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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第二- 大武神王


大武神王

 

大武神王立[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 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대무신왕립(혹운대해주류왕) 휘무휼 유리왕제삼자 생이총혜 장이웅걸유대략 유리왕재위삼십삼년 갑술 입위태자 시년실일세 지시즉위 모송씨 다물국왕송양녀야.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 大解朱留王) 그의 이름은 무휼(無恤)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장성해서는 호걸의 풍모에 큰 지략을 지녔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서기 14)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유리왕이 죽자,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松氏)이니, 다물국(多勿國)왕 송양(松讓)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이년 춘정월 경도지 대사 백제민일천여호래투.

 

2(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駏䮫.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 扶餘人得此烏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群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帶素聞之 驚悔.

삼년 춘삼월 입동명왕묘. 추구월 왕전골구천 득신마 명거려. 동시월 부여왕대소션사송적오일두이신 초 부여인득차오헌지왕 혹왈 오자흑야 금변이위적 우일두이신 병이국지징야 왕기겸고구려호 대소희송지 겸역혹자지언 왕여군신의답왈 흑자 북방지색 금변이위남방지색 우적오서물야 군득이불유지 이송어아 양국존망 미가지야대소문지 경회.

 

3(서기 20) 3,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웠다.

가을 9, 왕이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거려(駏䮫)라고 이름 지었다. 겨울 10,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통해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말하였다.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임금께서는 아마도 고구려를 차지하시는가 봅니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알려 주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우리 두 나라의 존망을 아직 알 수 없겠구나.” 대소는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 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舁鼎游戲.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사년 동십이월 왕출사 벌부여 타비류수상 망견수애 약유여인 여정유희 취견지 지유정 사지취 부대화자열 인득작식 포일군.

 

4(서기 21) 겨울 12, 임금이 군대를 출동시켜 부여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沸流水) 가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임금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이로 인해 밥을 지을 수 있어서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홀유일장부왈 시정오가물야 아매실지 왕금득지 청부이종 수사성부정씨.

 

이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으로 제 누이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임금께서 찾았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임금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 임금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 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저이리립숙 야문금성. 양명 사인심지 득슴새병물등 왈 천사야 배수지.


임금이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살피다가 금으로 만든 옥새와 무기 등을 얻고 임금이 말하길 이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며 공손히 받았다.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王又許之.

상도유일인 신장구척허 면백이목유광 배왕왈 신시북명인괴유 절문대왕북벌부여 신청정행취부여왕두왕열허지 우유린왈 신적곡인마려 청이장모위도왕우허지.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났다. 그는 임금에게 절을 하며 말하길 저는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오니, 제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임금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저는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임금은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오년 춘이월 왕진군어부여국남 기지다니도 왕사택평지위영 해안휴졸 무공구지태 부여왕거국출전 욕엄기불비 책마이전 함녕불능진퇴.

 

5(서기 22) 2, 임금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았으므로 임금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들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동안 불시에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말을 급히 몰아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다.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扶餘人 旣失其王 氣力摧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왕어시휘괴유 괴유벌검호후격지 만군피미 불능지 직진집부여왕 참두 부여인 기실기왕 기력최절 이유부자굴 위수중 왕이양진사기 우구부지소위.

이때 괴유가 임금의 지시로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명의 군사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달려가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게 되자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乃乞靈於天 忽大霧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 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내걸영어천 몰대무지척불변인물칠일 왕령작초우인 집병립영내외 위의병 정간도잠군야출 실골구천신마 비류원대정 지이물림 병기불흥 복야수이급식.

 

임금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갑자기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임금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고, 허수아비에게 무기를 들려 군영 안팎에 세워놓아 병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그리고 사잇길을 따라 은밀하게 행군하여 밤에 탈출하였다. 하지만 골구천에서 얻은 신마와 비류수 가에서 얻은 큰 솥을 잃어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병사들이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자 들짐승을 잡아 먹였다.

 

王旣至國 乃會群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왕기지국 내회군신음지왈 고이부덕 경벌부여 수살기왕 미멸기국 이우다실아군자 차고지과야수친조사문질 이존위백성 이시국인감왕덕의 개허살신어국사의.

 

임금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종묘에 아뢰고 잔치를 베푸는 음지(飮至: 승전후 조상에 아뢰고 잔치하는)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말하길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지만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곧이어 전사자를 직접 조문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임금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하여 모두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三月 神馬駏䮫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淥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삼월 신마거려장부여마백필 구지학반령하거회곡. 하사월 부여왕대소제 지갈사수빈 입국칭왕. 시부여왕금와계자 사실기명 초 대소지견살야 지국지장망 여종자백여인 지압록곡 견해두왕출렵 수살지 취기백성 지차시도 시위갈사왕.

