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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六 -文武王 上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文武王

 

文武王立 諱法敏 太宗王之元子 母金氏文明王后 蘇判舒玄之季女 庾信之妹也

문무왕립 휘법민 태종왕지원자 모김씨문명왕후 소판서현지계녀 유신지매야.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동생이다.

 

其姊夢登西兄山頂坐 旋流徧國內 覺與季言夢 季戱曰 予願買兄此夢因與錦裙爲直

기자몽등서형산정좌 선류쳔국내 각여계언몽 계희왈 여원매형차몽 인여금군위직

 

그의 언니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나라 안에 가득 퍼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농담처럼 말하였다.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어요.” 그리고는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後數日 庾信與春秋公蹴鞠 因踐落春秋衣紐 庾信曰 吾家幸近 請往綴紐 因與俱往宅 置酒 從容喚寶姬 持針線來縫 其姊有故不進 其季進前縫綴 淡粧輕服 光艶炤人 春秋見而悅之 乃請婚成禮 則有娠生男 是謂法敏 妃慈儀王后 波珍飡善品之女也

후수일 유신여춘추공축국 인천락춘추의뉴 유신왈 오가행근 청왕철뉴 인여구왕댁 치주 종용환보희 지침선래봉 기자유고불진 기계진전봉철 당장경복 광염조인 춘추견이열지 내청혼성례즉유신생남 시위법민 비자의왕후 파진찬선품지녀야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였다. “다행히 우리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도록 하지요.”

함께 집으로 가서는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언니가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였기에 동생이 나와서 옷고름을 꿰매어 주었는데, 그녀의 담백한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과 빛나는 아름다움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춘추가 보고 마음에 꼭 들어서 혼인을 청하여 혼례식을 치렀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다.

 

法敏姿表英特 聰明多智略 永徽初如唐 高宗授以大府卿 太宗元年 以波珍飡爲兵部令 尋封爲太子 顯慶五年 太宗與唐將蘇定方 平百濟 法敏從之 有大功 至是卽位

법민자표영위 총명다지략 영휘초여당 고종수이대부경 태종원년 이파진찬위병부령 심봉위태자 현경오년 태종여당장소정방 평백제 법민종지 유대공 지시즉위

 

법민은 용모가 영준하며 뛰어났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에 당나라에 갔을 때 당의 고종(高宗)이 태부경(太府卿)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태종 원년(서기 654)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후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顯慶) 5(서기 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元年六月 入唐宿衛仁問儒敦等至 告王 皇帝已遣蘇定方 領水陸三十五道兵 伐高句麗 遂命王擧兵相應 雖在服 重違皇帝勅命

원년유월 입당숙위인문유돈등지 고왕 황제이견소정방 영수륙삼십오도병 벌고구려 수명왕거병상응 수재복 중위황제칙명

 

원년(서기 661) 6월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고하기를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임금께 병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이지만 황제가 직접 내린 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秋七月十七日 以金庾信爲大將軍 仁問眞珠欽突爲大幢將軍 天存竹旨天品爲貴幢摠管 品日忠常義服爲上州摠管 眞欽衆臣自簡爲下州摠管 軍官藪世高純爲南川州摠管 述實達官文穎爲首若州摠管 文訓眞純爲河西州摠管 眞福爲誓幢摠管 義光爲郞幢摠管 慰知爲罽衿大監

추칠월십칠일 이김유신위대장군 인문진주흠돌위대당장군 천존죽지천품위귀강총관 품일충상의복위상주총관 진흠중신자간위하주총관 군관수세고순위남천주총관 술실달관문영위수약주총관 문훈진순위하서주총관 진복위서당총관 의광위랑당총관 위지위 계금대감

 

가을 717,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 진주(眞珠), 흠돌(欽突)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삼고, 천존(天存), 죽지(竹旨), 천품(天品)을 귀당(貴幢) 총관으로 삼고, 품일(品日), 충상(忠常), 의복(義服)을 상주(上州) 총관으로 삼고, 진흠(眞欽), 중신(衆臣), 자간(自簡)을 하주(下州) 총관으로 삼고,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을 남천주(南川州) 총관으로 삼고, 술실(述實), 달관(達官), 문영(文穎)을 수약주(首若州) 총관으로 삼고, 문훈(文訓), 진순(眞純)을 하서주(河西州) 총관으로 삼고, 진복(眞福)을 서당(誓幢) 총관으로 삼고, 의광(義光)을 낭당(郞幢) 총관으로 삼고, 위지(慰知)를 계금(罽衿) 대감으로 삼았다.

 

八月 大王領諸將 至始飴谷停留 使來告曰 百濟殘賊 據甕山城遮路 不可前 大王先遣使諭之 不服

팔월 대왕영제장 지시이곡정류 *사래고왈 백제잔적 거옹산성서로 불가전 대왕선견사유지불복.

 

8,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 사가 와서 아뢰었다.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甕山城)을 차지하여 길을 막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九月十九日 大王進次熊峴停 集諸摠管大監 親臨誓之

구월십구일 대왕진차웅현정 집제총관대감 친임서지

 

919, 대왕이 웅현정(熊峴停)에 나아가 모든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 몸소 가서 서약을 받았다.

