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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法興王


法興王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姓募 名秦) 智證王元子 母 延帝夫人 妃 朴氏保刀夫人 王身長七尺 寬厚愛人

법흥왕립 휘원종(책부원구성모 명진) 지증왕원자 모 연제부인 비 박씨보도부인 왕신장칠척 관후애인

 

법흥왕(法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다.(책부원귀에는, 성은 모()이고 이름은 진()이라 한다.)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임금은 키가 일곱 자였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여 다른 사람들을 아끼었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삼년 춘정월 친사신궁 용견양산정중

 

3(서기 516) 1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양산(楊山)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

 

四年 夏四月 始置兵部

4년 하사월 시치병부

 

4(서기 517) 여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株山城

오년 춘이월 축주산성

 

5(서기 518) 2월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칠년 춘정월 영시율령 시제백관공복 주자지질

 

7(서기 520) 봄 정월,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등급을 정하였다.

 

八年 遣使於梁 貢方物

팔년 견사어양 공방물

 

8(서기 521),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

구년 추남월 가야국왕견사청혼 왕이이찬비조부지매송지

 

9(서기 522) 3,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십일년 추구월 왕출순남경척지 가야국왕래회

 

11(서기 524) 가을 9월 임금이 남쪽 변방을 두루 돌아보며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나보았다.

 

十二年 春二月 以大阿飡伊登 爲沙伐州軍主

십이냔 춘이월 이대아찬이등 위사벌주군주

 

12(서기 525) 2,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았다.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십오년 조행불법 초눌지왕시 사문묵호자 자고구랴지일선군 군인모례 어가중작굴실안치 어시양견사사의착향물 군신부지기향여기소용 견인제향편문 묵호자견지 칭기명목왈

 

15(서기 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알려주며 말하였다.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차분지즉향기분복 소이원성어신성 소위신성미유과어삼보 일왈불타 이왈달마 삼왈증가 약소차발원 즉필유영응

 

이것은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에 정성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時 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俄而不知所歸

시 왕년병혁 왕사호자분향표서 왕녀지병심유 왕심희 궤증우후 호자출현모례 이소득물증지 인어왈 오금유소귀 청사 아이부지소귀

 

그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다.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모례를 찾아보고 받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지비처왕시 유아도(일작아도)화상 여시자삼인 역래모례가 의표사묵호자 주수년 무병이사 기기자삼인유주 강독경률 왕왕유신봉자 지시 왕역욕흥불교 군신불신 첩첩등등구설 왕난지 근신이차동(혹운처도)주왈

 

비처왕 때에 이르러 아도혹은 아도(我道)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임금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임금이 난감해 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 혹은 (處道)이 아뢰었다.

 

請斬小臣 以定衆議王曰 本欲興道 而殺不辜 非也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청참소신 이정중어왕왈 본욕흥도 이살불고 비야답왈 약도지득행 신수사 불감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왕어시소군신문지 첨왈 금견승도 동두이복 의론기궤 이비상도 금약종지 공유후회 신등수중죄 불감봉조

 

이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말하는 논리가 괴상하여 정상적인 도()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이차돈독왈 금군신지언 비야 부유비상지인 연후유비상지사 금문불교연오 공불가불신

 

그러나 이차돈 홀로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함을 들어보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왕왈 중인지언 뢰불가파 여독이언 불능양종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고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송하리장주지 이차돈임사왈 아위법취형 불약유신 오사필유이사

 

마침내 형리에게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의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가 죽고서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問雞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 殊異)

급참지 혈종단처용 색백여유 중괴지 불복비훼불사(차거김대문계립잡전소기서지 여한나마금용행소찬아도화상비소록 수이)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十六年 下令禁殺生

십육년 하령금살생

 

16(서기 529),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修理隄防 夏四月 拜伊飡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 始於此 如今之宰相

십팔년 춘삼월 명유사수리제방 하사월 배이찬철부위상대등 총지국사 상대등관 시어차 여슴지재상

 

18(서기 531) 3, 담당관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으니, 지금의 재상(宰相)과 같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십구년 금관국주김구해 여비급삼자 장왈노종중왈무덕계왈무력 이국탕보물래항 왕예대지 수위상등 이본국위식읍 자무력사지각간

 

19(서기 532),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二十一年 上大等哲夫卒

이십일년 상대등철부졸

 

21(서기 534), 상대등 철부가 죽었다.

 

二十三年 始稱年號 云建元元年

이십삼년 시칭연호 운건원원년

 

23(서기 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기를 건원이요 원년으로 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敎 許外官携家之任

이십오년 춘정월 교 허외관휴가지임

 

25(서기 538) 봄 정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

이십칠년 추칠월 왕훙 시왈법흥 장어애공사북봉

 

27(서기 540) 가을 7,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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