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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


太宗武烈王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飡龍春(一云龍樹)之子也[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妃 文明夫人 舒玄角飡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事眞德 位歷伊飡 唐帝授以特進 及眞德薨 群臣請閼川伊飡攝政 閼川固讓曰 臣老矣 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 莫若春秋公 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三讓 不得已而就位

태종무열왕립 휘춘추 진지왕자이찬용춘(일운용수)지자야 [당서이위진덕지제 오야] 모 천명부인 진평왕녀 비 문명부인 서현각찬여야. 왕의표영위 유년제세지 사진덕 위력이찬 당제수이특진 급진덕훙 군신청알천이찬섭정 알천고양왈 신노의 무덕행가칭 금지덕망숭중 막여춘추공 실가위제세영웅의 수봉위왕 춘추삼양 부득이취립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다.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혹은 용수(龍樹))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 서현(舒玄)의 딸이다. 임금은 용모가 영준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을 품고 있었다. 진덕(眞德)을 섬겨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特進)을 제수하였다. 진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묵직하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만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元年 夏四月 追封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大赦, 五月 命理方府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唐遣使持節備禮 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王遣使入唐表謝

원년 하사월 추봉광고위문흥대왕 모위문정왕후 대사, 오월 명리방부영양수등 상작율령 수정이방부격육십여조 당견사지절비례 책명위개부의동삼사신라왕 왕견사입당표사

 

원년(서기 654) 여름 4,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으며 대사면을 하였다. 5,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히 살펴 이방부의 율령 60여 조를 가다듬어 정하게 하였다. 당나라가 부절을 가진 사신을 보내어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伊飡金剛爲上大等 波珍飡文忠爲中侍 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 侵軼我北境 取三十三城 王遣使入唐求援 三月 唐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 發兵擊高句麗 立元子法敏爲太子 庶子文王爲伊飡 老且爲海飡 仁泰爲角飡 智鏡愷元各爲伊飡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王女智照下嫁大角飡庾信 立鼓樓月城內

이년 춘정월 배이찬금강위상대등 파진찬문충위중시 고구려여백제말갈연병 침일아북경 취삼십삼성 왕견사입당구원 삼월 당견영주군독정명진좌우위중랑장소정방 발병격고구려 립원자법민위태자 서자문왕위이찬 노차위해찬 인태위각찬 지경개원각위이찬 동시월 우수주헌백록 굴불군진백저 일수신팔족 왕녀지조하가각찬유신 입고루월성.

 

2(서기 655) 봄 정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고,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더불어 병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에 침략하여 33성을 빼앗았기에,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병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겨울 10,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바쳤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이었다.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秋七月 遣子右武衛將軍文王 朝唐

삼년 김인문자당귀 수임군주 감축장산성 추칠월 견자우무위장군문왕 조당.

 

3(서기 656)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왔다. 군주(軍主)로 임명하여 장산성(獐山城)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가을 7, 아들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興輪寺門自壞 □□□北巖崩碎爲米 食之如陳倉米

사년 추칠월 일선군대수 익사자삼백여인 동토함산지연 삼년이멸 흥륜사문자괴 ***북암붕쇄위미 식지여진창미

 

4(서기 657) 가을 7,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졌다. 흥륜사(興輪寺)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원문에 3자 빠져있음]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그것을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五年 春正月 中侍文忠改爲伊飡 文王爲中侍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오년 춘정월 중시문충개위이찬 문왕위중시 삼월 왕이하슬아지연말갈 인불능안 파경위주 치도독이진지 우이실직위북진

 

5(서기 658)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바꾸어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3, 임금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한다고 여겨 경()을 폐지하여 주()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 군을 북진(北鎭)군으로 삼았다.

 

六年 夏四月 百濟頻犯境 王將伐之 遣使入唐乞師 秋八月 以阿飡眞珠爲兵部令 九月 何瑟羅州進白鳥 公州基郡江中大魚出死 長百尺 食者死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 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육년 하사월 백제번범경 왕장벌짖 견사입당걸사 추팔월 이아찬진주위병부령 구월 하슬라주진백조 공구기군강중대어출사 장백척 식자사 동시월 왕좌조 이청구어당 불복 우형어색 홀유인어왕전 약선신장춘파랑자 언왈 신수고골 유유보국지심 작도대당 인득황제명대장군소정방등 영병이래년오월 래벌백제 이대왕근저여차 고자공고 언필이멸 왕대경이지 후상양가자손잉명소사 창한산주장의사 이자명복

 

