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平王
眞平王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 母金氏萬呼(一萬內)夫人 葛文王立宗之女 妃金氏摩耶夫人 葛文王福勝之女 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沈毅明達
진평왕립 위정 진흥왕태자동륜지자야 모김씨만호(일운만내)부인 갈문왕입종지녀 비김씨마야부인 갈문왕복승지녀 왕생유기상 신체장대 지식침의명달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다. 임금은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기이했다. 체구가 장대하였으며, 침착하고 지혜가 밝고 통달하였다.
元年 八月 以伊飡弩里夫爲上大等 封贈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
원년 팔월 이이찬노리부위상대등 봉증모제백반위진정갈문왕 국반위진안갈문왕
원년(서기 579) 8월,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어머니의 동생인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以伊飡后稷爲兵部令
이년 춘이월 친사신궁 이이찬후직위병부령
2년(서기 580) 봄 2월 몸소 신궁에 제사 지냈다.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三年 春正月 始置位和府 如今吏部
삼년 춘정월 시치위화부 여금리부
3년(서기 581) 봄 1월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이부(吏部)와 같다.
五年 春正月 始置船府署 大監弟監各一員
오년 춘정월 시치선부서 대감제감각일인
5년(서기 583) 봄 1월 처음으로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1인을 두었다.
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三月 置調府令一員 掌貢賦 乘府令一員 掌車乘
육년 춘이월 개원건복 삼월 치조부영일원 장공부 승부영일원 장거승
6년(서기 584) 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3월,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어 세금과 부역을 관장하게 하였고, 승부령(乘府令) 1인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七年 春三月 旱 王避正殿 減常饍 御南堂 親錄囚 秋七月 高僧智明入陳求法
칠년 춘삼월 한 왕피정전 감상선 어남당 친록수 추칠월 고승지명입진구법
7년(서기 585) 봄 3월 가뭄이 들자 임금이 정전(正殿)에 거처하기를 피하고, 평시보다 음식을 줄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몸소 죄수의 사정을 살폈다. 가을 7월 고승 지명(智明)이 불법을 배우고자 진(陳)나라에 들어갔다.
八年 春正月 置禮部令二員 夏五月 雷震 星殞如雨
팔년 춘정월 치예부영이원 하오월 뢰진 성운여우
8년(서기 586) 봄 1월 예부령(禮部令) 2인을 두었다. 여름 5월 우레와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九年 秋七月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 奈勿王七世孫 伊飡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 曰
구년 추칠월 대세구칠이인적해 대세 내물왕칠세손 이찬동대지자야 자준일 소유방외지 여교유승담수 왈
9년(서기 587) 가을 7월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바다로 떠났다. 대세는 내물왕의 7세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승려 담수와 사귀던 어느 날 말하였다.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 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桴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
“재차신라산곡지간 이종일생 즉하이지어롱조 부지창해지호대산림지관한호 오장승부범해 이지오월 침십추사 방도어명산 약범골가환 신선가학 즉표연승풍어혈료지표 차천하지기유장관야 자능종아호?”
“이 신라와 같은 산골에서 살다 일생을 마친다면, 연못 속의 물고기가 푸른 바다의 넓음을 모르고 새장의 새가 산림의 넉넉하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오월(吳越)에 이르러 스승을 찾고 명산에서 도를 구하려 한다. 만약 범속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넓다란 허공을 표표히 바람을 타고 날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놀이요, 장한 광경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忽風雨落葉 泛於庭潦
담수불긍 대세퇴이구우 적우구칠자 경개유기절 수여지유남산지사 홀풍우낙엽 범어정료
그러나 담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세는 물러나와 다시 벗을 찾다가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구칠은 기개가 굳세고 절도가 뛰어났다. 그와 함께 남산의 절에 놀러 갔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나뭇잎이 떨어져 뜰에 고인 물에 떠다니는 것이었다.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 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대세여구칠언왈 오유여군서유지지 금각취일엽 위지선 이관기행지선후 아대대세지엽재전 대세소왈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유람할 마음이 있다네. 지금 각자 나뭇잎 하나씩을 집어 그것을 배로 삼아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세.” 조금 후에 대세의 잎이 앞섰다. 대세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予亦男兒也 豈獨不能乎 大世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오기행호 구칠발련왈 ”여역남아야 이독불능호“ 대세지기가여 밀언기지 구칠왈 차오원야 수상여위우 자남해승주이거 후부지기소왕
“내가 먼저 가겠네!” 구칠이 발끈하며 말하였다. “나 또한 남자인데 어찌 나만 못 가리오!”