 

二十五日 進軍圍甕山城 至二十七日 先燒大柵 斬殺數千人 遂降之 論功 賜角干伊飡爲摠管者劒 迊飡波珍飡大阿飡爲摠管者戟 已下各一品位 築熊峴城 上州摠管品日 與一牟山郡太守大幢沙尸山郡太守哲川等 率兵攻雨述城 斬首一千級 百濟達率助服恩率波伽與衆謀降 賜位助服級飡 仍授古陁耶郡太守 波伽級飡 兼賜田宅衣物

이십오일 진군위옹산성 지이십칠일 선소대책 참살수천인 수항지 논공 사각간이찬위총관자검 잡찬파진찬대아찬위총관자극 이하각일품위 축웅현성 상주총관품일 여일모산군태수대당사시산군태수철천등 솔병공우술성 참수일천급 백제잘솔조복은솔차가여중모항 사위조복급찬 잉수고타야군태수 파가급타 겨겸사전택의물

 

25, 진군하여 옹산성을 포위하였다.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의 목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항복시켰다. 전공을 논하여, 각간과 이찬으로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칼을 주고, 잡찬이나 파진찬ㆍ대아찬으로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과 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助服)과 은솔 파가(波伽)가 무리들과 의논하여 항복하였기에, 조복에게 급찬의 관등을 주고 고타야군(古陁耶郡) 태수로 삼았으며, 파가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아울러 밭과 집, 옷 등을 내려주었다.

 

冬十月二十九日 大王聞唐皇帝使者至 遂還京 唐使弔慰 兼勅祭前王 贈雜彩五百段 庾信等休兵 待後命 含資道摠管劉德敏至 傳勅旨 輸平壤軍粮

동십이월이십구일 대왕문당황제사자지 수환경 당사조위 경칙제전왕 증잡채오백단 유신등휴병대후명 함자도총관덕민지 전칙지 수평양군량.

 

겨울 1029,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조문하고, 아울러 황제의 명에 따라 선왕에게 제사를 지내었으며, 갖가지 채색을 한 비단 5백 필을 바쳤다. 유신 등은 병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二年春正月 唐使臣在館 至是 冊命王爲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 拜伊飡文訓爲中侍

아년춘정월 당사신재관 지시 책명왕위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 배이찬문훈위중시

 

2(서기 662) 봄 정월, 객관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사신이 이때에 이르러 임금을 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王命庾信與仁問良圖等九將軍 以車二千餘兩 載米四千石 租二萬二千餘石 赴平壤 十八日 宿風樹村 氷滑道險 車不得行 竝載以牛馬 二十三日 渡七重河 至壤 貴幢弟監星川軍師述川等 遇賊兵於梨峴 擊殺之

왕명유신여인문랑도등구장군 이거이천여량 재미가천석조이만이천여석 부평양 십팔일 숙풍수촌 빙활도험 거부득행 병재이우마 이십삼일 도하중하 지산양 귀당제감성천군사술청등 우적병어이현 격살지.

 

임금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과 양도 등 아홉 장군과 더불어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 2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그들은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 머물렀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싣고 갔다. 23, 칠중하(七重河, 임진강)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 성천(星川)과 군사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과 마주쳐, 공격하여 죽였다.

 

二月一日 庾信等至獐塞 距平壤三萬六千步 先遣步騎監裂起等十五人 赴唐營 是日 風雪寒沍 人馬多凍死 六日 至楊隩 庾信遣阿飡良圖大監仁仙等致軍粮 贈定方以銀五千七百分,細布三十匹,頭髮三十兩,牛黃十九兩 定方得軍粮 便罷還 庾信等聞唐兵歸 亦還渡川 高句麗兵追之 廻軍對戰 斬首一萬餘級 虜小兄阿達兮等 得兵械萬數 論功 中分本彼宮財貨田莊奴僕 以賜庾信仁問 靈廟寺災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一作津) 來降 耽羅自武德以來 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 降爲屬國

이월일일 유신등지장새 거평양삼만육천보 선견보기감열기등오십인 부당영 시일 풍운한호 인마다동사 육일 지양오 유신견아찬양도대감인선등치군량 증정방이은오천칙백푼세포삼십필두발삼십량우황십구랭 정박득군량 편파환 유신등문당병귀 역환도천 고구려병추지 회군대전 참수일만여급 노소형아달혜등 득병계만수 논공 중분본피궁재화전장노복 이사유신인문 영묘사재 탐라주좌평도동음율(일작진) 래항 탐라자무덕이래 신속백제 고이좌평위관호 지시 항위속국.

 

21일 유신 등이 장새(獐塞)에 이르렀다. 그곳은 평양으로부터 36천 보 떨어진 곳이었다. 먼저 보기감 열기(裂起)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날은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6, 양오(楊隩)에 당도하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고, 정방에게 은 57백 푼,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 머리털 30량과 우황 19량을 선물로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장 돌아가 버렸다. 유신 등은 당나라 병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을 건넜다.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대를 돌이켜 싸워서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장기를 1만이 넘게 획득하였다. 전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와 재물과 밭과 건물과 노비를 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탐라국주(耽羅國主)인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또는 진()이라고도 한다.]이 항복해왔다. 탐라는 무덕(武德, 백제 위덕왕) 이래로 백제의 속국이었기에 좌평을 관직의 호칭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三月 大赦 王以旣平百濟 命所司設大酺 秋七月 遣伊飡金仁問 入唐貢方物

삼월 대사 왕이기평백제 명소사설대포 추칠월 견이찬김인문 입당공방물

 

3,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임금은 이전에 백제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담당관에게 명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7, 이찬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八月 百濟殘賊 屯聚內斯只城 作惡 遣欽純等十九將軍 討破之 大幢摠管眞珠, 南川州摠管眞欽 詐稱病 閑放不恤國事 遂誅之 幷夷其族 沙飡如冬打母 天雷雨震死 身上題須堂三字 南川州獻白鵲[字未詳]

팔월 백제잔적 둔취내사지성 작악 견흠순등십구장군 토파지 대당총관진주남천주총관진흠 사칭병 한방불휼국사 수주지 병이기족 사찬여동타모 천뢰우진사 신상수당삼자 남천주헌백작.

