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祖大王
太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太后 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肖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嶷 以年七歲 太后垂簾聽政.
태조대왕(혹운국조왕) 휘궁 소명어수 율왕자고추가재사지자야. 모태후 부여인야. 모본왕후태자불초 부족이주사직 국인영궁계립 왕생이개목능시 유이기의 이년칠세 태후수렴청정.
태조대왕(혹은 국조왕 國祖王)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돌아가셨을 때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맡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환영하며 모본왕에 이어 임금으로 세웠다. 임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으며, 어려도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 蝗害穀.
삼년 춘이월 축요서십성 이비한병. 추팔월 국남 황해곡.
3년(서기 55) 봄 2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나라의 남쪽 지방에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사년 추칠월 벌동옥저 취기토지위성읍. 척경동지창해 남지살수.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七年 夏四月 王如孤岸淵 觀魚 釣得赤翅白魚. 秋七月 京都大水 漂沒民屋.
칠년 하사월 왕여고안연 관어 조득적시백어. 추칠월 경도대수 표몰민옥.
7년(서기 59) 여름 4월, 임금이 고안연(孤岸淵)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날개가 붉은 흰 물고기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다.
十年 秋八月 東獵 得白鹿. 國南 飛蝗害穀.
십년 추팔월 동렵 득백록. 국남 비황해곡.
10년(서기 62) 가을 8월, 동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冬十月 雷
십육년 추팔월 갈사왕손도두 이국래항 이도두위우태. 동시월 뢰.
16년(서기 68) 가을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무리와 함께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于台: 고구려 관직명으로 웃사람이라는 뜻)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다.
二十年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達賈 伐藻那 虜其王. 夏四月 京都 旱.
이십년 춘이월 견관나부패자달가 벌조나 노기왕. 하사월 경도 한.
20년(서기 72) 봄 2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집정관)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 伐朱那 虜其王子乙音 爲古鄒加.
이십이년 동시월 왕견환나부패자설유 벌주나 노기왕자을음 위고추가.
22년(서기 74) 겨울 10월, 임금이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일본어로 남아 부족장 정도의 의미)로 삼았다.
二十五年 冬十月 扶餘使來 獻三角鹿長尾兎 王以爲瑞物 大赦. 十一月 京都 雪三尺.
이십오년 동시월 부여사래 헌삼각록장미토 왕이위서물 대사. 십일월 경도 설삼척.
25년(서기 77)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임금은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도성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사십육년 춘삼월 왕동순책성 지책성서계산 획백록 급지책성 여군신연음 사책성수리물단유차 수기송어암 내환. 동시월 왕지자책성.
46년(서기 98) 봄 3월, 임금이 동쪽 책성(柵城)에 가는 도중 책성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겼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오십년 추팔월 견사안무책성.
50년(서기 102)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 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王遣將入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오십삼년 춘정월 부여사래 헌호 장장이 수색심명이무미 왕견장입한요동 탈략육현 태수경기출병거지 왕군대패. 추구월 경기격파맥인.
53년(서기 105)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색깔이 매우 밝고 꼬리가 없었다.
임금이 한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여 막으니 임금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五十五年 秋九月 王獵質山陽 獲紫獐.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
오십오년 추구월 왕렵질산양 획자장. 동시월 동해곡수헌주표 미장구척.
55년(서기 107) 가을 9월, 왕이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東海谷)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五十六年 春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오십육년 춘대한 지하적기 민기. 왕발사진휼.
56년(서기 108) 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말라 붉게 되었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五十七年 春正月 遣使如漢 賀安帝加元服.
오십칠년 춘정월 견사여한 하안제가원복.
57년(서기 109) 봄 정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安帝)의 원복을 주었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오십구년 견사여한 공헌방물 구속현토(통감언 “시년삼월 려왕궁야예맥 구현토” 부지혹구속 혹구야 억일오야)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 (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육십이년 춘삼월 일유식지. 추구월 왕순수남해. 동시월 지자남해.
