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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眞興王

眞興王

 

眞興王立 諱彡麥宗[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 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 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太后攝政

진흥왕립 휘삼맥종(혹작심백부) 시년칠세 법흥왕제갈문왕입종지자아 모부인김씨 범흥왕지녀 비박씨 사도부인 왕유소 왕태후섭정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다. 이때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임금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元年 八月 大赦 賜文武官爵一級 冬十月 地震 桃李華

원년 팔월 대사 사문무관직일급 종시원지진 도리화

 

원년(서기 540)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二年 春三月 雪一尺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百濟遣使請和 許之

이년 춘삼월 설일척 배이사부위병부령 장내외병마사 백제견사청화 허지

 

2(서기 541) 3,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興輪寺成 三月 許人出家爲僧尼奉佛

오년 춘이월 흥륜사성 삼월 허인출가위승니 봉불

 

5(서기 544) 2,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되었다. 3,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六年 秋七月 伊飡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육년 추칠월 이찬이사부 주왈 국사자 기군신지선악 시보폄어만대 불유수찬 후대하관 왕심연지 명대아찬거칠부등 광집문사비지수찬

 

6(서기 545) 가을 7,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구년 춘이월 고구려여예인 공백제독산성 백제청구 왕견장군주령 영경졸삼천격지 살획기중

 

9(서기 548) 2,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十年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送佛舍利 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십년 춘 양견사여입학승각덕 송불사리 왕사백관봉영흥륜사전로

 

10(서기 549) , ()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어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임금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십일년 춘정월 백제발고구려도살성 삼월 고구려함백제금현성 왕승양국병피 명이찬이사부 출병격지 취이성증축 유갑사일천수지

 

11(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십이년 춘정월 개원개국 삼월 왕순수차랑성 문우륵급기제자이문지음악 특환지 왕주하임궁 영주기악 이인각제신가주지 선시 가야국 가실왕 제십이현금 이상십이월지율 내명우륵제기곡 급기국란 조악기투아 기악명가야금 왕명거칠부등 침고구려 승승취십군

 

12(서기 551) 1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十三年 王命階古法知萬德三人 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 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曰 與前娘城之音 無異 厚賞焉

삽삼년 왕명개고법지, 만덕삼인(악지작주) 학악어우륵 우륵양기인지소능 교개고이금 교법지이가 교민덕이무 업성 왕명주지 왈여전랑성지음무이 후상언.

 

13(서기 552), 임금이 계고(階古)ㆍ법지(法知)ㆍ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배움이 끝남에 임금이 그들에게 연주를 시켜보고서 말하였다. “예전에 낭성에서 들었던 음악과 다름이 없구나.” 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십사년 춘이월 왕명소사축신궁어월성동 황룡견기지 왕의지개위불사 사호왈황룡 추칠월 취백제동북비 치신주 이아찬무력위군주 동시월 취백제왕여위소비

 

14(서기 553) 2,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을 7,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십오년 추칠월 수축명활성 백제왕명농여가량 내공관산성 군주각간우덕 이찬탐지등 역전실리 신주군주김무력 이주병

 

15(서기 554) 가을 7,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9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年租調 曲赦 除二罪 皆原之

십육년 춘정월 치완산주어비사벙 동시월 왕순행북한산 척정봉강 십일월 지자북한산 교소경주군 복일년조조 곡사 제이죄 개원지

 

16(서기 555) 1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飡成宗爲軍主

십칠년 추칠월 치비열홀주 이사찬성종위군주

 

17(서기 556) 가을 7,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飡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십팔년 이국원위소경 폐사벌주 치감문주 이사찬기종위군주 폐신주 치북한산주

 

18(서기 557),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사벌주를 폐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奈麻身得作砲弩上之 置之城上

십구년 춘이월 사귀착자제급육부호민 이실국원 나마신득작포노상지 치지성상

 

19(서기 558) 2,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나마 신득이 포노(砲弩, 돌을 쏘도록 만든 무기의 일종)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이십삼년 추칠월 백제침략변호 왕출사거지 살획일천여인 구월 가야반 왕명이사부토지 사다함부지 사다함영오천기선치 입전단문 립백기 성중공구 불화소위 이사부인병임지 일시진항. 논공사다함이최 왕상이양전급소노이백구 사다함삼양 왕강지 내수시생구 방위양인 전분여전사 국인미지.