 

8, 백제의 남은 적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모여 악행을 저지르므로 흠순(欽純) 19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대당 총관 진주와 남천주 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 삼아 방탕히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사찬 여동(如冬)이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더니, 벼락이 떨어져 사찬이 죽었는데, 그 몸에 수(*)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三年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築富山城, 二月 欽純天存領兵 攻取百濟居列城 斬首七百餘級 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 又攻德安城 斬首一千七十級 夏四月 大唐 以我國爲鷄林大都督府 以王爲鷄林州大都督 

삼년춘정월 작장창어남산신성 축부산성, 이월 흠순천존영병 공취백제거열성 참수칠백여급 우공거물성사평성항지 우공덕안성 참수일천칠십급 하사월 대당 이아국위계림대도독부 이왕위계림주대도독

 

3(서기 663) 봄 정월, 남산신성(南山新城)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고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2,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여름 4,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임금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

 

五月 震靈廟寺門 百濟故將福信及浮圖道琛迎故王子扶餘豊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史 統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幷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 與之合攻豆陵(一作良)尹城周留城等諸城 皆下之 扶餘豊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 率其衆降 獨遲受信據任存城 不下

오월 진영묘사문 백제고장부신급부도도심영고왕자부여풍 립지 위유진랑장유인원어웅진성 당황제조인궤검교대방주자사 통전도독왕문도지중 여어병향백제영 전투함진 소향무전 신등석인원위 퇴보임존성 기이복신살도침 병기중 초환반망 세심장 인궤여인원합 해갑휴토 내청익병 소견우위위장군손인사솔병사십만 지덕물도 취능진부성 왕영김유신등이십팔(일운삼십)장군여지합공두릉(일작량)윤성주유성등재성 개하지 부여풍탈신주 왕자충승충지등 솔기중항 독지수신거임존성 불하

 

5, 영묘사 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군대는 매번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키니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다음 그의 무리를 자기 군대에 합치고, 아울러 배반하고 도망쳤던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병사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병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임금은 김유신 등 28(혹은 30)의 장수를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혹은 -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조리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자리를 잡고 항복하지 않았다.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 不克 至十一月四日 班師 至舌(一作后)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

자동시월이십일일 공지 불극 지십일월사일 반사 지성(일작후)이정 논공헹상유차 대사 제의상 급유진당군.

 

겨울 10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다가 114일에 군사를 돌려 설리정(--利停)에 이르렀다. 전공을 따져서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진에 남아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四年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几杖 以阿飡軍官爲漢山州都督 下敎婦人亦服中朝衣裳. 二月 命有司徙民於諸王陵園 各二十戶 角干金仁問伊飡天存與唐勅使劉仁願百濟扶餘隆 同盟于熊津. 三月 百濟殘衆 據泗沘山城叛 熊津都督發兵 攻破之 地震 遣星川丘日等二十八人於府城 學唐樂. 秋七月 王命將軍仁問品日軍官文穎等 率一善漢山二州兵 與府城兵馬 攻高句麗突沙城 滅之 八月十四日 地震 壞民屋 南方尤甚 禁人擅以財貨田地施佛寺

사년춘정월 익유신청노 불충 사궤장 이아찬군관위한산주도독 하교부인역복중조의상. 이월명유사사민어제왕능원 각이십호 각간김인문이찬천존여당칙사유인원백제부여항 동맹우웅진. 삼월백제잔중 거사비산성반 웅진도독발병 공차지 지진 견성천구일등이십팔인어부성 학당악. 추칠월 왕명장군인문품일군관문영등 솔일선한산이주병 여부성병마 공고구려돌사성 멸지 팔월십사일 지진 괴민옥 남방우심 금인천이재화전지시불사

 

4(서기 664) 봄 정월, 김유신이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漢山州) 도독으로 삼았다.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역시 중국 의복을 입도록 하였다. 2, 담당관에 명하여 역대 임금의 능원(陵園)에 백성 20호씩을 이주시켰다.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熊津)에서 맹약을 맺었다. 3,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도독이 병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지진이 일어났다.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28인을 웅진부성(熊津府城)에 보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 임금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하여 일선주(一善州)와 한산주 두 주의 병사를 이끌고 웅진부성의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하였다. 814,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재물과 토지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五年春二月 中侍文訓致仕 以伊飡眞福爲中侍 伊飡文王卒 以王子禮葬之 唐皇帝遣使來弔 兼進贈紫衣一襲腰帶一條彩綾羅一百匹綃二百匹 王贈唐使者金帛尤厚

 

5(서기 665) 2, 중시 문훈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았다.

이찬 문왕이 죽으니 왕자의 예법으로 장사 지냈다.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아울러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채색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 임금이 당나라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秋八月 王與勅使劉仁願熊津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 初 百濟自扶餘璋與高句麗連和 屢侵伐封埸 我遣使入朝求救 相望于路 及蘇定方旣平百濟軍廻 餘衆又叛

추팔월 왕여칙사유인원웅진도독부여융맹웅진취리산 초 백제자부여장여고구려연화 누침벌봉역 아견사입조구구 상망우로 급소정방기평백제군회 여중우반

 

가을 8, 임금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일찍이 백제는 부여장(扶餘璋, 백제 무왕)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우리의 영토를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우리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원을 청하는 길이 연달아 이어졌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군대를 돌이키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王與鎭守使劉仁願劉仁軌等 經略數年 漸平之 高宗詔 扶餘隆歸 撫餘衆及令與我和好 至是 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歃血.