대세는 구칠이 함께 행동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자기의 뜻을 은근히 말하였다. 구칠이 말하였다. “그것이 곧 내가 바라던 바일세.” 마침내 서로 벗이 되어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한다.
十年 冬十二月 上大等弩里夫卒 以伊飡首乙夫爲上大等
십년 동십이월 상대등노리부졸 이이찬수을부위상대등
10년(서기 588)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기에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十一年 春三月 圓光法師 入陳求法 秋七月 國西大水 漂沒人戶 三萬三百六十 死者二百餘人 王發使賑恤之
십일년 춘삼월 원광법사 입진구법 추칠월 국서대수 표몰인호 삼만삼백육십 사자이백여인 왕발사진휼지.
11년(서기 589) 봄 3월,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불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긴 집이 3만3백6십 호였으며, 죽은 이가 200여 명이었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置領客府令二員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십삼년 춘이월 치령객부영이원 추칠월 축남산성 주이천팔백오십사보
13년(서기 591) 봄 2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가을 7월,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8백5십4보였다.
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西兄山城 周二千步
십오년 추칠월 개축명활성 주삼천보 서형산성 주이천보
15년(서기 593) 가을 7월,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고,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十六年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십육년 수제조 배왕위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
16년(서기 594),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임금을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으로 임명하였다.
十八年 春三月 高僧曇育 入隋求法 遣使如隋 貢方物 冬十月 永興寺火 延燒三百五十家 王親臨救之
십팔년 춘삼월 고승담육 입수구법 견사여수 공방물 동시월 영흥사화 연소삼백오십가 왕친임구지
18년(서기 596) 봄 3월, 고승 담육이 불법을 배우러 수나라에 들어갔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영흥사에 불이 났는데, 불길이 번져 가옥 3백5십 채를 태웠다. 임금이 몸소 가서 구제하였다.
十九年 三郞寺成
십구년 삼랑사성
19년(서기 597), 삼랑사(三郞寺)를 완성하였다.
二十二年 高僧圓光 隨朝聘使奈麻諸文大舍橫川還
이십이년 고승원광 수조빙사나마제문대사횡천환
22년(서기 600), 고승 원광이 조빙사(조문 사절)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二十四年 遣使大奈麻上軍入隋 進方物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箒項死之 九月 高僧智明 隨入朝使上軍還 王尊敬明公戒行 爲大德
이십사년 견사대나마상군입수 진방물 추팔월 백제래공아막성 왕사장사역전 대패지 귀산추항사지 구월 고승지명 수입조사상군완 왕존경명공계행 위대덕
24년(서기 602), 대나마 상군을 수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과 추항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9월 고승 지명이 입조사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임금이 지명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二十五年 秋八月 高句麗侵北漢山城 王親率兵一萬以拒之
이십오년 추팔월 고구려침북한산성 왕친솔병일만이거지.
25년(서기 603)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1만을 이끌고 그들을 물리쳤다.
二十六年 秋七月 遣使大奈麻萬世惠文等朝隋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이십육년 추칠월 견사대나마만세혜문등조수 폐남천주 환치북한산주
26년(서기 604) 가을 7월 사신으로 대나마 만세와 혜문등을 보내 수나라에 조공하였다. 남천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二十七年 春三月 高僧曇育 隨入朝使惠文還 秋八月 發兵侵百濟
이샙칠년 춘삼월 고승담육 수입조사혜문환 추팔월 발병침백제
27년(서기 605) 봄 3월 고승 담육이 입조사(조문 사절)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월,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였다.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
삼십년 왕환고구려누침봉장 욕청수병이정고구려 명원광수걸사표 광왈 ”구자존이멸야 비사문지행야 빈도재대왕지토지 식대왕지수초 감불유명시종“ 내술이문 이월 고구려침북경 노획팔천인 사월 고구려발우명산성.
