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本紀 第八
神文王
神文王立 諱政明(明之字日怊) 文武大王長子也 母慈儀(一作義)王后 妃金氏 蘇判欽突之女 王爲太子時 納之 久而無子 後坐父作亂 出宮 文武王五年 立爲太子 至是繼位 唐高宗遣使冊立爲新羅王 仍襲先王官爵
신문왕립 휘정명(명지 자일초) 문무대왕장자야 모자의(일작의)왕후 비김씨 소찬흠돌지녀 왕위태자시 납지 구이무자 후좌부작란 출궁 문무왕오년 입위태자 지시계위 당고종견사책립위신라왕 잉습선왕관작
신문왕(神文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政明)이다.(명(明)의 자(字)는 일초(日怊)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또는 慈義王后)이다. 왕비 김씨는 소판 흠돌(欽突)의 딸이다. 임금이 태자로 있을 때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훗날 자신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문무왕 5년(서기 665)에 태자가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자리를 이었다. 당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先王)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元年 八月 拜舒弗邯眞福 爲上大等, 八日 蘇判金欽突波珍飡興元大阿飡眞功等 謀叛伏誅, 十三日 報德王遣使小兄首德皆 賀平逆賊
원년팔월 배서불한진복 위상대등, 팔일 소판김흠돌파진찬흥원대아찬지공등 모반복주, 십삼일 보덕왕션사소형수덕개 하평역적
원년(서기 681) 8월, 서불한 진복(眞福)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8일, 소판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꾀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13일, 보덕왕이 소형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十六日 下敎曰 賞有功者 往聖之良規 誅有罪者 先王之令典 寡人以眇躬涼德 嗣守崇基 廢食忘餐 晨興晏寢 庶與股肱 共寧邦家 豈圖縗絰之內 亂起京城 賊首欽突興元眞功等 位非才進 職實恩升
십육일 하교왈 상유공자 왕성지양규 선왕지영전 과인이묘궁양덕 사수숭기 폐식망찬 신흥안침 서여고굉 공년방가 기도최질지내 난기경성 적수흠돌흥원진공등 위비재진 직실은승
16일, 다음과 같은 교서(敎書)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요, 죄가 있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이 약한 몸과 허술한 덕에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먹는 것도 잊고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리에 들면서 충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고 하였더니, 상중(喪中)에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역적의 우두머리인 흠돌ㆍ흥원ㆍ진공 등은 재주가 있어 벼슬에 오른 것이 아니요, 관직도 실은 은전(恩典)에 의하여 오른 것이다.
不能克愼始終 保全富貴 而乃不仁不義 作福作威 侮慢官寮 欺凌上下 比日逞其無厭之志 肆其暴虐之心 招納凶邪 交結近竪 禍通內外 同惡相資 剋日定期 欲行亂逆
하능극신시종 보전부귀 이내불인불의 작복작위 회만관료 사릉상하 차일정기무염지지 사기포학지심 초납흉사 교결근수 화통내외 동악상자 극일정기 욕행난역
처음부터 끝까지 행실을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고, 인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관료들을 업신여겼으며, 아래 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속였으며, 날마다 탐욕스러운 생각을 멋대로 드러내고 난폭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근이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못된 무리들을 모아 날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寡人上賴天地之祐 下蒙宗廟之靈 欽突等惡積罪盈 所謀發露 此乃人神之所共棄 覆載之所不容 犯義傷風 莫斯爲甚 是以追集兵衆 欲除梟鏡 或逃竄山谷 或歸降闕庭 然尋枝究葉 並已誅夷 三四日間 囚首蕩盡
과인상뢰천지지우 하몽종묘지영 흠돌등악적되영 소모발로 차내인신지소공기 복재지소불용범의상풍 막사위기 시이추집병중 욕제효경 혹도찬산곡 혹귀항구러정 연심기돌기 병이주이 삼사일간 수수탕진
내가 위로는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조상의 신령스러운 보살핌을 받아,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 나게 되었다.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배척하는 바요 천지 간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니, 의(義)를 범하고 풍속을 해치는 일에 있어 이보다 더 심한 짓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병사들을 모아 못된 무리를 없애고자 하였더니, 어떤 자는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어떤 자는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은 이미 모두 죽여 없앴으며, 앞으로 사나흘 안에 죄인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소탕될 것이다.