왕여진수사유인원인궤등 경략수년 점평지 고종조 부여융귀 무여중급영여아화호 지시 형백마이맹 선사신지급천곡지신 이후삽혈

 

우리 임금이 진수사(鎭守使) 유인원, 유인궤 등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다스려서 점차 안정이 되어가니,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조칙을 내려 신라로 오도록 하여 잔당들을 무마하고 우리와 화친하라고 한 것이다. 이때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내와 골짜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말의 피를 마셨다.


其盟文曰 往者 百濟先王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託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剽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嶮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汙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大司稼正卿扶餘隆 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各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寔宣成旨

기맹문왈 앙자 백제선왕미어역순 불돈린오 불목친인 결탁고구려 교통왜국 공위잔폭 침삭신라 표읍도성 략무녕세 천자민일물지실고 린백성지무고 빈명행인 견기화호 부험시원 모만천경 황혁사노 공행조벌 정기소지 일융대정 고가저궁오택 작계래예 색원발본 수훈후곤 연회유벌반 전왕지영전 흥망계절 왕철지통규 사필사고 전제낭책 고립전백제대사가정경부여융 위웅진도독 수기제사 보기상재 의기신하 장위여국 각제숙감 결호화친 각승조명 영위번복 잉견사인우우위장군노성현공유인원 친임권유 식선성지

 

그 맹세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전 임금은 거스를 것과 따를 것을 분간하지 못하여,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약탈하고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시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였으나 백제는 지리의 험준함과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자의 가르침을 업신여겼으므로,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삼가 죄를 묻고 정벌을 단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나가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평정되었다. 그러한즉 마땅히 궁전을 늪으로 만들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후세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유순한 자는 받아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사책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전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고 옛 땅을 보전하도록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 길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여, 각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당의 번국(蕃國)으로써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천자의 뜻을 자세히 선포하노라.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背盟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明神監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守 禋祀磨滅 罔有遺餘

약지이혼인 신지이맹세 형생삽혈 공동종시분재휼환 은약제형 지봉윤언 불감실추 기맹지후 공보세한 약유배맹 이삼기덕 흥병동중 침범변수 명신감지 백앙시항 자손불육 사직무수 인사마멸 강유유여

 

두 나라는 혼인으로 약속을 맺고 맹세로 거듭했으며, 희생을 잡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서, 언제까지나 함께 화목하여 재난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한 뒤에는 모두 함께 지조를 지켜야 하리라. 만약 맹세를 어기고 뜻을 달리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살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지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故作金書鐵券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敢違犯 神之聽之 是饗是福

고작금서철권 장지종묘 자손만대 무감위범 신지청지 시향시복

 

이러한 까닭으로 금서철권(金書鐵券, 금가루로 쓴 증표)을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하여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감히 어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신령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어 흠향하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劉仁軌之辭也 歃訖 埋牲幣於壇之壬地 藏其書於我之宗廟 於是 仁軌領我使者及百濟耽羅倭人四國使 浮海西還 以會祠泰山 立王子政明爲太子 大赦 冬 以一善居列二州民 輸軍資於河西州 絹布舊以十尋爲一匹 改以長七步廣二尺爲一匹

유인궤지사 삽흘 매생폐어단지임지 장깃어아지종묘 어시 인궤영아사자급백제탐라왜인사국사 부해서환 이회사태산 입왕자정명위태자 대사 동 이일선거열이주민 수군자어하서주 연포구이십심위일필 개이장칠보광이척위일필

 

이 글은 유인궤가 썼다. 입술에 피를 바르는 절차를 마친 후, 제단의 북쪽 땅에 제물을 묻고 우리 종묘에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어서 유인궤는 우리의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왕자 정명(政明)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 일선ㆍ거열 두 주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하서주로 운반하였다. 예전에는 명주와 베 열 발을 한 필이라고 했는데, 길이 일곱 보 넓이 두 자를 한 필로 고쳐 정하였다.

 

六年春二月 京都地震 夏四月 靈廟寺災 大赦 天存之子漢林 庾信之子三光 皆以奈麻入唐宿衛 王以旣平百濟 欲滅高句麗 請兵於唐 冬十二月 唐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司列少常伯安陸郝處俊副之 以擊高句麗 高句麗貴臣淵淨土 以城十二 戶七百六十三 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淨土及從官二十四人 給衣物糧料家舍 安置王都及州府 其八城完 並遣士卒鎭守

육년춘이월 경도지진 하사월 영묘사제 대사 천존지자한림 유신지자삼광 개이나마입당숙위 왕이기평백제 욕멸고구려 청병어당 동십이월 당이이적위요동도행군대총관 이사열소상백안륙학처준부지 이격고구려 고구려귀신연정토이성이십 호칠백육십산 구삼천오백사십삼래투 정토급종관이십사인 급의물양료가사 안치왕도급주부 기팔성완 병견사졸진수

 

6(서기 666) 2, 서울에 지진이 났다. 여름 4,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은 모두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임금은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 당나라는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인 안륙현(安陸縣) 사람 학처준(郝處俊)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淵淨土)127633543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연정토 및 따라온 관리 24명에게 의복과 식량과 집을 주고 서울과 주()ㆍ부()에 안주시켰고, 열두 성 중 여덟은 온전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지키도록 하였다.