30년(서기 608), 임금이 고구려가 자주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염려하여 수나라에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 하였다. 원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다른 이를 멸하는 것은 승려에 걸맞는 행동이 아닙니다만,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곧 글을 지어서 올렸다. 2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三十一年 春正月 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삼십일년 춘정월 모지악하지소 광사보 장팔보 심오척 지시월십오일멸
31년(서기 609) 봄 1월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에 불이 솟아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였으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 꺼졌다.
三十三年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 行兵事在高句麗紀 冬十月 百濟兵來圍椵岑城百日 縣令讚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삼십삼년 왕견사수 봉표청사 수앵제허지 행병사재고구려비 동시월 백제병구위가장성백일 현령찬덕소수 역갈사지 성몰
33년(서기 611), 임금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청하니 수 양제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병사를 움직인 일에 관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가잠성을 100일간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으며, 성은 함락되었다.
三十五年春 旱 夏四月 降霜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
삼십오년춘 한 하사월 강상 추칠월 수사왕세의지황룡사설백고좌 격원광등법사 설경
35년(서기 613) 봄,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사자좌를 본따 자리를 만들고 경연하는)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아들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春二月 廢沙伐州 置一善州 以一吉飡日夫爲軍主 永興寺塑佛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死
삼십육년 춘이월 폐사벌주 치일선주 이일길찬일부위군주 영흥사소불자괴 미기 진흥왕비비구니사.
36년(서기 614) 봄 2월, 사벌주를 없애고 일선주를 설치하여,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가 죽었다.
三十七年 春二月 賜大酺三日 冬十月 地震
삼십칙년 춘이월 사대포삼일 동시월 지진
37년(서기 615) 봄 2월 큰 잔치를 3일 동안 베풀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三十八年 冬十月 百濟來攻母山城
삼십팔년 동시월 백제래공모산성
38년(서기 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에 쳐들어왔다.
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椵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赴敵力戰 死之 論 讚德之子也
사십년 북한산주군주일품 모복가잠성 발병여백제전 해론종군부적역전 사지 논 찬덕지자야
40년(서기 618),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종군하여 적과 마주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四十三年 秋七月 王遣使大唐 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畵屛風錦綵三百段
사십삼년 추칠월 왕견사대당 조공방물 고조친노문지 견통직산기상시유문소래빙 사이새서급화병풍금채삼백단
43년(서기 621) 가을 7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당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문하고, 통직산기상시 유문소를 보내 예방하고 조서와 그림, 병풍 및 채색비단 3백 단을 내려주었다.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飡龍樹爲內省私臣 初 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 各置私臣 至是置內省私臣一人 兼掌三宮
사싮년 춘정월 왕친행황룡사 이월 이이찬용수위내성사신 초 왕칠년 대궁양궁사양궁삼소 각치사신 지시치내성사신일인 경장삼궁
44년(서기 622) 봄 1월 임금이 몸소 황룡사에 행차하였다. 2월 이찬 용수를 내성(내무부 격)의 사신(개인 비서)으로 삼았다. 일찍이 즉위 7년에 대궁ㆍ양궁ㆍ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의 업무를 겸하여 관장하도록 한 것이다.
