어수위국상.
4년(서기 230) 가을 7월, 국상 고우루(高優婁)가 죽었다. 이에 우태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팔년 위견사화친. 추구월 태후우씨훙. 태후임종유언왈 “첩실행 장하면목견국양어지하 약군신불인제어구학 즉청장아어산상왕지측 수장지여기언.
8년(서기 234), 위(魏)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무자왈 국양항어여왈 작젼우씨귀우산상 불승분에 수여이전 퇴이사지 안후불인견국인 이고어조 차아이물 시용식송칠중어능전.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십년 춘이월 오왕손권 견사자호위통화. 왕류기사 지추칠월 참지 전수어위.
10년(서기 236) 봄 2월,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십일년 견사여위 하개년호. 시경초원년야.
11년(서기 237),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의 개정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元年)이었다.
十二年 魏太尉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십이년 위태위사마선왕솔중 토공손연. 왕견주부개사 장병천인조지.
12년(서기 238), 위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쳤다. 임금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천 명을 이끌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십육년 왕견장 습파요동서안평.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爲王太子 赦國內.
십칠년 춘정월 입왕자연불위왕태자 사국내.
17년(서기 243) 봄 정월,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십구년 춘삼월 동해인헌미녀 왕납지후궁. 동시월 출사침신라북변.
19년(서기 245) 봄 3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임금이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입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이십년 추팔월 위견유주자사관구검 장만인 출현토내치 왕장보기이만인 역전어비류수상 패지 참수삼천여급 우인병재전어양맥지곡 우패지 참획삼천여인. 왕위제장왈 “위지대병 반불여아지소병 관구검자위지명장 금일명재아장악지중호!”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0000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은 나의 손아귀에 달려 있도다.”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내령철기오천 진이격지. 검위방진 결사이전 아군대궤 사자일만팔천여인. 왕이일천여기 분압록원.
임금은 곧 철기(鐵騎)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方)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임금은 기병 1천여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 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동시월 검공함환도성 시지. 내견장군왕기 추왕. 왕분남옥저 지우죽령 군사분태진 유동부밀우독재측 위왕왈 “금추병심박 세불가탈 신청결사이어지 왕가둔의”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임금을 쫓았다. 임금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임금의 옆에 있다가 임금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병이 매우 가까이 닥쳐 있으므로 이 형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죽을 각오로 적군을 방어하면 임금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수모사사 여지부적역전 왕근득탈이거 의산곡 취산졸자위 위왈 “약유능취밀우자 후상지” 하부유옥구전대왈 “신시왕언”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가서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임금은 간신히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만약 밀우를 찾아올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수어전지 견밀우복지 내부이지. 왕침지이고. 구이내소 왕간행전전 지남옥저. 위군추부지 왕계궁세굴 부지소위.
마침내 전장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업고 돌아왔다. 임금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어났다. 임금은 사잇길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마땅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꺾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동부인유유진왈 “세심위박 불가사사 신유우계 청이음식왕호위군 인사극자살피장 약신계득성득왕가분격결승의” 왕왈 “락” 유유입위군사항왈 “과군획죄어대국 도지해빈 조궁무지 장이청항어진전 귀사사구 선견소신 치불전지물 위종사차.”
그때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와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하거든 임금께서는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지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좋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의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위장문지 장수기항 유유은도식기 진전 발도자위장흉 여지구사 위군수란 왕분군위삼도 금격지 위군요란불능진 수자낙랑이퇴 왕복구논공 이밀우유유위제일 사밀우거곡청목곡 사옥구압록두눌하원이위식읍 추증유위구하자 우이지가다우위대사자 시역야 위장도숙신남계 각석기공 우도환도산 명불내성이귀.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임금은 나라로 돌아와 공적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가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번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毌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毌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초 기신득래 견왕침반중국 수산 왕불종. 득해탄왈 “입견차지 장생봉고” 수불식이사. 관구검영자군 불양기묘 불벌기수 득기처자 개방견지(괄지지운 불래성즉국내성야 성루석지 차즉환도산여국내성상접. 양서 ‘이사마의토공손연 왕견장 습서안평 관구검래침.’ 통감 ‘이득래간왕 위왕위궁시사’ 오야)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가 임금이 중국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하였으나,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 쑥대가 자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득래는 결국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무덤가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처자들을 잡았으나 모두 풀어 주도록 하였다.(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한 틈을 노려 고구려의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침입하여 온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이십일년 춘이월 왕이환도성경란 불가복도 축평양성 이민급묘사 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 혹운왕지도왕검.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임금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라고도 한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이십이년 춘이월 신라견사결화. 추구월 왈훙 장어시원 호왈동천왕. 국인회기은덕 막불애상. 근신욕자살이순자중 사왕이위비례 금지. 지장일 지묘자사자심다 국인벌시 이복기시 수명기기왈 시원.
22년(서기 248)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원(柴原)에 장사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는 무리가 많았으나, 새로 즉위한 임금이 예가 아니라 하여 금지하였다. 그러나 장례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무덤에 와서 자살한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다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곳을 시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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