 

七年秋七月 大酺三日 唐皇帝勅以智鏡愷元爲將軍 赴遼東之役 王卽以智鏡爲波珍飡 愷元爲大阿飡 又皇帝勅以日原大阿飡爲雲麾將軍 王命於宮庭受命 遣大奈麻汁恒世 入唐朝貢 高宗命劉仁願金仁泰從卑列道 又徵我兵 從多谷海谷二道 以會平壤

秋八月 王領大角干金庾信等三十將軍 出京

九月 至漢城停以待英公

칠년칠월 대포삼일 당황제칙이지경개원위장군 부요동지역 왕즉아자경위파진찬 개월위대아찬 우황제칙이일원대아찬위운휘장군 왕명어궁정수명 견대나마즙항세 입당조공 고종명유인원김인태종비열도 우징아병 종다곡해곡이도 이회평양

추팔월 왕령대각간김유신등삼십장군 출경

구월 지한성정이대영공

 

7(서기 667) 가을 7, 사흘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장에 가도록 하였다. 임금이 곧장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조칙을 내려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자,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汁恒世)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가도록 하고, 또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가을 8, 임금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冬十月二日 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 差遣尒同兮村主大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 至漢城移書 以督兵期 大王從之

十一月十一日 至獐塞 聞英公歸 王兵亦還 仍授江深位級飡 賜粟五百石

동십이일 영공도평양성북이백리 차견이동혜촌주대나마강심 솔거란기병팔십여인 역아진함성 지한성이서 이독병기 대왕종지

십일월 십일일 지장색 문영공뒤 왕병역환 잉수강심위급찬사속오백석

 

겨울 102, 영공이 평양성(平壤城)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여 이동혜(尒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에 이르러 서신을 전하고 군사의 동원 날짜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그 말에 따라 1111일에 장색(獐塞)에 당도했으나,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임금의 군사 또한 돌아오게 되었다. 강심에게 급찬의 관등을 주고 벼 5백 섬을 내려주었다.

 

十二月 中侍文訓卒 唐留鎭將軍劉仁願 傳宣天子勑命 助征高句麗 仍賜王大將軍旌節

십이월 중시문훈졸 당유진장군유인원 전선천자칙령 조정고구려 잉사왕대장군정절

12,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나라의 주둔 장군 유인원이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는 천자의 칙명을 전하고, 임금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八年春 阿麻來服 遣元器與淨土入唐 淨土留不歸 元器還 有勅此後禁獻女人

팔년춘 아마래복  견원기여정토입당 정토유불귀 원기환 유칙하후금헌여인 

 

8(서기 668) ,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원기(元器)와 정토(淨土)를 당에 보냈다. 정토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황제가 칙명을 내려 이후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三月 拜波珍飡智鏡爲中侍 置比列忽州 仍命波珍飡龍文爲摠管

삼월 배파진찬지경위중시 치비열홀주 잉명파진찬용문위총관 

 

3,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았다.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

 

夏四月 彗星守天船

하사월 혜성수천선

 

여름 4, 혜성이 천선(天船) 별자리에 나타났다.

 

六月十二日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奉皇帝勅旨 與宿衛沙飡金三光到黨項津 王使角干金仁問 廷迎之以大禮 於是 右相約束訖 向泉岡 

유월십이일 요동도안무부대사요동행군뷰대총관겸웅진도안무대사행군총관우상검교태자재중호상주국악성현개국남유인궤 봉황제칙지 여숙위사찬금삼광도당항진 왕사각간김인문 정영지이대례 어시 우상약속흘 향천강 

 

612,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검교태자좌중호상주국낙성현개국남(右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 김삼광(金三光)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에게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날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二十一日 以大角干金庾信爲大幢大摠管 角干金仁問欽純天存文忠迊飡眞福波珍飡智鏡大阿飡良圖愷元欽突 爲大幢摠管 伊飡陳純[一作春]竹旨 爲京停摠管 伊飡品日迊飡文訓大阿飡天品 爲貴幢摠管 伊飡仁泰 爲卑列道摠管 迊飡軍官大阿飡都儒阿飡龍長 爲漢城州行軍摠管 迊飡崇信大阿飡文穎阿飡福世 爲卑列城州行軍摠管 波珍飡宣光阿飡長順純長 爲河西州行軍摠管 波珍飡宜福阿飡天光 爲誓幢摠管 阿飡日原興元 爲罽衿幢摠管 

이십일일 이대각간김유신위대당대총관 각간김인문흠순천존문충잡찬진복파진찬지경대아찬양도개원음돌위대당총관 이찬진순(일작춘)죽지 위경정총관 이찬품일잡찬문훈대아찬천품 위귀당총관 이찬인태 위비열도총관 잡찬군관대아찬도유아찬용장 위한성주행군총관 잡찬숭신대아찬문영아찬복세 위비열성주행군총관 파진찬선광아찬장순순장 위하서주행군총관 파진찬선복아찬천광 아찬일원흥원 위개금당총관

 

21,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ㆍ흠순ㆍ천존ㆍ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ㆍ개원ㆍ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진순(陳純[혹은 ()’이라 한다.])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삼고, 이찬 품일과 잡찬 문훈ㆍ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삼고, 잡찬 군관ㆍ대아찬 도유(都儒)ㆍ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잡찬 숭신(崇信)ㆍ대아찬 문영ㆍ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宣光)과 아찬 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삼고, 아찬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二十二日 府城劉仁願遣貴干未肹 告高句麗大谷城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 王遣一吉飡眞功稱賀 仁問天存都儒等 領一善州等七郡及漢城州兵馬 赴唐軍營 

이십이일 부성유인원견귀간미힐 고고구려대곡성한성등이군십이성귀복 왕견일길찬진공칭하 인문천존도유등 영일선주등칠군급한성주병마 부당군영

 

22,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212성이 항복해왔음을 보고하였다. 임금은 일길찬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다.