6(서기 659)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임금이 장차 그들을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9,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백 자나 되었으며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 임금이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보고가 오지 않기에 근심하는 모습으로 조정에 앉아있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임금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이미 죽은 신하인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희는 비록 죽어 백골이 되었으나 여전히 나라에 보은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당나라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정벌하도록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나도 심히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말을 끝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임금이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여기어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七年 春正月 上大等金剛卒 拜伊飡金庾信爲上大等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軍 以伐百濟 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 使將兵 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艣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王次今突城

칠년 춘정월 상대등금강졸 배이찬김유신위상대등 삼월 당고종명좌무위대장군소정방 위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위부대총돤 수좌효위장군유백영등수륙십삼만군 이벌백제 칙왕위우이도행군총관 사장병 위지성원 하오월이십육일 왕여유신진주천존등 영병출경 유월십팔일 차남천정 정방발자래주 축로천이 수류동하 이십일일 왕견태자법민 영병선일백소 영정방어덕물도 정방위법민왈 오욕이칠울십일지백제남 여대왕병회 도피의자도성 법민왈 대왕입시대군 여문대장군래 필욕식이지 정방희 환견법민징신라병마 법민지 언정방군세심성 왕희부자승 우명태자여대장군유신장군품일흠춘(춘혹작순)등 솔병오만 응지 왕차금돌성

 

7(서기 660)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여름 526, 임금이 유신, 진주, 천존(天存) 등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천리에 이어질 정도로 많은 병선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 임금이 태자 법민을 시켜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왕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소정방 군대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을 혹은 순()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응원하도록 하고, 임금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秋七月九日 庾信等 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階伯 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盤屈曰 謹聞命矣乃入陣 力戰死

추칠월칠일 유신등 진군어황산지원 백제장군계백 옹병이지 선거험 설삼영이대 유신등 분군위삼도 가전불리 사졸역갈 장군흠순위자반국왈 위신막약충 위자막약효 견위치먕 충효양전 반굴왈 근문명의 내입진 역전사

 

가을 79, 유신 등이 황산(黃山) 들판으로 진군하였다.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의 힘이 다하였을 무렵,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반굴이 말하였다.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左將軍品日 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纔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좌장군품일 환자관장(일운관창) 입어마전 지제장왈 오아년재십육 지기파용 금일지역 능위삼군표적호.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혹은 관창(官昌)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내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官狀曰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階伯 階伯俾脫冑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乃許生還

관장왈 유 이갑마단창 경부적진 위적소금 생치계백 계백비탈주 애기소차용 불인가해 내탄왈 신라불가적야 소년상여차 황장사호 내허생환.

 

관장이 !”라 대답하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서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에 달려들어 갔다. 관장은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고는, 나이가 어린데도 용감한 것을 아끼어 차마 해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까지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관장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搴旗者 非畏死也言訖 以手掬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관장고부왈 오입적중 불능참장건기자 비외사야 언흘 이수국정수음지 경향적진질투 계백금참수 계마안이송지.

 

관장이 본진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맹렬히 싸웠다. 계백이 다시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三軍見之 慷慨有死志 鼓噪進擊 百濟衆大敗 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품일집기수 유혈습몌 왈 오아면목여생 능사어왕사 행의 삼군견지 강개유사지 고조진격 백제중대패 계백사지 노좌평충상,상영들이십여인.

 

품일이 그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기가 복 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었다.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시일 정방여부총관금인문등 도기벌포 우백제병 역전대패지 유신등지당영 정방이유신등후기장참신라독군김문영(혹작영)어군문

 

이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병사들과 마주쳐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혹은 영()이라고 한다.]을 군문에서 목베려 하였다.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鞘

유신언어중왈 대장군불견황산지역 장이후기위죄 오불능무죄이수욕 필선여당군결전 연후파백제 내장월군문 노발여직 기요간보검 자약출초.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 가지고 죄를 삼으려 하는구나. 나는 죄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나라 병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곧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고 군문에 서자 그의 성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定方右將蕫寶亮躡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정방우장동보량섭족왈 신라병장유변야 정방내석문영지죄 백제왕자사좌평각가 이서어당장군애걸퇴병.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구르며 말하였다. “신라 병사들의 마음이 변하려고 합니다.” 정방이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물릴 것을 애걸하였다.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십이일 당라군***위의자도성 진어소부리지원 정방유소기불능전 유신설지 이군용감 사도제진.

 

12, 당나라와 신라군이(원문에 3글자 빠져있음)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所夫里, 충남 부여) 들판으로 나아갈 즈음에, 정방이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어 진군하지 않고 있었다.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병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되었다.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甕餼豊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 又揮之.

백제왕자우사상좌평치옹희풍전 정방각지 왕서자신여좌평육인지전걸죄 우휘지.

 

백제의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여섯 사람의 좌평들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은 그것도 물리쳤다.

