瑠璃明王
瑠璃明王立 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蒙歸後乃生 是爲類利.
유리명왕립 유리 혹운유류 주몽원자 모예씨 초 주몽재부여 취예씨녀유신 몽귀후내생 시위유리.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다.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禮)씨이다. 맨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성을 가진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임신이 되었다. 그 여자는 주몽이 떠난 후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이다.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유년 출유맥상 탄작오차급수부인와기 부인매왈 “차아무부 고완여차”
유리가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노는구나.” 하니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유리참 귀문모씨 “아부하인 금재하처” 모왈 “여부비상인야 불견용어국 도귀남지 개국칭왕 귀시위여왈 ‘여약생남자 즉언아유유물 장재칠능석상송하 약능득차자 내오자야’”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라서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실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남긴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칠각형의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요.’라고 하셨다.”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 句鄒 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문지 내왕산곡 색지부득 일단재당상 문주초간약유성 취이견지 초석유칠능 내수어주하 득단검일단 추지지여옥지 구추 도조등삼인 행지졸본 견부왕 이단검봉지 왕출기소유단검 합지 연위일검 왕열지 입위태자 지시계위.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앉아 있다가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의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임금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임금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이년 추칠월 납다물후송양지녀위비. 구월 서수획백장. 동시월 신작집왕정 백제시조온조립.
2년(기원전 18) 가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9월,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신령한 새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
이 해에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七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 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삼년 추구 작이궁어골천. 동시월 왕비송씨훙 왕경취이녀이계실 일왈화희 골천인지여야 일왈치희 한인지녀야. 이녀쟁총 불상화 왕어양곡조동서이궁 각치지. 후 왕전어기산 칠일불반 이녀쟁투 화희매치희왈 “여한가비첩 하무례지심호” 치희참한망귀. 왕문지 책마추지 치희노불환 왕상식수하 견황조비집 내감이가왈 “편편황조 자웅상의 염아지독 수기여귀.”
3년(기원전 17) 가을 7월, 골천(鶻川)에 별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돌아가셨다. 임금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삼았다. 한 사람은 화희(禾姬)로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稚姬)인데 한나라 여자다. 두 여자는 서로 총애를 다투어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은 양곡(凉谷)에 동쪽과 서쪽에 두 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는 서로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하였다. “너는 한(漢)나라 집안의 천한 계집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렇게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도망쳐 돌아갔다. 임금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화를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임금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그 느낌을 노래하였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십일년 하사월 왕위군신 선비시험 불아화친 이즉출초 불리즉입수 위국지환 약유인능절차자 아장중상지.
11년(기원전 9)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자리만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부분노진왈 선비험고지국 인용이우 난이역투 역리모굴 왕왈 연즉위지내하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하였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로,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임금이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답왈 의사인반간인피 위설 아국소이병약 겁이난동 즉선비필이아 불위지비 신사기극 솔정병종간로 의산립이망기성 왕사인리병출기성남 피필공성이원추지 신이정병주입기성 왕친솔용기협격지 즉가극의.
부분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왕종지 선비과개문출병추지 부분노장병구입기성 선비망지 대경환분 부분노당관거전 참살심다. 왕거기명고이전 선비수미수적 계궁력굴 항위속국 왕념부부노공 상이식읍 사왈 “차왕지덕야 신하공언 수불수” 왕내사황금삼십근 양마일십필.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임금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라면서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이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십삼년 춘정월 형혹수심성,
13년(기원전 7) 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십사년 춘정월 부여왕대소견사래빙 청교질자 왕탄부여강대 욕이태자도절위질 도절공불행댜소에지. 동시월 대소이병오만래침 대설인다동사 내거.
14년(기원전 6) 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인질 교환을 청하였다. 임금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리며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화를 냈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이끌고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곧 돌아갔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 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 斯卑爲祟 王使謝之 卽愈.