인문, 천존, 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 및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갔다

 

二十七日 王發京赴唐兵

이십칠일 왕발경부당병

 

 

27, 임금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갔다..

 

 

二十九日 諸道摠管發行 王以庾信病風留京 仁問等遇英公 進軍於嬰留山下(嬰留山在今西京北二十里)

이십구일 제도총관발행 왕이유신병풍류경 인문등우영공 진군어영류산하(영류산재금서경북이십리)

 

29, 여러 도총관들이 출발하였다. 임금은 풍병을 앓고 있는 유신을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嬰留山지금의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秋七月十六日 王行次漢城州 敎諸摠管往會大軍 文穎等遇高句麗兵於蛇川之原 對戰大敗之

추칠월십육일 왕행차한성주 교도총관왕회대군 문영등우고구려병어사천지원 대전대패지

 

가을 716, 임금이 한성주에 행차하여 각 총관들에게 당나라 군대와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蛇川)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와 마주쳐 싸워서 크게 쳐부수었다

九月二十一日 與大軍合圍平壤 高句麗王先遣泉男産等 詣英公請降 於是 英公以王寶臧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廻唐 角干金仁問大阿飡助州隨英公歸 仁泰義福藪世天光興元隨行 初 大軍平高句麗 王發漢城指平壤 次肹次壤 聞唐諸將已歸 還至漢城 

구월이십일일 여대군합위평양 고구려왕선견천남산등 지영공청린 어시 영겅이왕실척왕자복남덕남대신등이십여만구회당 각간김인문대아찬조주수영공귀 인태의복수세천광여원수행 초 대군평고구려 왕발한성지평양 차힐차양 문당제장이귀 환지한성

 

921,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고구려왕은 먼저 천남산(泉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만나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ㆍ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 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ㆍ의복ㆍ수세ㆍ천광ㆍ흥원 등도 수행하였다처음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 임금은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冬十月二十二日 賜庾信位太大角干 仁問大角干 已外伊飡將軍等竝爲角干 蘇判已下竝增位一級 大幢少監本得 蛇川戰功第一 漢山州少監朴京漢 平壤城內殺軍主述脫 功第一 黑嶽令宣極 平壤城大門戰功第一 竝授位一吉飡 賜租一千石;

동시월이십이일 사유신위태대각간 이외이찬장군등병위각간 소판이하병증위일급 대당소감본득 사천전공재알 한산주소감박경한 평양성내살군주술탈 공재일 흑악영선극 평양성대문전공제일 병수위일길찬 사조일천석;

 

겨울 1022, 유신에게 태대각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주었다. 그밖에 이찬과 장수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을 올려주었다. 대당 소감 본득(本得)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述脫)을 죽인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의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기에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벼 1천 섬을 내려주었다.

 

誓幢幢主金遁山 平壤軍營戰功第一 授位沙飡 賜租七百石 軍師南漢山北渠 平壤城北門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一千石 軍師斧壤仇杞 平壤南橋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七百石 假軍師比列忽世活 平壤少城戰功第一 授位高干 賜粟五百石 漢山州少監金相京 蛇川戰死 功第一 贈位一吉飡 賜租一千石 牙述沙飡求律 蛇川之戰 就橋下涉水出 與賊鬪大勝 以無軍令 自入危道 功雖第一而不錄 憤恨欲經死 旁人救之 不得死 

서당당주금둔산 평양군영전공제일 수위사찬 사조칠백석 군사남한산북거 평양성북문전공제일 수위술한 사속일천석 군사부양구기 평양남교전공제일 수위술한 사속칠백석 사군사비열홍세활 평양썽전공제일 수위고간 사속오백석 한산주소감김상경 사천전사 공제일 증위일긱ㄹ찬 사조일천석 아술사찬구율 사천지전 치교하섭수출여적투대승 이무군영 자입위도 ㄱ5ᅟᅩᆼ수제일이불록 분한욕경사 방인구지 부득사

 

서당 당주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관등과 벼 7백 섬을 내려주었다. 군사인 남한산(南漢山) 사람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기에 술간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내려 주었고, 군사인 부양(斧壤) 시람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백 섬을 내려주었다. 가군사(假軍師)인 비열홀 사람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고간의 관등과 벼 5백 섬을 내려주었다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 싸움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벼 1천 섬을 내려주었다.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군하여 적군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첫째가는 공을 세웠지만 봉록을 주지 않았다. 그는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고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 못했다.

 

二十五日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飡 私設筵 饗王及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歲 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頗厚 

이십오일 왕환국 욕돌역 국원사신용장대아찬 사설연 향왕급제시종 급악작 나마취주자능안년십오세 정가야지무 왕견용의단려 소전무배 이금잔권주 사폐백파후

 

25, 임금이 귀국하던 길에 욕돌역(褥突驛)에 머물렀는데, 국원(國原)의 관리인 대아찬 용장이 사사로이 잔치를 열어 임금과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인 15살 소년 능안(能晏)이 가야의 춤을 추었다. 임금이 그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앞으로 불러 등을 두드려주며 금술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幣帛)을 파격적으로 후하게 주었다.