 

十三日 義慈率左右 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 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십삼일 의자솔좌우 야둔주 보웅진성 의자자융여대좌평천복등 출항 법민궤륭어마전 타면매왈

 

13, 의자왕이 가까운 신하들만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몸을 보전하자, 의자왕의 아들 융()이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隆伏地無言

향자 여부왕살아매 매지옥중 사아이십년간 통심질수 금일여명재오수중 융복지무언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십팔일 의자솔태자급웅진방령군등 자웅징성내항 왕문의자항 이십구일 자금돌성지소부리성 견제감천복 로포어대당.

 

18,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熊津方)의 병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임금이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당도하여, 제감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하였다.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士 王與定方及諸將 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群臣莫不嗚咽流涕 是日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 故斬之.

팔월이일 대치주노장사 왕여정방급제장 와어당사 좌의자급자융어당하 혹사의자행주 백제좌평등군신막불명연유체. 시일포참모척 모척본신라인 망입백제 여대야성검일동모함성 고참지.

 

82,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였다. 임금과 정방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 앉도록 하고는 가끔씩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쳐서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성이 함락되도록 한 일이 있었기에 목을 벤 것이다.

 

又捉黔日 數曰 汝在大耶城 與毛尺謀 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 罪一也 逼殺品釋夫妻 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 罪三也以四支解 投其尸於江水.

우착검일 수왈 여재대야성 여모척모 인백제지병 소망창고 경일성핍식치패 죄일야 핍살품석부처 죄이야 여백제래공본국 죄삼야 이사지해 투기시어강수.

또한 검일을 잡아 죄목을 따져가며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병사를 끌어들여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 백제와 함께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리고는 그의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百濟餘賊據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庄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嶮 不能克 但攻破小柵.

백제야작가님짐장현***성 우좌평정무취중장두시원악 초략당라인 이십육일 공임존대책 병다지험 불능극 단공파소책.

 

백제의 잔병들이 남잠(南岑)과 정현(貞峴) *** 등의 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豆尸原) 산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 사람을 노략질하였다. 26, 임존(任存, 충남 예산)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적의 병사가 많고 지세가 험악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성채만을 쳐서 깨뜨렸다.

 

九月三日 郞將劉仁願 以兵一萬人 留鎭泗沘城 王子仁泰與沙飡日原級飡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沘乘舡廻唐 金仁問與沙飡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구월삼일 낭장유인원 이병일만인 유진사비성 왕자인태여사찬일원급창길나 이병칠천부지 정방이백제왕급왕족신료구십삼인 백성일만이천인 자사비승항회당 김인문여사찬유돈대나마중지등계행.

 

93,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이 병사 1만 명을 데리고 사비성(泗沘城, 충남 부여)에 남아 진을 쳤고,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병사 7천 명을 데리고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二十三日 百濟餘賊入泗沘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沘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 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이십삼일 백제여적입사비 모략생항인 유수인원출당라인 격주지 적퇴상사비남령 수사오책 둔취사극 초략성읍 백제인반이응자이십여성.

 

23,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보내 그들을 쳐서 쫓아내었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성의 남쪽 마루에 올라 너댓 군데에 울타리를 세우고 진을 치고서 기회를 엿보다가 성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들 중에 배반하여 그들에게 호응한 성이 20여 곳이나 되었다.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당황제견좌위중랑장왕문도 능웅진도독.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이십팔일 지삼년산성 전조 문도면동립 대왕면서립 석명후 문도욕이선물수왕 홀질작변사 종자섭위필사.

 

28,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마주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임금에게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어버렸기에, 왕문도의 시종이 대신하여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마쳤다.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尒禮城 시월구일 왕솔태자급제군공이례성

十八日 取其城置官守 百濟二十餘城震懼 皆降 십팔일 취기것치관수 백제이십여성진구

三十日 攻泗沘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삼십일 공사비남영군책 참수일천오백인

 

109, 임금이 태자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공격하였다.

18,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하다가 모두 항복하였다.

30, 사비의 남쪽 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5백 명의 목을 베었다.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主匹夫死之 십일월일일 고구려침공칠중성 군주필부사지

五日 王行渡雞灘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오일 왕행도계탄공왕흥사잠성 칠일내극 참수칠백인

 

111,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匹夫)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5일에 임금이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이겨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二十二日 王來自百濟 論功 以罽衿卒宣服爲級飡 軍師豆迭爲高高干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 許職有差 百濟人員並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授位一吉飡 充職摠管 恩率武守授位大奈麻 充職大監 恩率仁守授位大奈麻 充職弟監

이십이일 왕애자백제 논공 이계금졸선복위급찬 군사두질위고고관 전사유사지미지활보홍이설유등사인 허직유차 백제인원병량재임용 좌평중상상영 달솔자간수위일길찬 충직총관 은솔무수수위대나마 충식대감 은솔인수수위대나마 충식제감

 

22, 임금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였다. 계금의 병졸 선복(宣服)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 두질(豆迭)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공적에 따라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위를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위를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위를 맡게 하였다.