 

3, 신비로운 말 거려가 부여의 말 백 필을 거느리고 학반령(鶴盤嶺) 아래 거회곡(車廻谷)에 왔다.

여름 4,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가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海頭國)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아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曷思王)이다.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추칠월 부여왕종재 위국인왈 아선왕신망국멸 민무소의 왕제도찬 도어갈사 오역불초 무이흥복내여만여인내투 왕봉위왕 안치연나부 이기배유낙문 사성낙씨. 동시월 괴유졸 초질혁 왕친임존문 괴유언 신북명미천지인 누몽후은 수사유생 불강망보”. 왕선기언 우이유대공노 장어북명산양 명유사이시사지.

 

가을 7, 부여왕의 종제(從弟, 사촌동생)가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길 우리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 왕의 동생은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 역시 어질지 못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마침내 1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해오니 임금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에 낙() 무늬가 있다 하여 낙씨(絡氏)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겨울 10, 괴유가 죽었다. 앞서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임금이 직접 가서 문병을 하였다. 그때 괴유가 말하였다.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사오니 은혜에 대한 보답을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그에게 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 지내고, 담당 관리를 시켜 철따라 제사 지내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 爲右輔 委以軍國之事.

팔년 춘이월 배을두지 위우보 위이군국지사.

 

8(서기 25) 2,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구년 동시월 왕친정개마국 살기왕 위안백성 모노략 단이기지위군현. 십이월 구다국왕문개마멸 구해급기 거국래항 유시척지침광.

 

9(서기 26) 겨울 10, 임금은 직접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다. 하지만 그곳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자기 군사들에게 노략질하지 않도록 하였다. 다만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삼았다.

12, 구다국(句茶國)왕이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爲左輔 松屋句爲右輔.

십년 춘정월 배을두지위좌보 송옥구위우보.

 

10(서기 27)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群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십일년 추칠월 한요동태수장병래벌 왕회군신 문전수지계 우보송옥구왈 신문시덕자창 시력자망 금중국황검 도적봉기 이출병무명 차비군신정책 필시변장규리 천침오방 역천위인 사필무공 빙험출기 파지필의

 

11(서기 28) 가을 7, 한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제가 듣기로는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런 명분도 없이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이는 왕과 신하들이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필시 변방의 장수가 이익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무단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들의 군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기묘한 계책을 낸다면 적을 반드시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王曰 謀伐若何”.

좌보을두지왈 소적기장 대적지금야 신도대왕지병 숙여한병지다 가이모벌 불가역승왕왈 모벌약하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강병이라 할지라도 수가 적으면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가 대왕의 병사와 한나라 병사 중에 어느 편이 많은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계책으로 그들을 칠 수 있을지언정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임금이 묻길 계책으로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대왈 금한병원투 기봉불가당야 대왕폐성자고 대기사노 출이격지 가야.

 

을두지가 대답하여 말하였다.“지금 한나라 병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의 예봉이 무뎌지기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왕연지 입위나엄성 고수수순 한병위불해 왕이역진병피 위두지왈 세불능수 위지내하?”

 

임금이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에 들어가서 수십 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병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임금은 우리의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해졌으므로 을두지에게 일러 말하였다.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두지왈 한인위아암석지지 무수천 시이장위 이대오인지곤 의취지중리어 포이수초 겸지주약간치호한군.


을두지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왕종지 이서왈 과인우매 획죄어상국 치영장군수백만지군 폭로폐경 무이장후의 첩용박물 치공어좌우.


임금이 을두지의 말에 따라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지어, 장군에게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황폐한 땅에서 비바람을 맞게 하였습니다. 장군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보잘 것없는 물건이나마 장군의 부하들에게 보냅니다.”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遂引退.

어시 한장위성내유수 불가졸발 내보왈 아황제불이신노 하령출사 문대왕지죄 급경유순 미득요령 금문래지 언순처공 감불자구이보황제수인퇴.

 

이에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빠른 시간 내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회답을 보내 말하였다. “우리 황제께서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내라는 명령을 내려 대왕의 죄과를 묻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국경에 온 지 열흘이 넘도록 요긴한 대책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보내온 편지를 보니 말이 순리에 맞고 공손하니, 내가 황제에게 감히 이 말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십삼년 추칠월 매구곡인상수 여기제위수급당제우도등래투.

 

13(서기 30) 가을 7,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의 아우 위수(尉須) 및 사촌 우도(于刀)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십사년 동십일월 유뢰 무설.

