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 眞德王 太宗王
善德王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 金氏摩耶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선덕왕립 휘덕만 진평왕장녀야 모김씨 마야부인 덕만성 관인명민 왕훙무자 국인입덕만 상호성조황고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다.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석하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의 칭호를 올렸다.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전왕시 득자당래 목단화원병화자 이시덕만 덕만왈 차 화 수 절 염 이 필 무향기 왕소왈 이하이지지
앞의 임금 때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對曰 圖花無蜂蝶 故知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花有香氣 蜂蝶隨之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대왈 도화무봉접 고지 대저여유국색 남수지 화유향기 봉접수지고야 차화절염 ㅇ도화우무봉접 시필무향화 종식지 과여소언 기선식여차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와 벌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어보았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夏五月 旱 至六月 乃雨 冬十月 遣使 撫問國內鰥寡孤獨不能自存者 賑恤之 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워년이월 이대신을제총지국정 하오월 한 지유월 내우 동시월 견사 무문국내환과고독불능자존자 진휼 십이월 견사입당조공
원년(서기 632) 2월,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겨울 10월, 사람을 보내 나라 안의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노인,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二月 京都地震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八月 百濟侵西邊.
이년 춘정월 친사신궁 대사 복제주군 일년조조 이월 경도지진 추칠월 견사대당조공 팔월 백제침서변
2년(서기 633) 봄 정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2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三月 雹 大如栗.
삼년 춘정월 개원안평 분황사성 삼월 박 대여율
3년(서기 634) 봄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3월, 우박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밤만 하였다.
四年 唐遣使持節 冊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以襲父封 靈廟寺成 冬十月 遣伊飡水品․龍樹(一云龍春) 巡撫州縣.
사년 당견사지절 책명왕위주국낙락군공신라왕 이습부봉 영묘사성 동시월 견이찬수품 용수(일운용춘) 순무주현.
4년(서기 635),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옥으로 만든 신표)을 가지고 왕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또는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두루 돌며 위로하였다.
五年 春正月 拜伊飡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 設百高座 集僧 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蟆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蟆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 亦有地名玉門谷者 其或有隣國兵(其或以下六字 意補) 潛入其中乎
오년 춘정월 배이찬수품위상대등 삼월 왕질 의도무효 어황룡사 설백고좌 집승 강인왕경 허도승일백인 하오월 하마집궁서옥문지 왕문지 위좌우왈 하마노모병사지상야. 오상문서남변 약유지명옥문곡자 기혹유린국병(기혹이하육자 의본) 잠입기중호
5년(서기 636)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론케 하고 1백 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두꺼비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꺼비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乃命將軍閼川弼呑率兵往搜之(弼呑以下七字 參照遺事及通鑑 以補之)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내명장군알천필탄솔병왕수지(필탄이하칠자 침조견사급통람 이보지) 과백제장군우소욕습독산성 솔갑사오백인 래복기처 알천엄격진살지.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慈藏法師 入唐求法.
자장법사 입당구법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六年 春正月 拜伊飡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육년 춘정월 배이찬사진위서불한 추칠월 배알천위대장군
6년(서기 637) 봄 1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七年 春三月 七重城南 大石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 冬十月 高句麗侵北邊七重城 百姓驚擾 入山谷 王命大將軍閼川 安集之 十一月 閼川與高句麗兵 戰於七重城外 克之 殺虜甚衆.
칠년 춘삼월 칠중성남 대석자이삼십오보 추구월 우황화 동시월 고구려침북변칠중성 백성경요 입산곡 왕명대장군알천 안집지 십일월 알천여고구려 병 전어칠중성외 극지 살노심중
7년(서기 638) 봄 3월,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서른다섯 보를 옮겨갔다. 가을 9월, 노란색 꽃이 비처럼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자,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병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八年 春二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飡眞珠鎭之 秋七月 東海水赤 且熱 魚鼈死.
팔년 춘이월 이하슬라주위북소경 명사찬진주진지 추칠월 동해수적 차열 어별사.
8년(서기 639) 봄 2월,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에게 명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가을 7월, 동쪽 바닷물이 붉게 변하고 또한 뜨거워져서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學生能明一大經已上 皆得補官 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滿三千二百六十員 於是 四方學者雲集京師 於是 高句麗,百濟,高昌,吐蕃(昌及吐 據唐書儒學傳補之) 亦遣子弟入學.
구년 하오월 왕견자제어당 청입국학 시시 태종대징천하명유위학관 수행국자감 사지강론 학생능명일대경이상 개득보관 증축학사천이백간 증학생만삼천이백육십원 어시 사방학자운집경사 어시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 (창급토 거당서유학전보지) 역견자제입학
9년(서기 640) 여름 5월 임금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의 태종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 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官員)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에게 강론하도록 하였다. 학생으로서 대경(大經, 『예기』와 『춘추좌씨전』)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주었고, 학당의 교사(校舍)를 1천2백 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학생 수를 늘려 3천2백6십 명을 채우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당나라의 서울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때에 고구려, 백제, 고창(高昌), 토번(吐蕃)에서도 역시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 又與高句麗謀 欲取黨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 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 領兵 攻拔大耶城 都督伊飡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
십일년 춘정월 갼사대당헌방물 추칠월 백제왕의자대거병 공취국서십여성 팔월 우여고구려모 욕취당항성 이절귀당지로 왕견사 고급어태종 시월 백제장군윤충 영병 공발대야성 도독이찬품석, 사지죽죽,용석등사지.