 

十一月五日 王以所虜高句麗人七千入京 

십일월오일 왕이소노고구려인칠천입경

 

115, 임금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

 

六日 率文武臣寮 朝謁先祖廟 告曰 祗承先志 與大唐同擧義兵 問罪於百濟高句麗 元凶伏罪 國步泰靜 敢玆控告 神之聽之 

육일 솔문무신료 조알선조묘 고왈 기승건지 여대당동학의병 문죄어백베고구려 원흉복죄 국보태정 감자공고 신지청지

 

6,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삼가 앞선 임금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여 나라의 운명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옵니다. 신령께서는 들어주소서!”

 

十八日 賚死事者 少監已上十□□匹 從者二十匹 

십팔일 뢰사사자 소감이상십**필 종자이십필

 

18,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 폐백을 내려 주었는데 소감(少監) 이상에게는 십**, 종자에게는 20필을 주었다.

 

十二月 靈廟寺災 영묘사재

 

12, 영묘사에 불이 났다.

 

九年春正月 以信惠法師爲政官大書省 唐僧法安來傳天子命求磁石

구년춘정월 이신혜법사위정관대서성 당승법안래전천자명구자석

 

9(서기 669) 봄 정월, 신혜법사(信惠法師)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았다.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자석(磁石, 철을 끌어당기는 돌)을 구하라는 천자의 명을 전했다.

 

二月二十一日 大王會群臣 下敎 往者 新羅隔於兩國 北伐西侵 暫無寧歲 戰士曝骨 積於原野 身首分於庭界 先王愍百姓之殘害 忘千乘之貴重 越海入朝 請兵絳闕 本欲平定兩國 永無戰鬪 雪累代之深讐 全百姓之殘命 百濟雖平 高句麗未滅 寡人承克定之遺業 終已成之先志 今兩敵旣平 四隅靜泰 臨陣立功者 竝已酬賞 戰死幽魂者 追以冥資 但囹圄之中 不被泣辜之恩 枷鏁之苦 未蒙更新之澤 言念此事 寢食未安 可赦國內 自總章二年二月二十一日昧爽已前 犯五逆罪死已下 今見囚禁者 罪無小大 悉皆放出 其前赦已後犯罪奪爵者 竝令依舊 盜賊人 但放其身 更無財物可還者 不在徵限 其百姓貧寒 取他穀米者 在不熟之地者 子母俱不須還 若在熟處者 至今年收熟 只還其本 其子不須還 今月三十日爲限 所司奉行

이월이십일일 대왕회군신 하교 왕자 신라격어양국 불벌서침 서무영세 전사폭골 적어원야 신수분어정계 선왕위백성지잔해 망천승지귀중 월해입조 청병강궐 본욕평정양국 영무전투 설누대지심수 전백성지잔명 백제수평 고구려미멸 과인승극정지유업 종이성지선지 금양적기평 사우정태 임진립공자 병기수상 전사유혼자 추인명자 단영어지중 불피읍고지은 가소지고 미몽경신지택 언념차사 침식미안 가사국내 자총장이년이월이십일일매상지전 범오약죄사이하 금견수금자 죄무소대 실개방출 기전사이후범죄탈작자 병영의구 도적인 단방기신 경무제물가환자 부제미한 기백성빈한 취타곡밎 재불숙지자자 자모구불수환 약재열처자 지금년수숙 지환기본 기자불수환 금월삼십일위한 소사봉행

 

221,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침입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따로 떨어져 멀리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중한 신분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조회하고 병사를 요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전쟁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쌓인 깊은 원한을 갚고,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 비록 백제를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미처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는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영혼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며 아직 새로이 시작할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니,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총장(總章) 2(서기 669) 221일 새벽 이전에 5(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의 이하로써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석방하고, 이전에 사면을 받은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벼슬을 빼앗긴 사람도 모두 그 전과 같게 하라. 도적질한 자는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 중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이자와 원금을 반드시 갚지 않아도 되게 하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곡식이 익을 때에 단지 빌린 만큼만 갚고 그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리라. 이달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夏五月 泉井比列忽各連等三郡民饑 發倉賑恤 遣祇珍山級飡等 入唐獻磁石二箱 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飡 入唐謝罪

하오월 천정비열홀각연등삼군민기 발창진휼 견기진간그2찬등 입당헌자석이상 우견흠순각간양도파진찬 입당사죄

 

여름 5, 천정(泉井), 비열홀(比列忽), 각련(各連)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沙飡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造弩射一千步 今纔三十步 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劫之以重罪 而終不盡呈其能

동당사도전초 여노사구진천사찬회 명조목노 방전삼십보 제문왈 문재이국조노사일천보 금재삼십보 하야 대왈 재불량야 약취재본국 즉가이작지 천자강사구지 즉견복한대나마헌목 내명개조 사지육십보 문기고 답왈 신역불능지기소이연 태목과해 위습기소침자여 천자의기고불위겁지이중죄 이종불진정기능

 

겨울,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사찬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돌아갔다. 당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를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보나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구나.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길 목재가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목재를 달라고 하였다. 곧바로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고쳐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60보를 나갔다. 황제가 그 까닭을 물으니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황제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구진천은 끝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頒馬阹凡一百七十四所 屬所內二十二 宮十 賜庾信太大角干六 仁問太角干五 角干七人各三 伊飡五人各二 蘇判四人各二 波珍飡六人大阿飡十二人各一 以下七十四所 隨宜賜之

반마거범일백칠십사고 속소내이십이 궁십 사유신태대각간육 인문태각간오 각간칠인각삼 이찬오인각이 소판사인각이 파진찬육인대아찬십이인각일 이하칠십사소 수의사지

 

임금이 말을 기르는 우리 174곳을 나누어 주었는데, 관리하는 관청에 22, 궁궐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태대각간 유신에게 6, 대각간 인문에게 5, 각간 일곱 명에게 각각 3, 이찬 다섯 명에게 각각 2, 소판 네 명에게 각각 2, 파진찬 여섯 명과 대아찬 열두 명에게 각각 1곳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 74곳은 적당하게 나누어 주었다.