四十五年 春正月 置兵部大監二員 冬十月 遣使大唐朝貢 百濟襲勒弩縣
사십오년 춘정월 치병부대감이원 동시월 견사대당조공 백제습늑노현
45년(서기 623) 봄 1월 병부에 대감(大監) 2인을 두었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四十六年 春正月 置侍衛府大監六員 賞賜署大正一員 大道署大正一員 三月 唐高祖降使 冊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冬十月 百濟兵來圍我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穴柵等六城 於是 三城或沒或降 級飡訥催合烽岑櫻岑旗懸三城兵堅守 不克死之
사십육년 춘정월 치시위부대감육원 상사서대정일원 대도서대정일원 삼월 당고조항사 캑왕위주국낙랑군공신라왕 동시월 백제병래위벌속함앵잠기잠봉잠현혈책등육성 어시 삼성혹몰혹항 급찬눌최합봉잠앵잠기현삼성병견수 불극사지
46년(서기 624) 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을 두고, 상사서(賞賜署)에 대정(大正) 1인, 대도서(大道署)에 대정 1인을 두었다. 3월,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쳐들어와 우리의 속함ㆍ앵잠ㆍ기잠ㆍ봉잠ㆍ기현ㆍ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ㆍ앵잠ㆍ기현 세 성의 병사를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 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數侵入
사십칠년 동십일월 견사대당조공 인송 고구려색로 사부득조 차수침입
47년(서기 625)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四十八年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唐高祖遣朱子奢來 詔諭與高句麗連和 八月 百濟攻主在城 城主東所 拒戰死之 築高墟城
사십팔년 추칠월 견사대당조공 당고조견주자사래 조유여고구려연화 팔월 백제공주재성 성주동소 거전사지 축고허성
48년(서기 626)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朱子奢)를 통해 조칙을 보내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8월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했는데, 성주인 동소(東所)가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四十九年 春三月 大風雨土 過五日 夏六月 遣使大唐朝貢 秋七月 百濟將軍沙乞拔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八月 隕霜殺穀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사십구년 춘삼월 대풍우토 과오일 하유월 견사대당조공 추칠월 백제장군사걸발서비이성 노남녀삼백여구 팔월 운상살곡 동십일월 견사대당조공
49년(서기 627) 봄 3월,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 날이 닷새나 계속되었다. 여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백제의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방의 성 두 곳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椵岑城 王出師擊破之 夏 大旱 移市 畵龍祈雨 秋冬民飢 賣子女
오십년 춘이월 백제위가잠성 왕출사격파지 하 대한 이시 화룡기우 추동민기 매자녀
50년(서기 628)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임금이 병사를 내어 쳐부수었다.
여름,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시장을 옮기고 용 그림을 그려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가을과 겨울, 백성들이 굶주려서 자녀를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 或搴旗 諸軍乘勝 鼓噪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九月 遣使大唐朝貢
오십일년 추팔월 왕견대장군용춘서현 부장군유신 침고구려낭비성 려인출성열진 군세심성 아군망지구 수무투심 유신왈 오문 진영이구정 제망이망장 오기위망영호 내궤마발검 향적진직전 삼입삼출 매입혹참장 혹건디 제군승승 고조진격 참살오천여급 기성내항 구월 견사대당조공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그리고는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二年 大宮庭地裂
오십이년 대궁정지열
52년(서기 630), 대궐 뜰의 땅이 갈라졌다.
五十三年 春二月 白狗上于宮墻 夏五月 伊飡柒宿與阿飡石品謀叛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飡石品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衣換樵夫敝衣 衣之 負薪潛至於家 被捉伏刑 秋七月 遣使大唐 獻美女二人 魏徵以爲不宜受 上喜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付使者歸之 白虹飮于宮井 土星犯月
오십삼년 춘이월 백구상우궁장 하오월 이찬칠숙여아찬석품모반 왕각지 포작칠숙 참지동시 병이구족 아찬석품망지백제국경 사견처자 주복야행 환지총산 견일초부 탈의환초부폐의 의지부신잠지어가 피착복형 추칠월 견사대당 헌미녀이인 취징이위불의수 상희왈 피림읍헌앵무 유언고색 사귀기국 황이녀원별친척호 부사자귀지 백홍음우궁정 토성범월
53년(서기 631) 봄 2월,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갔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위징이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과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는 어떠하리오!” 곧바로 사신에게 맡기어 돌려보냈다.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五十四年 春正月 王薨 諡曰眞平 葬于漢只 唐太宗詔 贈左光祿大夫 賻物段二百(古記云 貞觀六年壬辰正月卒 而新唐書資理通鑑皆云 貞觀五年辛卯 羅王眞平卒 豈其誤耶)
오십사년 춘정월 왕훙 시왈진평 장우한지 당태종조 증좌광록대부 사물단이백(고기운 정관육년임진정월졸 이신당서자리통람개운 정관오년신묘 라진평졸 이기오야)
54년(서기 632) 봄 정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 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2백 필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 와 자치통감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서기 631)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羅本紀 第五-眞德王 (0) | 2019.12.05 |
---|---|
新羅本紀 第五-善德王 (0) | 2019.12.04 |
新羅本紀 第四-眞智王 (0) | 2019.12.03 |
新羅本紀 第四-眞興王 (0) | 2019.12.03 |
新羅本紀 第四-法興王 (0) | 2019.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