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大王
新大王 諱伯固(固 一作句) 太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 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菸支留與群公議 遣人迎致. 及至 菸支留跪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산대왕 휘백고(고 일작구) 태조대왕지계제 의표영특 성인노 초 차대왕무도 신민불친부 공유화란 해급어기 수둔어산곡 급차대왕피시 좌보어자류여군공의 견인영치 급기 어지류헌국새왈 “선군불행기구 수유자 불극유국가 부인지심 귀우지인 근배계수 청즉존위.” 어시 부복삼양이후즉위 시년칠십칠세.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은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막내 동생이다. 몸가짐과 태도가 뛰어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처음에 차대왕(次大王)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친근히 붙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화란이 생겨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산골짜기로 도망쳤었다. 차대왕이 피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맞이하게 하였다. 백고가 이르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면서 말하였다. “선왕이 불행하게 세상을 뜨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인자한 당신에게 돌아갔습니다.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오니 왕위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후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忝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群遠遯 洎聞凶訃 但極哀摧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眇末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淵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이년 춘정월 하령왈 “과인생첨왕친 본비군덕 향속우우지정 파괴이궐지모 외해난안 이군원둔 게문흉부 단극애최 이위백성악추 군공권진 류이묘말 거우숭고 불강황녕 여섭연해 의추은이급원 수여중이자신 가대사국내.”
2년(서기 166) 봄 정월, 임금이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 지난번에 형제 사이에 정권을 맡긴 것은 왕위를 물려주는 방법으로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해를 입을까 두려웠고 편안하기 어려워 여러 사람이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에 숨었었다. 선왕의 흉보를 듣고 극도의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 오늘 백성들이 나를 기꺼이 추대하며 여러 대신들이 왕위로 나아감을 권할 줄을 어찌 생각했겠느냐? 그릇되게도 보잘것없는 자격으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되니, 편하지 않고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먼 곳까지 미치게 해야 할 것이며, 대중들과 더불어 자신을 새롭게 하고 나라 안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할 것이다.”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抃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初 明臨答夫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 告曰 “嚮 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국인기문사령 무불환호경변 왈 “대재 신대왕지덕택야. 초 명림답부지난 차대왕태자추안도찬 급문사왕사령 즉기왕문 고왈 ”향 국유재화 신불능사 둔우산곡 금문신정 감이죄고 약대왕거법정죄 기지시조 유명시청 약사이불사 방지원방 즉생사골육지혜야 신소원야 비감망야.“
나라 사람들이 사면령을 듣고 모두 환호하며 손뼉을 치면서 말하였다. “크도다! 신대왕의 덕이!” 처음에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가 숨어 있었다. 새 임금의 사면령을 듣고 곧 궁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지난번 나라에 화가 있었을 때 신은 죽을 수 없어 산골짜기로 숨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의 죄를 말하겠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죄를 정하시어 저자 거리에 버리시는 분부라도 따르겠습니다. 만약 죽이지 않고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고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소원이나 감히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王卽賜狗山瀨婁豆谷二所 仍封爲讓國君 拜答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왕즉사구산뢰루두곡이소 잉대위양국군 배답부위국상 가작위패자 영지내외병마겸영양맥부락 개좌우보위국상 시어차.
임금은 곧 추안에게 구산뢰(狗山瀨)와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였다.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에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패자(沛者)로 삼아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맡게 하고, 겸하여 양맥(梁貊)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고쳐 국상으로 삼은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삼년 추구월 왕여졸본 사시조묘. 동시월 왕지자졸본.
3년(서기 167)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냈다.
겨울 10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菟.
사년 한현토군태수경림래침 살아군수백인. 왕자항걸속현토.
4년(서기 168), 한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해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임금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빌었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
오년 왕견대가우거주부연인등 장병조현토태수공손도 토부산적.
5년(서기 169), 임금이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팔년 동십일월 한이대병향아 왕문군신 전수숙변 중의왈 “한병시중경아 약불출전 피이아위겁수래 차아국산험이노애 차소위일부당관 만부막당자야 한병수중 무여아하 청출사어지.”
8년(서기 172) 겨울 11월, 한나라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나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병사들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볼 것이니, 만약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겁이 나서 그런 것이라 여겨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른바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당해낼 수 없는 곳입니다. 한나라 병사의 수가 비록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막기를 바랍니다.”
答夫曰 “不然 漢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답부왈 “불연 한 국대민중 금이강병원투 기봉불가당야 이우병중자의전 병소자의수 병가지상야 금한인천리전량 불능지구 약아심구고루 청야이대지 피필불과순월 기곤이귀 아이경졸박지 가이득지.”
명림답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강병을 이끌고 먼 곳에서 와서 싸우려 하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병사가 많은 나라는 싸워야 하고, 병사가 적은 나라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법가의 원칙입니다. 이제 한나라는 군량미를 천리 길이나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그들이 이용할 수 없도록 농작물을 모두 없애고 기다리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강한 병졸들이 따라붙어 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答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왕연지 영성고수 한인공지불극 사졸기아인환 답부수수천기박지 전어좌원 한군대패 사필불반. 왕대열 사갑부좌원급질산 위식읍.
임금이 그의 말에 수긍하여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병졸들이 굶주리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때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주었다.
十二年 春正月 群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爲王太子.
십이년 춘정월 군신청립태자. 삼월 입왕자남무위왕태자.
12년(서기 176) 봄 정월,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세울 것을 임금에게 간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다.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십사년 동시월병자회 일유식지.
14년(서기 178)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答夫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십오년 추구월 국상답부졸 년백십삼세 왕자임통 파조칠일 내이예장어질산 치수묘이십가. 동십이월 왕훙 장어고국곡 호위신대왕.
15년(서기 179) 가을 9월, 국상 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임금은 몸소 가서 애통해 하고 7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다. 질산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고,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곡(故國谷)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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