事不獲已 驚動士人 憂愧之懷 豈忘旦夕 今旣妖徒廓淸 遐邇無虞 所集兵馬 宜速放歸 布告四方 令知此意”
사불획이 경동사인 우괴지회 기망단석 슴기요도곽청 하이무우 소집병마 의속방귀 포고사방령지차의”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이미 요망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염려할 것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를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二十八日 誅伊飡軍官 敎書曰 事上之規 盡忠爲本 居官之義 不二爲宗 兵部令伊飡軍官 因緣班序 遂升上位 不能拾遺補闕 效素節於朝廷 授命忘軀 表丹誠於社稷
이십팔일 주이찬군관 교서왈 사상지규 진충위본 거관지의 불이위종 병부령이찬군관 인연반서 수승상위 불가습유보궐 효소절어조정 수명망구 표단성어사직.
28일에 이찬 군관(軍官)의 목을 베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며, 벼슬살이하는 의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반열의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의 실수와 결점을 보좌하여 결백한 절개를 조정에 바치지 못했고,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가며 사직(社稷)에 충성을 표하지도 않았다.
乃與賊臣欽突等交涉 知其逆事 曾不告言 旣無憂國之心 更絶徇公之志 何以重居宰輔 濫濁憲章 宜與衆棄 以懲後進 軍官及嫡子一人 可令自盡 布告遠近 使共知之. 冬十月 罷侍衛監 置將軍六人
내여적신흠돌교섭 지기역사 증불고언 기무우국지심 경절순공지지 하이중거재보 람탁헌장의여중기 이징후진 군관급적자일인 가령자진 포고원근 사공지지 동시월 파시위감 치장군육인.
그리하여 역적인 흠돌 등과 사귀면서 그들이 반역을 꾀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미리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공적인 일을 위하여 몸 바칠 뜻도 없는 것이니, 어찌 재상 자리에 두어 나라의 헌장(憲章)을 함부로 흐리게 할 것인가? 무리들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경계로 삼는 것이 마땅하리라. 군관과 그의 친아들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모두가 이것을 알게 하라.”
겨울 10월, 시위감(侍衛監)을 없애고 장군 6인을 두었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夏四月 置位和府令二人 掌選擧之事. 五月 太白犯月. 六月 立國學 置卿一人 又置工匠府監一人 彩典監一人
이년 춘정월 친사신궁 대사 하사월 치위화부영이인 장선거지사. 오월 태백범월. 유월 입국학 치경일인 우치공장부감일인 채전감일인
2년(서기 682)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관리를 선발하고 천거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5월,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6월, 국학(國學)을 세우고 경(卿) 1인을 두었다. 또 공장부감(工匠府監) 1인과 채전감(彩典監) 1인을 두었다.
三年 春二月 以順知爲中侍 納一吉飡金欽運少女 爲夫人 先差伊飡文穎波珍飡三光定期 以大阿飡智常納采 幣帛十五轝 米酒油蜜醬豉脯 醯一百三十五轝 租一百五十車. 夏四月 平地雪深一尺.
삼년 춘이월 이순지위중시 납일길찬금흠운소녀 위부인 선차이찬문영파진찬삼광정기 이대아찬지상납채 폐백십오거 미주유밀장고포 혜일백삼십오거 조일백오십거. 하사월 평지설심일척.
3년(서기 683) 봄 2월, 순지(順知)를 중시로 삼았다.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기로 하고, 우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 남자 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 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3십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
여름 4월, 평지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五月七日 遣伊飡文穎愷元抵其宅 冊爲夫人 其日卯時 遣波珍飡大常孫文阿飡坐耶吉叔等 各與妻娘及梁沙梁二部嫗各三十人迎來 夫人乘車 左右侍從官人及娘嫗甚盛 至王宮北門 下車入內. 冬十月 徵報德王安勝爲蘇判 賜姓金氏 留京都 賜甲第良田 彗星出五車.
오월칠일 견이찬문영개원저기택 책위부인 기읾시 견파진찬대상손문아찬좌야길숙등 각여처랑급양소양이부구각삼십인영래 부인승거 좌우시종관인급항구심성 지왕궁북문 하거입내 동시월 징보덕왕안승위소판 사성김씨 유경도 사갑제양전 혜성출오거.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의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ㆍ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ㆍ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梁)과 사량(沙梁) 두 부(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도록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곁에서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왔다.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혜성이 오거(五車: 쌍둥이 자리)성좌에 나타났다.