 

十年春正月 高宗許欽純還國 留囚良圖 終死于圓獄 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 皇帝責怒 再留使者

십년춘정월 고종허흠순환국 유수양도 종사우원옥 이왕천취백제토지유민 황제책노 재유사자

 

10(서기 670) 봄 정월, 당 고종이 흠순은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우리 임금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질책하고 성을 내어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三月 沙飡薛烏儒與高句麗太大兄高延武 各率精兵一萬 度鴨淥江 至屋骨 □□□靺鞨兵先至皆敦壤待之

삼월 사찬설오유여고구려태대형고연무 각솔정병일만 도압록강 지옥골 ***말ㄹ갈병선지개동양대지

 

3,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夏四月四日 對戰 我兵大克之 斬獲不可勝計 唐兵繼至 我兵退保白城

하사월사일 대전 아병대극지 참뢱불가승계 당병계지 아병퇴보백성

 

여름 44, 대적하여 싸워서 우리 병사가 크게 이겼으니, 목을 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병사가 계속 당도하였기에 우리 병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키고 있었다.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 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永世盡忠 王處之國西金馬渚 漢祇部女人 一産三男一女 賜粟二百石

유월 고구려수임성인모잠대형 수합잔민 자궁모성 지패강남 살당관인급승법안등 향신라행 지서해사야도 갼고구려대신연정토지자안승 영치한성중 봉이위군 견소형다식등 애고왈 흥멸국계절세 천하지공의 유대국시망 아국선왕이실도견멸 금신등득국귀족안승 봉이위군 원작번병 영세진충 왕처지국서금마저 한기부여인일산삼남일녀 사속이백석

 

6,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임금은 그들을 서쪽 지방인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漢祗部)의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곡식 2백 섬을 주었다.

 

 

秋七月 王疑百濟殘衆反覆 遣大阿湌 儒敦於熊津都督府 請和 不從 乃遣司馬禰軍窺覘 王知謀我 止禰 軍不送 擧兵討百濟 品日·文忠·衆臣·義官·天官等 攻取城六十三 徙其人於內地 天存竹旨等取城七 斬首二千 軍官文穎取城十二 擊狄兵 斬首七千級 獲戰馬兵械甚多

추칠월 왕의백제잔중반복 견대아찬 유돈어웅진도독부 청화 불종 내견사마예군규점 왕지모아지예 군불송 거병토백제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등 공위성육십삼 사기인어내지 천존죽지등취겅칠 참수이천 군관문영취성십이 격적병 참수칠천급 획전마병계심다

 

가을 7, 임금은 백제의 잔당이 배반할까 염려하여 대아찬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이에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임금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사마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보내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토벌하였다. 품일ㆍ문충ㆍ중신ㆍ의관(義官)ㆍ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기도록 하였다. 천존과 죽지 등은 7곳의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곳의 성을 빼앗고 적병을 쳐서 7천 명의 목을 베고 말과 병장기를 매우 많이 획득하였다.

 

王還 以衆臣義官達官興元等□□□寺營退却 罪當死 赦之免職 倉吉于□□□□一 各授位級飡 賜租有差

왕환 이중신의관달궁관흥원등***사영퇴각 죄당사 사지면직 창길우****일 각수위급찬사조유차

 

임금이 돌아와 중신ㆍ의관ㆍ달관ㆍ흥원 등은*** ()의 군영에서 퇴각하였기에 그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용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 ()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고, 공적에 따라 벼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견사찬수미산 봉안승위고구려왕 기책왈 유함형원년세차경오추팔월일일신축 신라왕치명고구려사자안승 공태조중모왕 적덕북산 입공남해 위풍진어청구 인교피어현토 자손상계 본지부절개지천리 연장팔백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서기 670) 가을 8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 고구려를 의미)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 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지어건산형제 화기소장 흔성골육 가국파망 종사인멸 생인파탕 무소탁심 공피위난어산야 투단신어린국 유리신고 적동진문 경흥망국 사등위후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夫百姓不可以無主 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 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부백성불가이무주 황천필유이권명 선왕정사 유공이기 주어제사 비공이수 근견사일길찬김수미산등 취피책명공위고구려왕 공의무집유민 소흥구서 영위린국 사동곤제 졍재경제 겸송갱미이천석 감구마일필 릉오필 견세포각십필 면십오칭 왕기영지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써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 목화 15()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十二月 土星入月 京都地震 中侍智鏡退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십이월 토성입월 경도지진 중시지경퇴 왜국경호일본 자언근일소출이위명

 

12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지진이 났다. 중시 지경이 퇴임하였다.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漢城州摠管藪世取百濟□□□□□□國 適彼事覺 遣大阿飡眞珠 誅之(十二□□□賁書所六□□僵事同異可攷)

한성주총관수세취백제******국 적피사각 견대아찬진주 주지(십이***비서소육**강사동이가고)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백제의******를 취하고 저쪽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12***책이 글 6**으로 줄어 같은 듯인지를 알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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