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國川王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模)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고국천왕(혹운국양) 휘남무(혹운이이모) 신대왕백고지제이자. 백고훙 국인이장자발기불초 공립이이모위왕.
고국천왕(故國川王)(혹은 국양(國襄)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模)이며, 신대왕(新大王)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扛鼎. 蒞事聽斷 寬猛得中.
한헌제건안초 발기원위형이부득립 여연노가 각장하호삼만여구 지공손강항 환주비류수상. 왕신장구척 자표웅위 역능강정. 리사청단 관맹득중.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기에 발기가 형인데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 가에서 살았다. 임금은 키가 9척이고 모습과 자태가 훌륭하며, 힘은 솥을 들어 올릴 만큼 세었다. 일에 임해서는 경청하여 결단하고 관대함과 예리함을 적당히 지켰다.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 掾那部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이년 춘이월 입비우씨위왕후. 후 연나부우소지녀야. 추구월 왕여졸본 사시조묘.
2년(서기 180) 봄 2월,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연나부(掾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四年 春三月甲寅夜 赤氣貫於太微 如蛇. 秋七月 星孛于太微.
사년 춘삼월갑인야 적기관어태미 여사. 추칠월 성패우태미.
4년(서기 182) 봄 3월, 갑인(甲寅)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太微)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마치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六年 漢遼東太守興師 伐我. 王遣王子罽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육년 한요동태수흥사 벌아. 왕견왕자계수거지 불극. 왕친수정기왕 여한군전어좌원 패지. 참수산적.
6년(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八年 夏四月乙卯 熒惑守心. 五月壬辰晦 日有食之.
팔년 하사월을묘 형혹수심. 오월임진회 일유식지.
8년(서기 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熒惑, 화성)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畀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십이년 추구월 경도설육척 중외대부패자어비류평자좌가여 개이왕후친척 집국권병 기자제병시세교치 략인자녀 탈인전택 국인원분. 왕문지 노욕주지 좌가려등여사연나모반.
12년(서기 190)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네 연나(椽那: 고구려 때 5부족의 하나. 준왕족(準王族)에 속했으며, 대대(代代)로 왕비(王妃)가 나와 왕족(王族)에 가까운 대우(待遇)를 받았음)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 聚衆 攻王都 王徵畿內兵馬 平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십삼년 하사월 좌가려등 취중 공왕도 왕징기내병마 평지. 수하령왈 근자 관이총수 위비덕진 독류백성 동아왕가 차과인불명소치야 영여사부 각거현량재하자 어시 사부공거동부안류 왕징지 위이국정 안류언어왕왈 “미신용우 고부족이참대정 서압록곡좌물촌을파소자 유리왕개신을소지손야 성질강곡 지여연심 불견용어세 역전자급 대왕약욕리국 비차인즉불가”
13년(서기 191) 여름 4월,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했다. 임금은 왕도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길 “근래에 총애 받는 바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으니,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의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 4부에 명령하니, 각각 자신의 아래에 있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하니 이에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임금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였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디 큰 정사에 참여하기 부족합니다. 서쪽 압록곡(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 사는 을파소(乙巴素)라는 사람은 유리왕(琉璃王)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성질이 강직하고 굳세며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등용되지 않아 힘써 밭을 갈며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왕견사 이비사중례빙지 배중외대부 가작위우태 위왈 “고도승선업 처신민지상 덕박재단 미제어리 선생장요오회명 궁처초택자구의 금불아기 번연이래 비독고지고행 사직생민지복야 청안승교 공기진심.”
임금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중후한 예로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대부의 벼슬을 주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고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있으나 덕이 없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미숙하다. 선생은 재능을 감추고 총명을 숨기면서 궁색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왔다. 이것은 나만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란다.”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 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파소의수허국 위소구직부족이제사 내대왈 “신지노건 불감당엄명 원대왕 선현량 수고관 이성대업.”
을파소는 비록 뜻은 나라에 허락하였지만 받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여 말하였다. “저의 느리고 둔함으로는 감히 임금의 엄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달성하게 하십시오.”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閒舊 疾之.
왕지기의 내제위국상 영지정사 어시 조신국척 위소이신간구 질지.
임금이 그 뜻을 알고, 곧 을파소를 국상으로 삼아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의 친척들은 을파소가 새로운 세력으로 옛 신하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왕유교왈 “무귀천 구불종국상자 족지” 소퇴이고인왈 “불봉시즉은 봉시즉사 사지상애 금상대아이후의 기가복념구은호”
임금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멸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둔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옛날의 은거를 생각하겠느냐!”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내이지성봉국 명정교 신상벌 인민이안 내외무사.
그리고는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凝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동시월 왕위안류왈 약무자지일언 고불능득파소이공리 금서적지응 자지공야 내배위대사자.
겨울 10월, 임금이 안류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나는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공적이 뭉쳐진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 이에 그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論曰 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苻堅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논왈 고선철왕지어현자야 입지무방 용지불혹 약은고종지전설 촉선주지공명 진부견지왕먕 연후현재위 능재직 정교수명이국가가보 금왕결연독잔 발파소어해빈 불요중구 치지백관지상 이우상기거자 가위득선왕지법의.
사관이 논평한다. 옛날의 밝은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정해진 방법을 따르지 않았고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에게, 촉(蜀)나라 선주(先主)는 공명(孔明)에게, 진(秦)나라 부견(苻堅)은 왕맹(王猛)에게 그러한 것이 이와 같다. 이러한 뒤에야 현명한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 있는 사람이 관직을 맡아 정치와 교화가 밝게 닦여서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임금이 결연히 혼자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그를 여러 관리의 윗자리에 두었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선왕의 법도를 얻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十六年 秋七月 隕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십육년 추칠월 운상살곡 민기 개창진급. 동시월 왕전우질양 노견돠이독자 문 “하이곡위” 대왈 “신빈궁 상이용력양모 금새부등 무소용작 불능득승두지식 시이곡이” 왕왈 “차호 고위민부모 사민지어차극 고지죄야“
16년(서기 194)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고 공급하여 구휼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갔다가 길에 앉아 우는 자를 보았다. 임금이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로다.”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小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급의식이존무지 잉명내외소사 박문환과고독노병빈핍불능자존가 구휼지. 명유사 매년자춘삼월지추칠월 출관곡 이백성가구다소 진대유차 지동시월환납 이위항식 내외대열.
임금은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그리고는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찾아 구휼하게 하였다. 또 관리들에게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청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있게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십구년 중국대란 한인피난랴투자심다 시한헌제건안이년야. 하오월 왕훙 장우고국천원 호위고국천왕.
19년(서기 197),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항복하여 오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때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천(故國川) 벌판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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