십구년 추팔월 교시일 왕사탁리 사비추지 지장옥택중득지 이도단기각근 왕문지노왈 “제천지생 이가상야? 수투이인갱중살지. 구월 왕질병 무왈 택리 사비위수 왕사사지 즉유.
19년(기원전 1) 가을 8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長屋) 늪 가운데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낼 제물에 어떻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임금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임금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길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다.” 임금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니 곧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이십년 춘정월 태자도절졸.
20년(서기 1)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 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 養之 返見王 曰 臣逐豕 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이십일년 춘삼월 교시일 왕명장생설지 축지 지국내위나암득지 구어국내인가 양지. 반견왕 왈 신축시 지국내위나암 견기산수심험 지의오곡 우다미록어별지산 왕약이도 즉불유민리지무궁 우가면병혁지환야. 하사월 왕전루위중림. 추팔월 지진. 구월 왕여국내 관지세 환지사물택 견일장부좌택상석 위왕왈 “원위왕신” 왕희허지 인사명사물 성위씨.
21년(서기 2) 봄 3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희생(犧牲)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돼지를 찾아서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고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임금을 뵙고 말하였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산수가 깊고 험한데다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4월, 임금이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났다.
9월, 임금은 국내로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오다가 사물(沙勿) 못에 이르렀다. 한 장부가 연못 가운데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임금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임금은 기뻐하면서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이십이년 동시월 왕천도어국내 축위나엄성. 십이월 왕전우질산음 오일불반 대보협보간왈 “왕신이도읍 민불안도 의자자언 형정지시휼 이불념차 치빙전렵 구이불반 약불개과자신 신공정황민산 선왕지업 추지. 왕문지 진노 파협보직 비사관원 협보분거지남한.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 爲太子 大赦國內.
이십삼년 춘이월 립왕자해명 위태자 대사국내.
23년(서기 4) 봄 2월,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俾尙王女.
이십사년 추구월 왕전우기산지야 득이인 양액유익 등지조사성우씨 비상왕녀.
24년(서기 5) 가을 9월, 임금은 기산(箕山)의 들판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羽氏)라는 성을 내려주고, 임금의 딸에게 장가를 들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이십칠년 춘정월 왕태자해명재고도. 유력이호용 황룡국왕문지 견사이강궁위증.
27년(서기 8)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은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맹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억센 활을 선물로 주었다.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해명대기사자 만이절지왈 “비여유력 궁자불경이 황룡왕참 왕문지노 고황룡왈 해명위자불효 청위과인주지.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말하였다.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하다.” 황룡왕은 부끄럽게 여겼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말하였다.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바라건대 나를 위해 죽여 버리시오.”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 曰 今隣國無故請見 其意不可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삼월 황룡왕견사 청태자상견 태자욕행 인유간자 왈 금인국무고청견 기의불가측야 태자왈 천지불욕살아 황룡왕기여아하 수행 황룡왕시모살지 금견불감가해 예송지.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간하여 말하길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 없이 만나기를 바라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에 태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왕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마침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 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隣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이십팔년 춘삼월 왕견인 위해명왈 “오천도 욕안민이고방업 여불안수 이시강력 결원어인국 위자지도 기약시호.”
28년(서기 9) 봄 3월, 임금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위업을 다지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느냐?”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내사검사자재 태자즉욕자살 혹지지왈 “대왕장자이졸 태자정당위후 금사자일지이자살 언지기비사호?”
그리고는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자 어떤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임금의 사자가 한번 와서 말한 것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太子曰 嚮 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 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태자왈 향 황룡왕이강궁유지 아공기경아국가 고만절이보지. 불의견책어부왕 금부왕이아위불효 사검자재 부지명 기가도호 냐왕여진동원 이창삽지 주마촉지이사.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時年 二十一歲 以太子禮 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시년 이십일세 이태자례 장어동원 입묘 호기지위창원.
마침내 태자는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두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스스로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원(東原)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세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고 불렀다.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논왈 효자지사친야 당불리좌우이치효 약문왕지위세자 해명재오별도 이호용문 기어득죄야 의의. 우문지 전왈 애자교지이의방 불납어사 금왕 시미상교지 급기악성 질지이심 살지이후이 가위부불효 자불자의.