四年 冬十月 自昏及曙 流星縱橫 十一月 安勝族子將軍大文 在金馬渚謀叛 事發伏誅 餘人見大文誅死 殺害官吏 據邑叛 王命將士討之 逆鬪幢主逼實死之 陷其城 徙其人於國南州郡 以其地爲金馬郡(大文或云悉伏)
사년 동시월 자혼급서 유성종횡 십일월 안승족자장군대문 재금마저모반 사발복주 여인견재문주사 살해관리 거읍반 왕명장사토지 역투당주핍실사지 함기성 사기인어국남주군 이기지위금마군(대문혹운실복)
4년(서기 684)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大文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 한다.)
五年春 復置完山州 以龍元爲摠管 挺居列州 以置菁州 始備九州 以大阿飡福世爲摠管 三月 置西原小京 以阿飡元泰爲仕臣 置南原小京 徙諸州郡民戶分居之 奉聖寺成 夏四月 望德寺成.
오냔춘 복치완산주 이용원위총관 정거열주 이치청주 시비구주 이대아찬복세위총관 삼월 치서원소졍 이아찬원태위사신 치남원소경 사제주군민호분거지 봉성사엉 하사월 망덕사성.
5년(서기 685) 봄,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를 일부를 뽑아어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九州)가 갖추어졌는데, 대아찬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3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으며,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그곳에 나누어 살도록 하였다. 봉성사(奉聖寺)를 완성하였다.
여름 4월, 망덕사(望德寺)를 완성하였다.
六年 春正月 以伊飡大莊(一作將)爲中侍 置例作府卿二人 二月 置石山馬山孤山沙平四縣 以泗沘州爲郡 熊川郡爲州 發羅州爲郡 武珍郡爲州
육년 춘정월 이이찬대장(일작장)위중시 치열작부경이인 이월치석산마산고산사ㅂ평사현 이사비주위군 웅천국위즈 발라주위군 무진군위주
6년(서기 686) 봄 정월, 이찬 대장(大莊또는 장(將)이라고 한다.)을 중시로 삼았다.
예작부(例作府)에 경(卿) 2인을 두었다.
2월, 석산(石山), 마산(馬山), 고산(孤山), 사평(沙平)의 네 현(縣)을 설치하였다.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삼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삼았다. 발라주(發羅州)를 군으로 삼고, 무진군(武珍郡)을 주로 삼았다.
遣使入唐 奏請禮記幷文章 則天令所司 寫吉凶要禮 幷於文舘詞林 採其詞涉規誡者 勒成五十卷 賜之
견사입당 진청예기병문장 즉천령소사 사길흉요체 병어문관사림 채기사섭규계자 근성오십권사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기(禮記)』와 여러 문장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담당관에게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베끼고 『문관사림(文館詞林)』중에서 규범에 대한 글을 골라 50권으로 만들어 주었다.
七年 春二月 元子生 是日 陰沈昧暗 大雷電. 三月 罷一善州 復置沙伐州 以波珍飡官長爲摠管 夏四月 改音聲署長爲卿
칠년 춘이월 원자생 시일 음침매암 대뢰전 삼월 파일선주 복치사벌주 이파진찬관장위총관 하사월 개음성서장위경
7년(서기 687) 봄 2월, 임금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이날 날씨가 음침하고 어둑어둑하였으며 우레와 번개가 심하게 쳤다.
3월, 일선주(一善州)를 없애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두어 파진찬 관장(官長)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음성서(音聲署)의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하였다.