 

14(서기 31) 겨울 11, 우레가 치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怨. 王聞之 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십오년 춘삼월 출대신구도일구분구등삼인위서인. 차삼인위비류부장 자탐비 탈인처첩우마재화자기소욕 유불여자즉편지 인개분원. 왕문지 욕살지 이동명구신 불인치극법 출퇴이이.

 

15(서기 32) 3,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구(焚求) 등의 세 사람을 축출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했다. 이 세 사람은 비류(沸流)의 부장(部長)으로 있었는데,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소, ,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었다. 만약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며 원망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축출한 것이다.

 

遂使南部使者鄒勃素 代爲部長 鄒勃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儕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

수사남부사자추발소 대위부장 추발소기상임 별작대실이처 이구도등죄인 불령승당 구도등지번 고왈 오제소인 고범왕법 불승괴회 원공사과 이영자신 즉사무한의

 

그리고 곧 남부사자(南部使者) 추발소(鄒勃素)를 보내어 그들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하였다. 추발소가 부임한 후,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등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하였다. “우리들은 소인인 탓에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데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 죄를 깨끗히 해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鄒勃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추발소인상지 공좌왈 인불능무과 과이능개 즉선막대언내여지위우 구도등감괴 불복위악.

추발소가 그들을 이끌어 오르게 하여 같이 앉아서 말하였다.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하고서 고칠 수만 있다면 착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추발소는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은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王聞之曰 鄒勃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賜姓曰大室氏.

왕문지왈 추발소불용위엄 능이지징악 가위능의사성왈대실씨.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추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바로잡았으니 유능하다고 할 만하다.” 이에 추발소에게 대실씨(大室氏)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遂同歸 以女妻之 後 好童還國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하사월 왕자호동 유어옥저 낙랑왕최리출행 인견지 문왈 관군안색 비상인 이비북국신왕지자호수도우기 이녀처지 후 호동환국잠견인 고최씨녀왈 약능입이국무고 할파고각 즉아이예영불녀즉부

 

여름 4,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혼례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 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선시 낙랑유고각 약유적병 즉가명 고령파지 어시 최녀장리도 잠입고중 할고각면각구 이보호동 호동권왕습낙랑 최리이고각불명 불비 아병엄지성하 연후지고각개파 수살여자 출항(혹운 욕멸낙랑 수청혼 취기녀 위자처 후사귀본국 괴기병물)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동십일월 왕자호동자살 호동 왕지차비갈사왕손녀소생야 안용미려 왕심애지 고명호동 원비공탈적위태자 내참어왕왈 호동불이예대첩 시욕난호

 

겨울 11,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임금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曷思王)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서 임금이 매우 사랑했으므로 이름을 호동이라고 지었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적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임금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저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자못 음행하려 합니다.”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왕왈 약이타아증질호 비지왕불신 공화장급 급체읍이고왈 청대왕밀후 약무차사 첩자복죄

임금이 대답하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임금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장차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몰래 엿보소서. 만약 그와 같은 일이 없다면 제가 죄에 대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乃伏劍而死.

어시 대왕불능불의 장죄지 혹위호동왈 자하불자석호답왈 아약석지 시현모지악 이왕지우 가위효호내복검이사.

 

결국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요,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瞽瞍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논왈 금왕신참언 살무고지애자 기불인부족도의. 이호동부득무죄 하즉 자지견책어기부야 의약순지아고수 소장즉애 대장즉주 기불함부어불의 호동부지출어차 이사비기사 가위집어소근이매어대의 기공자신생지비야.

 

사관이 논평한다.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에는 마땅히 아들인 순()임금이 아버지인 고수(瞽瞍)에게 했던 것과 같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을 할 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다. 이는 작은 일을 삼가는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운 것으로, 옛날의 공자(公子) 신생(申生)의 죽음에 비유할 만하다.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武帝復其王號 是建武八年也.

십이월 입왕자해우위태자 견사입한조공 광무제복기왕호 시건무팔년야.

 

12,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삼았다.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光武帝)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이십년 왕습낙랑 멸지.

 

20(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이십사년 춘삼월 경도우박. 추칠월 운상살곡. 팔월 매화발.

 

24(서기 41) 3, 서울에 우박이 떨어졌다.

가을 7,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 매화가 피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이십칠년 추구월 한광무제견병도해 벌낙랑 취기지 위군현 살수이남속한.

 

27(서기 44) 가을 9,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동시월 왕훙 장어대수촌원 호위대무신왕.

 

겨울 10,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를 대수촌(大獸村)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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