사관이 논평한다.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여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용맹한 것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전하여 오는 말에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임금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죄악을 짓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는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年)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추구월 부여왕대소사래양왕왈 “아선왕 여선군동명왕상호 이유아신도지차 욕완취이성국가 부국유대소 인유장유 이소사대자 예야. 이유사장자 순야. 금왕약능이예순사아 즉천필우우지 국조영종 불연즉용보기사직 난의”
(15년) 가을 8월, 부여 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임금을 꾸짖으며 말하길 “우리 선왕과 그대의 선왕 동명왕(東明王)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이르도록 유인하는 것은 나라의 모든 사람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대개 나라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임금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우리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効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어시 왕자위 입국일천 민잔병약 세합인치굴복 이원부효 내여군신모 보왈 “과인벽재해우 이문예의 금승대왕지교 감불유명지종”.
이에 임금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당하다.’고 하고, 여러 군신들과 상의하여 부여왕에게 “과인은 바닷가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답하였다.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시 왕자무휼 년상유소 문왕욕보부여언 자견기사왈 “아선조신령지손 현이다재 대왕질해 참지부왕 욕지이목마 고불안이출 금대왕불념전건 단시병다 경멸아방읍 청사자 귀보대왕 금유누란어차 약대왕불훼기란 즉신장사지 불연즉부”.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이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扶餘王聞之 徧問群下 有一老嫗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부여왕문지 편문군하 유일노구대왈 누란자위야 불훼기란자안야. 기의왈 왕부지기위 이욕인지래 부지역위이한이자리야.
부여왕이 그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그 뜻을 두루 물으니 한 노파가 대답했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태로운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노파의 뜻은 곧 왕이 자신에게 온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는 위기를 만들지 말고 안전한 것을 택하여 스스로 자기 나라를 먼저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이십구년 하유월 모천상유흑와여적와군투 흑와불승 사 의자왈 ‘흑 북방지색 북부여파멸지징야’. 추구월 작이궁어두곡.
29년(서기 10) 여름 6월, 모천(矛川)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를 지어 싸웠다.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을 보고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北扶餘)가 파멸할 징조이다.”말하였다.
가을 7월, 두곡(豆谷)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삼십일년 한왕분발아병 벌호 오인불욕행 강박견지 개망출새 인범법위구 요서대윤전담츠격지위소살 주군귀구어아 엄우진언.
31년(서기 12) 한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의 주(州)ㆍ군(郡)에서는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맥인범법 의영주군 차위안지 금외피이대죄 공기수반 부여지속 필유화자 흉노미극 부여 예맥복기 차대우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ㆍ군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왕분불청 조우격지 우유아장연비 참지 전수경사(양한서급남북사개운 유구려후추참지) 분열지 경명오왕위하구려후 포고천하 영함지언 어시 구한변지 유심.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서울로 보냈다.(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삼십이년 동십일월 부여인래침 왕사자무휼 솔사어지 무휼이병소 공불능적 설기계 친솔군 복우산곡이대지 부여병직지학반령하 복병발 격기불의 부여군대패 기마등산 무휼종병진살지.
32년(서기 13)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菟郡).
삼십삼년 춘정월 입왕자무휼위태자 위이군국지사. 추팔월 왕명오이 마리 영병이만 서벌양멕멸기국 진병습취한고구려현(현속현토군).
33년(서기 14)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토군(玄菟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 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瑠璃明王.
삼십사년 하사월 왕자여진 익수사. 왕애통 사린구시 부긋 후비류인제수득지 이문 수이예장어왕골령 사제수슴십근 전십경. 추칠월 왕행두곡. 동시월 훙어두곡이굴 장어두곡동원 호위 유리명왕.
37년(서기 18) 여름 4월,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알렸다.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임금이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두곡의 이궁에서 돌아가셨다.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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