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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八 -孝昭王


孝昭王

 

孝昭王立 諱理洪[一作恭] 神文王太子 母 姓金氏神穆王后 一吉飡金欽運[一云雲]女也. 唐則天遣使吊祭 仍冊王爲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雞林州都督 改左右理方府 爲左右議方府 理犯諱故也

효소왕립 휘리홍(일작홍) 신문왕태자 모 성김시신목황후 일길찬심흠운(일운운)여야. 당측천견사조제 잉책왕위신하왕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 개좌우리방부 위좌우의방부이범위고야.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理洪)[또는 공()이라고 한다.]이며, 신문왕(神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신목왕후(神穆王后)인데, 일길찬 김흠운(金欽運)[또는 운()이라고 한다.]의 딸이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고, 이어 임금을 신라왕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雞林州都督)으로 책봉하였다.

좌우리방부(左右理方府)를 고쳐 좌우의방부(左右義方府)라 하였다. ‘()’란 글자가 임금의 이름자와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元年 八月 以大阿飡元宣爲中侍 高僧道證自唐廻 上天文圖

원년 팔월 이대아찬원선위중시 고승도증자당회 상천문도

 

원년(서기 692) 8,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바쳤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以文穎爲上大等. 金仁問在唐卒 年六十六. 冬 築松岳牛岑二城.

삼년 춘정월 친사신궁 대사 이문영위상대등. 김인문재당졸 년육십육. 동 축송악우잠이성.

 

3(서기 694)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文穎)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이 해 겨울, 송악(松岳)과 우잠(牛岑)의 두 성을 쌓았다.

 

四年 以立子月爲正. 拜愷元爲上大等. 冬十月 京都地震 中侍元宣退老 置西南二市.

사년 이립자월위정 배새원위상대등 동시월 경도지진 중시원선퇴노 치서남이시.

 

4(서기 695),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다. 개원(愷元)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겨울 10, 서울에 지진이 났다. 중시 원선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서시(西市)와 남시(南市)의 두 시장을 설치하였다.

 

五年 春正月 伊飡幢元爲中侍. 夏四月 國西旱.

오년 춘정월 이찬당원위중시. 하사월 국서한.

 

5(서기 696) 봄 정월, 이찬 당원(幢元)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

 

六年 秋七月 完山州進嘉禾 異畝同穎. 九月 宴群臣於臨海殿.

육년 추칠월 완산주진가화 이삽동영. 구월 연군신어임해전.

 

6(서기 697) 가을 7, 완산주(完山州)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다른 밭고랑에서 난 이삭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었다.

9,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七年 春正月 以伊飡體元爲牛頭州摠管. 二月 京都地動 大風折木. 中侍幢元退老 大阿飡順元爲中侍.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秋七月 京都大水.

칠년 춘정월 이이찬체원위우두주총관. 이월 경도지동 대풍절목. 중시당원퇴노 대아찬순원위중시. 삼월 일본국사지 왕인견어숭례전. 추칠월 경도대수.

 

7(서기 698) 봄 정월,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총관으로 삼았다.

2, 서울에 지진이 났다.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다. 중시 당원이 늙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대아찬 순원(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 일본국 사신이 당도하였다. 임금이 숭례전(崇禮殿)으로 불러 만나보았다.

가을 7, 서울에 홍수가 났다.

 

八年 春二月 白氣竟天 星孛于東. 遣使朝唐貢方物. 秋七月 東海水血色 五日復舊. 九月 東海水自擊 聲聞王都 兵庫中鼓角自鳴. 新村人美肹得黃金一枚 重百分 獻之 授位南邊第一 賜租一百石.

팔년 춘이월 백가경천 성패우동. 견사조당공방물. 추칠월 동해수혈색 오일복구. 구월 동해수자격 성문왕도 병고중고각자명. 신촌인미힐득황금일매 중백분 헌지 수위남변제일 사조일백석.

 

8(서기 699) 2,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닷새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9, 동해물이 서로 맞부딪쳐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다. 병기고에서 북과 뿔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무게가 100푼인 황금 한 덩이를 얻어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를 주고 벼 1백 섬을 내려주었다.

 

九年 復以立寅月爲正. 夏五月 伊飡慶永[永一作玄]謀叛 伏誅 中侍順元緣坐罷免. 六月 歲星入月.

구년 복이립인월위정. 하오월 이찬경영(영일작현)모반 복주 중시순원영좌파면. 유월 세성입월.

 

9(서기 700),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여름 5, 이찬 경영(慶永을 현()이라고도 한다.) 이 반역을 꾀하다가 사형을 당하였으며,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十年 春二月 彗星入月. 夏五月 靈巖郡太守一吉飡諸逸 背公營私 刑一百杖 入島.

십년 춘이월 혜성입월. 하오월 영암군태수일길찬제일 배공영사 형일백장 입도.

 

10(서기 701) 2, 혜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여름 5, 영암군(靈巖郡, 전남 영암)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이 공사를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였으므로,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섬으로 들여보냈다.

 

十一年 秋七月 王薨 諡曰孝昭 葬于望德寺東(舊唐書云 長安二年 理洪卒 諸古記云 壬寅七月二十七日卒 而通鑑云 大足三年卒 則通鑑 誤)

십일년 추칠월 왕훙 시왈효소 장우망적시동(구당서운 장안이년 리홍졸 제고기운 임인칠월이십칠일졸 이통감운 개족삼년졸 즉통감 오)

 

11(서기 702) 가을 7,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 지냈다.(구당서(舊唐書)에서는 장안(長安) 2(서기 702)에 이홍이 죽었다.’고 하였고, 여러 고기(古記)에는 임인(서기 702) 727일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통감(通鑑)에는 대족(大足) 3(서기 703)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통감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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