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川王
美川王(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西川王之子古鄒加咄固之子. 初 烽上王疑弟咄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始就水室村人陰牟家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 蛙鳴 使乙弗夜投瓦石 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미천왕(일운호양왕) 휘을불(혹운우불) 서천왕지자고추가돌고지자. 초 봉상왕의제돌고유이심살지. 자을불외해출둔. 시취수실촌인음모자용작 음모부지기하허인 사지심고, 시가측초택 와명 사을불야투와석 금기성 주일독지초채 불허잠식.
미천왕(美川王 혹은 호양왕 好壤王)의 이름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 憂弗)이고, 서천왕(西川王)의 아들인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烽上王)은 그의 동생 돌고가 반역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였는데,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매우 고된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을불을 시켜 개구리소리가 나지 않도록 밤에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도록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不勝艱苦 周年 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淥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嫗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嫗恨恚 潛以屨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嫗追索之 誣以廋屨 告鴨淥宰 宰以屨直 取鹽與嫗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불승난고 주년 내거 여동촌안재모판염 승주저압록 장염하기강동사수촌인가 기가노구청염 허지두허 재청불여 기구한에 잠이복치지염중 을불부지 부이상도 구추색지 무이수리 고랍록재재이구치 취염여구 결태방지 어시 형용고고 위상염루 인견지 부지기위왕손야.
을불은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일 년 만에 그 집을 떠나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을 팔았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고 강의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지냈다. 그 집의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정도 주었더니, 그 노파가 다시 요구하므로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원한을 품어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은 이를 알지 못하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고는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꾸며서 압록의 관리에게 고발하였다. 관리는 신발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을 태형후 방면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복장이 남루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를 보고도 왕손임을 알지 못했다.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 見一丈夫在舡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 就而拜之曰 “今國王無道 國相與群臣陰謀 廢之 以王孫操行儉約 仁慈愛人 可以嗣祖業 故遣臣等奉迎.”
시시 국상창조리장폐왕 선견북부조불동부소우등 물색방을불어산야 지비류하변 견일장부재강상 수형모초췌 이동지비상 소우등의시을불 취이배지왈 “금국왕무도 국상여군신음모 폐지 이왕송도행검약 인자애인 가이사조업 고견신등봉영.”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위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형색은 여위고 파리하였으나 행동거지가 평범하지 않았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생각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였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임금을 폐위하려고 몰래 계획하고 있습니다. 국상은 왕손께서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하여, 일부러 저희들을 보내 받들어 맞아오게 한 것입니다.”
乙弗疑曰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蕭友等曰 “今上 失人心久矣 固不足爲國主 故群臣望王孫甚勤 請無疑.”
을불의왕 “여야인 비왕손야 청경심지” 소우등왈 “금상 실인심구의 고부족위국왕 고군신망왕손심근 청무의.”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였다. “나는 야인이요,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살펴보시오.” 소우 등이 말하였다.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해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遂奉引以歸 助利喜 致於烏陌南家 不令人知. 秋九月 王獵於侯山之陰 國相助利從之 謂衆人曰 “與我同心者 効我.”
수봉인이귀 조리희 치어오맥남가 불영인지. 추구월 왕렵어휴산지음 국상조리종지 위중인왈 “여아동심자 효아.”
그들은 마침내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오맥(烏陌) 남쪽 집에 모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후산(侯山)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창조리가 따라갔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와 뜻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乃以蘆葉揷冠 衆人皆揷之. 助利知衆心皆同 遂共廢王 幽之別室 以兵周衛 遂迎王孫 上璽綬 卽王位.
내이로엽삽관 중인개삽지. 조리지중심개동 수동폐왕 유지별실 이병주위 수영왕손 상새수 즉욍위.
창조리가 갈대 잎을 관에 꽂자, 여러 사람들도 모두 갈대 잎을 꽂았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위하여 별실에 가두고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을 지키게 하였다. 왕손을 맞아 옥새와 인끈을 바쳐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冬十月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 十二月 星孛于東方.
동시월 황무사색. 십일월 풍종서북래 비사주석육일. 십이월 성패우동방.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 동안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렀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삼년 추구월 왕솔병삼만 침현토군 노획팔천인 이지평양.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십이년 추구월 견장습취요동서안평.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취했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십사년 동시월 침낙랑군 노획남여이천여구.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십오년 춘정월 입왕자사유위태자. 추구월 남침대방군.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십육년 춘이월 공하현토성 살획심중. 추팔월 성패우동북.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使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 三國進攻棘城 廆閉門自守 獨以牛酒 犒宇文氏 與國疑宇文氏與廆有謀 各引兵歸.
이십년 동십이월 진평주자사최비래분. 초 최비음설아급단씨우문씨 사공공모용외. 삼국진공극성 외폐문자수 독이우주 고우문씨 여국의우문씨여외유모 각인병귀.
20년(서기 319)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使) 최비(崔毖)가 도망쳐왔다. 예전에 최비는 은밀히 우리와 단씨(段氏)ㆍ우문씨(宇文氏)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자, 모용외는 문을 닫고 지키면서 우문씨에게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함께 은밀한 계획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우문대인실독관왈 “이국수귀 오당독취지.”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였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극성을 빼앗을 것이다.”
廆使其子皝與長史裴嶷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 廆臨之以兵 燾懼首服 廆迺遣燾歸 謂毖曰 “降者 上策 走者 下策也.”
외사기자황여장사배억 장정예위전봉 자장대병계지 실독관대채 근이신면 최비문지 사기형자도지극성위하 외임지이병 도구수복 외내견도귀 위비왈 “봉자 상책 주자 하책야.”
모용외가 그의 아들 황(皝)에게 장사(長史) 배억(裴嶷)과 함께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병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했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병사를 세워 놓고 도를 대하니, 도는 두려워 머리를 숙이고 사실을 말했다. 모용외는 곧 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말하였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요,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廆 廆以其子仁 鎭遼東官府 市里案堵如故.
인병수지 비여수십기 기가래분 기중실항어외 외이기자인 진요동관부 시리안도여고.
모용외는 병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나라로 도망쳐왔고, 그 무리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인(仁)에게 요동을 진정시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我將如孥據于河城 廆遣將軍張統掩擊擒之 俘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廆遣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아장여나거우하성 외견장군장통암격금지 부기중천여가 귀우극성 왕수견병구요동 모용외견모용헌모용인 벌지. 왕구맹 한인내환.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을 막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동맹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곧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이십일년 동십이월 견병구요동 모용인거전파지.
21년(서기 320) 겨울 12월,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 우리가 패하였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楛矢.
삼십일년 견사후조석륵 치기호시.
31년(서기 330),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楛矢,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를 주었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삼십이년 춘이월 왕훙. 장어미천지원 호왈미천왕.
32년(서기 331) 봄 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미천(美川) 벌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美川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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