八年春二月 百濟殘賊來攻泗沘城 王命伊飡品日爲大幢將軍 迊飡文王大阿飡良圖阿飡忠常等副之 迊飡文忠爲上州將軍 阿飡眞王副之 阿飡義服爲下州將軍 武欻旭川等爲南川大監 文品爲誓幢將軍 義光爲郞幢將軍 往救之

팔년춘이월 백제잔적래공사비성 왕명이찬품일위대당장군 잡찬문왕대아찬양도아찬충상부지잡찬문충위상주장군 아찬진왕부지 아찬의복위하주장군 무훌욱천등위남천대감 문품위서당장군 의광위랑당장군 왕구지.

 

8(서기 661) 2,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 임금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忠常)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郞幢將軍)으로 삼아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三月五日 至中路 品日分麾下軍 先行往豆良尹(一作伊)城南 相營地 百濟人望陣不整 猝出急擊不意 我軍驚駭潰北

삼월오일 지중로 품일분휘하군 선행왕두량윤(일작이)성남 상영지 백제인망진부정 졸출급갹불의 아군경해궤배

 

35, 길을 가던 중에 품일이 휘하의 군대를 나누어 두량윤[혹은 이()이라고도 한다.](豆良尹城) 남쪽에 먼저 가서 진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신라군의 진영이 채 정돈되지 않았음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갑자기 나와 의외의 습격을 하니, 우리 병사들이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小 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십이일 대군래둔고사비성외 진공두량윤성 일삭유육일 불극 하사월십구일 반사 대당서당선행하주군전후 지빈골양 우백제군 상투패퇴 사자수소 실망병계치중심다 상주랑당우적어각산 이진격극지 수입백제둔보 참획이천급

 

12,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진을 치고,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다가, 여름 419일에 군대를 되돌렸다. 대당과 서당이 먼저 가고 하주의 군대를 뒤따르게 하였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 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의 낭당군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나 싸워 이기고 마침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王聞軍敗大驚 遣將軍金純眞欽天存竹旨濟師救援 至加尸兮津 聞軍退至加召川 乃還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왕문군패대경 견장군김순진흠천존죽지제사구원 지가시혜진 문군퇴지가소천 내환 왕이제장패적 논벌유차.

 

임금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天存), 죽지(竹旨)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당도하여 적군이 가소천(加召川)까지 물러났다는 것을 듣고 되돌아왔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되, 정도에 따라 차등있게 벌을 주었다.

 

五月九日(一云十一日) 高句麗將軍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 來攻述川城 不克 移攻北漢山城 列抛車飛石 所當陴屋輒壞 城主大舍冬陁川使人擲鐵蒺蔾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廩廥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絙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오월구일(일운십일일) 고구려장군뇌음신여말갈장군생해합군 래공술천성 불극 이공북한산성 열포차비석 소당비옥첩괴 성주대동타천사인 철철질리어성외 인마불행능 추파안양사름광 수기재 수성괴처 즉구위누로 결환망 현우마피면의 내설노포이수.

 

59(또는 11일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대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 이기지 못하고 이동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투석기를 벌여놓고 바위를 날려보내니 그것에 맞은 성곽과 건물이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冬陁川)이 사람들을 부려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놓고, 그 안에 노포(弩砲, 쇠뇌, 쇠로 된 발사장치가 달린 활)를 설치하여 막도록 하였다.

 

時 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陁川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王嘉獎冬陁川 擢位大奈麻 移押督州於大耶 以阿飡宗貞爲都督

시성내지유남여이천팔백인 성주동타천능격려소약 이적강대지적 범이십여일 얀량진력피 지성고찬 홀유대성 낙어적영 우레우이진 적의구해위이거 왕가장동타천 탁위대나마 이압독주어대야 이아찬종정위도독

 

당시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 아이와 힘이 약한 자들까지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스무날 동안이나 하였다. 그러나 결국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기에,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자 갑자기 커다란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요란스러워졌다.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임금이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어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北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유월 대관사정수위혈 금마군지유혈광오보 왕훙 시왈무열 장영경사북 대호태종 고종문부 거애어낙성문

 

6월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핏물이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렀는데 그 넓이가 다섯 걸음이나 되었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종(太宗)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나라 고종이 무열왕의 부고를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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