62년(서기 114)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임금이 남해를 두루 돌아보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三月 日有食之. 冬十二月 雪五尺.
육십사년 춘삼월 일유식지. 동십이월 설오척.
64년(서기 116)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害穀. 八月 命所司 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육십일년 춘이월 지진. 하유월 왕여예맥습한현토 공화려성. 추칠월 황박해곡. 팔월 명소사 거현양효순 문환과고독급노불능자존자 급의식.
66년(서기 118) 봄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떼와 우박이 곡식을 상하게 했다.
8월, 해당 관청에 명하여 현량(현명하고 인품 좋은)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물어서 옷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육십구년 춘 한유주자사풍환현토태수요광요동태수채풍등 장병래침 격살예맥거수 진획병마재물 왕내견제수성 영병이천여인 약환광등 수성견사사항 환등신지 수성인거험이차대군 잠견삼천인 공현토요동이군 분기성곽 살획이천여인.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토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임금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는데 풍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마침내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隧縣 遼東太守蔡風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歿於陣. 死者百餘人.
하사월 왕여선비팔천인 왕공요대현 요동태수채풍 장병출어신창 전몰 공조연용용단병마연공손포 이신간풍 구몰어진 사자백여인.
여름 4월,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동시월 왕행부여 사태후묘 존문백성궁곤자 사물유차 숙신사래 헌자호구급백응백마 왕연노이견지.
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십일월 왕지자부여 왕이수성총군국사. 십이월 왕솔마한예맥일만여기 진위현토성 부여왕견자위구대 영병이만 여한병병력거전 아군대패.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와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칠십년 왕여마한예맥침요동 부여왕견병구파지(마한이백제온조왕이십칠년 멸 금여려왕행병자 개멸이부흥자여)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一年 冬十月 以沛者穆度婁爲左輔 高福章爲右輔 令與遂成參政事.
칠십일년 동시월 이패자목도루위좌보 고복장위우보 영여수성참정사.
71년(서기 123)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수성(遂成)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七十二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漢朝貢. 十一月 京都地震.
칠십이년 추구월경신회 일유식지. 동시월 견사입한조공. 십일월 경도지진.
72년(서기 124) 가을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八十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於是 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菸支留沸流那皂衣陽神等 陰謂遂成曰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欲使兄老弟及 今王旣已老矣 而無讓意 惟吾子計之” 遂成曰 “承襲必嫡 天下之常道也 王今雖老 有嫡子在 豈敢覬覦乎.” 彌儒曰 “以弟之賢 承兄之後 古亦有之 子其勿疑” 於是 左輔沛者穆度婁 知遂成有異心 稱疾不仕.
팔십년 추칠월 수성렵어왜산 여좌우연 어시 관나우대미유환나우대어지류비류나조의양신등 음위수성왈 초 모본지훙야 태자불초 군료욕립왕자재사 재사이노양자자 욕사형노재급 금왕기이노의 이무양의 유오자계지 수성왈 승룡필적 천하지상도애 왕금수노 유적자재 이감기유호 미유왈 이재지현 승형지루 고역유지 자기물의 어시 좌보패자목도루 지수성유이심 칭질불사.
80년(서기 132) 가을 7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와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와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남몰래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돌아가셨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임금이 이미 늙었으나 양보할 뜻이 없으니, 우리가 대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수성이 말하였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은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임금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탐내겠습니까?”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염두에 두지 말라.”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위 계승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개입하지 않았다.
八十六年 春三月 遂成獵於質陽 七日不歸 戱樂無度 秋七月 又獵箕丘 五日乃反 其弟伯固諫曰 “禍福無門 惟人所召 今子以王弟之親 爲百寮之首 位已極矣 功亦盛矣 宜以忠義存心 禮讓克己 上同王德 下得民心 然後富貴不離於身 而禍亂不作矣 今不出於此 而貪樂忘憂 竊爲足下危之” 答曰 “凡人之情 誰不欲富貴而歡樂者哉 而得之者 萬無一耳 今吾居可樂之勢 而不能肆志 將焉用哉” 遂不從.