 

23(서기 562) 가을 7,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보내 막아 싸우게 하였다.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二十五年 遣使北齊朝貢

이십오년 견사북제조공

 

25(서기 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秋八月 命阿飡春賦出守國原 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이십육년 춘이월 북제무성황제조 이왕위사지절동이교위낙랑공신라왕 추팔월 명아찬춘부출수국원 구월 폐완산주 치대야주 진견사유사여승명관 래빙 송석씨경론천칠백여권

 

26(서기 565) 2,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자를 보내 왕에게 부절을 주어 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으로 삼았다. 가을 8, 아찬 춘부에게 명하여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9,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 예방하고, 불경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二十七年 春二月 祗園實際二寺成 立王子銅輪爲王太子 遣使於陳 貢方物 皇龍寺畢功

이십칠년 춘이월 기원실제이사성 입왕자동륜위왕태자 견사어진 공방물 황룡사필공

 

27(서기 566) 2, 기원정사와 실제사 두 절을 완공하였다. 왕자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삼았다.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황룡사(皇龍寺)가 준공되었다.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 貢方物

이십팔년 춘삼월 견사어진 공방물

 

28(서기 567) 3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二十九年 改元大昌 夏六月 遣使於陳 貢方物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이십구년 개원대창 하유월 견사어진 공방물 동시월 폐북한산주 치남천주 우폐비열홀주 치달홀주.

 

29(서기 568),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었다. 여름 6,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또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하였다.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 獻方物

삼십일년 하유월 견사어진 헌방물

 

31(서기 570) 여름 6,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三十二年 遣使於陳 貢方物

삼십이년 견사어진 공방물

 

32(서기 571),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三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三月 王太子銅輪卒 遣使北齊朝貢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삼십삼년 춘정워 개원홍제 삼월 왕태자동륜졸 견사북제조공 동시월이십일 위전사사졸 설팔관회어외사 칠일파.

 

33(서기 572) 1월 연호를 홍제로 바꾸었다. 3,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20, 전쟁에서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하여 왕성 밖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 만에 마쳤다.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삼십오년 춘삼월 주성황룡사장육상 동중삼만오천친근 도금중일만일백구십팔푼

 

35(서기 574) 3,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 불상)을 주조하였다. 구리의 무게가 357근이었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198푼이었다.

 

三十六年 春夏旱 皇龍寺丈六像出淚至踵

삼십육년 춘하한 황룡사장육상출루지종

 

36(서기 575),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이 발꿈치에까지 이르렀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 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 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삼십칠년춘 시봉원화 초 군신병무이지인 욕사유위군유 이관기행의 연후거이용지 수간미녀이인 일왈남모 일왈준정 취도삼백여인 이녀쟁연상투 준정인남모어인사제 강권주지취 예이투하수이살지 준정복주 도인실화파산. 기후 경취미모남자 장식지 명화랑이봉지 도중운집 혹상마이도의 혹상열이가악 유오산수 무원부지 인차지기인사정 택기선자 천지어조

 

37(서기 576) , 처음으로 원화(源花, 화랑의 전신)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사람들 여럿을 모아 함께 놀게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고자 하였다. 마침내 두 미녀를 뽑았으니 하나는 남모, 하나는 준정이었다.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무리들은 화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잘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 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김대문화랑세기왈 현좌충신 종차이수 양장용졸 유시이생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겼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최치원난랑비서왈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즉효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행행축건태자지화야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뭇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 공자)의 가르침이고,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함은 주나라 주사(柱史, 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하라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당려호징신라국기왈 택귀인자제지미자 전분장식지 명왈화랑 국인개존사지야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신라국기에서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화장을 시키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높이 받들어 섬겼다했다.

 

安弘法師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안홍법사입수구법 여상증비마라등이승회 상능가승만경급불사리

 

안홍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서역의 중 비마라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과 승만경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추팔월 왕훙 시왈진흥 장우애공사북봉 왕유년즉위 일심봉불 지말년축발피승의 자호법운 이종기신 왕비역효지위니 주영흥사 급기훙야 국인이예장지

 

가을 8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임금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한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승명을 칭하다가 삶을 마쳤다. 왕비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다가 돌아가시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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