遣大臣於祖廟 致祭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之靈 某以虛薄 嗣守崇基 寤寐憂勤 未遑寧處
견대산어조묘 치제왈 왕모셰수재배 슨언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댜왕태종대왕문무대왕지영 모이허박 사수숭기 오매우근 미황영처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奉賴宗廟 護持乾坤降福 四邊安靜 百姓雍和 異域來賓 航琛奉職 刑淸訟息 以至于今 比者 道喪君臨 義乖天鑒 怪成星象 火宿沈輝 戰戰慄慄 若墜淵谷 謹遣使某官某 奉陳不腆之物 以虔如在之靈 伏望 炤察微誠 矜恤眇末 以順四時之候 無愆五事之徵 禾稼豊而疫癘消 衣食足而禮義備 表裏淸謐 盜賊消亡 垂裕後昆 永膺多福 謹言”
봉뢰종묘 근지건곤강복 사변안정 백성옹화 이역래빈 항심봉직 형청송식 이지우금 차자 도상군림 의과천감 괴성성상 화숙침뤼 전전율율 약추연곡 근견사보관모 봉진불전지물 이건여재지령 복방 소찰미성 긍휼묘말 아슌서사지후 무연오사지징 화가풍이역려소 의식족이예의비 표리청밀 도적소망 수유후곤 영응다복 근언”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1)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五月 敎賜文武官僚田有差 秋 築沙伐歃良二州城
오월 교사문무관료전유차 추 축사벌삽량이주성.
5월,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있게 주었다.
가을, 사벌주(沙伐州)와 삽량주(歃良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八年 春正月 中侍大莊卒 伊飡元師爲中侍 二月 加船府卿一人
팔년 춘정월 중시대장족 이찬원사위중시 이월 가선부경일인
8년(서기 688) 봄 정월, 중시 대장이 죽었으므로 이찬 원사(元師)를 중시로 삼았다.
2월, 선부(船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다.
九年 春正月 下敎 罷內外官祿邑 逐年賜租有差 以爲恒式 秋閏九月二十六日 幸獐山城 築西原京城 王欲移都達句伐 未果
구년 춘정월 하교 파내외관록색 축년사조유차 이위항식 추윤구월이십육일 행장산성 축서원경성 왕욕이도달구벌 미과
9년(서기 689) 봄 정월,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직위에 따라 벼를 차등있게 주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가을 윤 9월, 임금이 장산군(獐山郡)에 행차하였다.
서원경(西原京, 충북 청주)에 성을 쌓았다.
임금이 달구벌(達句伐, 대구)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十年 春二月 中侍元師病免 阿飡仙元爲中侍 冬十月 置轉也山郡
십년 춘이월 중시원사병면 아찬선워위중시 동시월 치전야산군
10년(서기 690) 봄 2월, 중시 원사가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다.
十一年 春三月一日 封王子理洪爲太子 十三日 大赦 沙火州獻白雀 築南原城
십일년 춘삼월일일 봉왕자리홍위태자 십삼일 대서 사화주헌백작 축만원성.
11년(서기 691) 봄 3월 1일,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13일,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沙火州)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남원성(南原城)을 쌓았다.
十二年春 竹枯 唐中宗遣使口勑曰 我太宗文皇帝 神功聖德 超出千古 故上僊之日 廟號太宗 汝國先王金春秋 與之同號 尤爲僭越 須急改稱
12년(서기 692)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구두로 전하였다.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성스런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돌아가신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金春秋)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이는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빨리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王與群臣同議 對曰 “小國先王春秋諡號 偶與聖祖廟號相犯 勑令改之 臣敢不惟命是從 然念先王春秋 頗有賢德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捐館之際 一國臣民不勝哀慕 追尊之號 不覺與聖祖相犯 今聞敎勑 不勝恐懼 伏望 使臣復命闕庭”
왕여군신동의 대왈 “소국선왕춘추시호 우여성조묘호성범 래령개지 신감불유명시종 연념선왕춘추 파유현덕 황생전득양신김유신 동심위정 일통삼한 기위공업 불위불다 손관지제 일국신민불승애모 추존지호 불각여성조상범 금문교래 불승공구 복망 사신복명궐정”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같게 되어) 이를 고치라는 칙명을 내리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으리오. 그러나 생각해보니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훌륭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다스려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이룩한 공적이 적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돌아가셨을 때에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이길 수 없도다. 삼가 바라건대, 사신이 대궐의 뜰에서 복명할 때 이대로 아뢰어 주시오.”
以此上聞 後更無別勑 秋七月 王薨 諡曰神文 葬狼山東
이차상문 후경무별래 추칠월 왕훙 시왕신문 장랑산동
그 후에 다시는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
가을 7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하였다.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羅本紀 第八 -聖德王 (0) | 2019.12.16 |
---|---|
新羅本紀 第八 -孝昭王 (0) | 2019.12.16 |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下 (0) | 2019.12.09 |
新羅本紀 第六 -文武王 上 (0) | 2019.12.07 |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 (0) | 2019.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