팔십육년 춘삼월 수성렵어질양 칠일불귀 희락무도. 추칠월 우렵기구 오일급반 기제백고간왈 “화복무문 유인소소 굼저이왕제지친 위백료지수 위이극의 공역성의 의이충의존심 예양극기 상동왕벅 부득민심 연후부귀불리어신 이화란불작의 금불출어차 이탐락망우 절위족하위지.” 답왈 “범인지정 유불욕부귀이환락자재 이득지자 만무일이 금오거가락지세 이불능사지 장언 용재” 수불종
86년(서기 138) 봄 3월, 수성이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놀고 즐기기만 할 뿐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箕丘)에 사냥 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伯固)가 간언하였다. “화복(禍福)은 문이 없다.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 모든 관료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담고, 예절과 사양으로 욕망을 이기고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후에야 부귀가 형의 몸에서 떠나지 않고 환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즐거움을 탐하여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무릇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든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겠느냐?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나는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九十年 秋九月 丸都地震 王夜夢 一豹齧斷虎尾 覺而問其吉凶 或曰 “虎者 百獸之長 豹者 同類而小者也 意者王之族類 殆有謀絶大王之後者乎” 王不悅 謂右輔高福章曰 “我昨夢有所見 占者之言如此 爲之奈何” 答曰 “作不善 則吉變爲凶 作善 則災反爲福 今大王憂國如家 愛民如子 雖有小異 庸何傷乎”.
구십년 추구월 환도지진 왕야몽 일표치단호미 각이문기길흉 혹왈 호자 백수지장 표자 동류이소자야 의자왕지족류 이유모절대왕지후자호. 왕불열 위우보고복장왈 “아작몽유소견 점자지언여차 위지내하” 답왈 “작불선 즉길변위흉 작선 즉재반위복 금대왕우국여가 애민여자 수유소이 용하상호”
90년(서기 142) 가을 9월, 환도(丸都)에 지진이 났다. 임금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절단했다. 임금이 깨어서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짐승이다. 그 뜻은 아마도 임금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음모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왕이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어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복장이 대답하였다. “선하지 않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선한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일과 같이 걱정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九十四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謂左右曰 大王老而不死 吾齒卽將暮矣 不可待也 惟願左右 爲我計之 左右皆曰 敬從命矣 於是 一人獨進曰 向 王子有不祥之言 而左右不能直諫 皆曰敬從命者 可謂姦且諛矣 吾欲直言 未知尊意如何 遂成曰 子能直言 藥石也 何疑之有 其人對曰 今大王之賢 內外無異心 子雖有功 率群下姦諛之人 謀廢明上 此何異將以單縷 繫萬鈞之重而倒曳乎 雖復愚人 猶知其不可也 若王子改圖易慮 孝順事上 則大王深知王子之善 必有揖讓之心 不然則禍將及也 遂成不悅 左右妬其直 讒於遂成曰 “王子以大王年老 恐國祚之危 欲爲後圖 此人妄言如此 我等惟恐漏洩 以致患也 宜殺以滅口 遂成從之.
구십사년 추칠월 수성엽어왜산지하 위좌우왈 “대왕노이불사 오치즉장모의 불가대야 유고과우위아계지” 좌우개왈 “경종명의” 어시일인독진왈 “향 왕자유불상지언 이좌우불능직간 개왈경정명자 가위간차유의 오욕직언 미지존의여하”. 수성왈 “자능직언 약석야 하의지우” 기인대왈 “금대왕지현 내외무이심 자수유공 솔군하간유지인 모폐명상 차하이장이단루 계만균지중이도예호 수복우인 유지기불가야 약왕자개도역려 효순사상 즉대왕심지왕자지선 필유집양지심 불연즉 화장급야”. 수성불열 좌우투기직 참어수성왈 “왕자이대왕연노 공국조지위 욕위후도 차인망언여차 아등유공누설 이치환야 의살이멸구” 수성종지.
94년(서기 146) 가을 7월, 수성이 왜산(倭山) 아래서 사냥하면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들어가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생각해보라.” 근신들이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모두 말했다. 이때 한 사람이 혼자 나서서 말하였다. “지난번에 왕자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왕자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수성이 말하였다.“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과 침이 되는 것인데 어찌 의심하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 왕자께서는 비록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임금의 폐위를 위해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의 실로 만 균(鈞, 1균= 30근)의 무게를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왕자의 선함을 깊이 아시어 반드시 왕자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불쾌하게 여겼다. 근신들은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연로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질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령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에 근심을 초래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해야 합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冬十月 右輔高福章言於王曰 遂成將叛 請先誅之 王曰 吾旣老矣 遂成有功於國 吾將禪位 子無煩慮 福章曰 遂成之爲人也 忍而不仁 今日受大王之禪 則明日害大王之子孫 大王但知施惠於不仁之弟 不知貽患於無辜之子孫乎 願大王熟計之.
추팔월 왕견장 습한요동서안평현 살대방령 략득낙랑태수처자. 동시월 우보고복장언차왕왈 “수성장반 청선주지” 왕왈 “오기노의 수성유공어국 오장선위 자무번려” 복장왈 “수성지위인야 인이불인 금일수대왕지선 즉명일해대왕지손 대왕단지시혜어불인지제 부지이환어무고지자손호 원대왕숙계지.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겨울 10월, 우보 고복장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바라건대 먼저 그를 처형하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을 세웠다. 나는 수성에게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하였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오늘 대왕의 왕위를 받으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무고한 자손들에게 재앙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시니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十二月 王謂遂成曰 吾旣老 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其卽位 永孚于休 乃禪位 退老於別宮 稱爲太祖大王
시이월 왕위수성왈 오기노 권어만기 천지역수재여궁 황여내참국정 외총군사 구유사직지동 윤색신민지망 오소부탁 가위득인 작여기즉위 영부우휴 내선위 퇴노어별궁 칭위대조대왕.
12월, 임금이 수성에게 말했다. “나는 너무 늙어서 모든 일에 권태를 느낀다. 하늘의 운수가 너의 몸에 있고, 게다가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총괄하여 오랫동안 사직의 공로를 쌓았으며,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을 채워주었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너는 왕위에 올라 영원히 경사를 누릴 것이다!” 임금은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後漢書云 安帝建光元年 高句麗王宮死 子遂成立 玄菟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 宮前桀黠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吊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案海東古記 高句麗國祖王高宮以後漢建武二十九年 癸巳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 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則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則漢書所記 與古記抵捂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
(후한서운 안제건광원년 고구령왕궁사 자수성립 현토태수요광상언 욕인기상 발병격지 의자개이위가허 상서진충왈 “궁전걸힐 광불능토 사이격지 비의야 의견조문 인책양전죄 사불가주 취기후선 안제종지 명년 수성환한생구 안해동고기 고구려국조왕고궁이후한건무이십구년 계사즉위 시년칠세 국모섭정 지효환제본초원년병술 손위양모재슈성 시궁년일백세 제위구십사년 즉건광원년 시궁재위 육십구년 즉한서소가 여고기저오불상부합 이한선소기오야)
(후한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서기 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현도 태수 요광이 안제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죽은 것을 계기로 삼아 병사를 출동하여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의논하던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전에는 궁이 뛰어나고 영리하여 요광이 궁을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예전의 죄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7세여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서기 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고 하니,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에 해당한다. 즉 한서에 적힌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달라 합치되지 않는다.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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