11년(서기 64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義慈)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8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党項城, 경기 화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임금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이달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병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都督)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죽죽ㆍ용석 등이 그곳에서 죽었다.
冬 王將伐百濟 以報大耶之役 乃遣伊飡金春秋於高句麗 以請師 初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동 왕장벌백제 이보대야지역 내견이찬김춘추어고구려 이청사 초재야지패야 도독품석지처사언 시춘추지녀야 춘추문지 의주이립 종일불순 인물과전이부지성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였다. 앞서 대야성이 패배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旣而言曰 "嗟乎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 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기이언왈 차호대장부 이불능탄백제로 경지왕왈 신원봉사고구려 청병 이보원어백제 왕허지
얼마가 지난 후에야 말하였다. “슬프구나!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손에 넣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곧장 임금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제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병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복수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高句麗王高臧 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고구려왕고장 소문춘추지명 엄병위이후견지
고구려왕 고장(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에, 병사들로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跌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춘추진언왈 금백제무도 위장사봉시 이침질아봉강 과군원득대국병마 이세기치 내사하신치명어하집사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려왕위왈 죽령본시아지분 여약환죽령서북지지 병가출언
고구려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었다.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春秋對曰 "臣奉君命 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隣 但威劫行人 以<要><歸>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
춘추대왈 "신봉군명 걸사 대왕무의구환이선린 단위겁행인 이요귀지 신유사이이 부지기타"
춘추가 대답하였다. “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고자 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좋게 지내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저는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臧怒其言之<不><遜> <囚>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地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장노기언지불손 수지별관 춘춘잠사인고본국왕 왕명대장순김유신 영사사일만인부지 유신행군과한강 입고구려남경 여왕문지 방춘추이환
고구려 장왕이 그 말의 공손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춘추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임금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군하게 하였다. 유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한강(漢江)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에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주어 돌려보냈다.
拜庾信爲押梁州軍主.
배유신위압량주군주.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 군주로 삼았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三月 入唐求法高僧慈藏還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百濟 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國社稷 必不獲全 謹遣陪臣 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
십이년 춘정월 견사대당헌방물 삼월 입당구법고승자장환 추구월 견사대당상언 고구려,백제 침릉신국 추조공습수십성 양국연병 기지필취 장이금자구월대학하국사직 필불획전 근견부신 귀명대국 원걸편사 이재구원.
12년(서기 643) 봄 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 당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社稷)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帝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 和爾三國 高句麗․百濟 旋踵翻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 以免顚越
제위사인왈 아실애이위이국소침 소이번견사인 화이삼국 고구려백제 선종번회 의재탄멸 이분이토자 이국설하기모 이면진월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신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을 참으로 애닯게 여겼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돌아서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땅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구나. 너희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나라의 멸망을 면하려고 하는가?”
使人曰 吾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사인왈 오왕사궁계진 유고급대국 기이전지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靺鞨 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 以爲我<兵> 必皆奔走 此爲二策
제왈 아소발변병 총거란말갈 직입요동 이국자해 가원이일년지위 차후지무계병 환가침모 사국구요 어이미완 차위일책 아우능급이수천주포단치 이국병지 건이진지 피견자 이위아병 필개분주 차위이책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너희 나라의 위급함은 해결이 될 것이니, 1년 정도는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군을 계속해서 보내지 않을 것을 저들이 알게 되면 도리어 멋대로 침략을 할 것이다. 그러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스러워지고, 너희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너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다. 두 나라의 병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우고 벌여 놓으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나라의 군사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百濟國恃海之險 不修機械 男女紛雜 互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隣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 與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백제시해지험 불수기계 남녀분잡 호상연취 아이수십백선 재이갑졸 함매범해 직습기지 이국이부인위주 위린국경모 실주연구 미세휴녕 아견일종지 여위이국주 이자불가독왕 당견병영획 대이국안 임이자수 차위삼책 이의사지 장종하사
백제는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난잡하게 섞여 서로 즐기기만 하고 있으니, 나는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병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기습하겠다. 그런데 그대의 나라는 여인을 임금으로 삼았기에 이웃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주인이 없어지면 도둑이 들끓는 것처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그가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마땅히 병사들을 보내 보호하면서, 너희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해 보게나.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가?”
使人但唯而無對 帝嘆其庸鄙非乞師․告急之才也.
사신단유이무대 제탄기용비비걸사고급지재야
사신은 다만 “예.” 라고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의 됨됨이가 어리석고 못나서, 병사를 청하고 위급한 사정을 고할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十三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 齎璽書 賜高句麗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卽戢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 擊爾國矣
십삼년 춘정월 견사대당헌방물 태종견사농승상리현장 재새서 사고구려왈 신라위명국가 조공불궐 이여백제 의즉즙병 약경공지 명년당출사 격이국의
13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상 리현장에게 조서를 들려 보내어 고구려에게 말하였다.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 고구려와 백제는 즉시 병사를 거두어야만 한다. 만약 또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병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蓋蘇文謂玄獎曰 高句麗新羅怨隙已久 往者 隋室相侵 新羅乘釁奪高句麗五百里之地 城邑皆據有之 非返地還城 此兵恐未能已
개소문위현장왈 고구려신라원극이구 왕자 추실상침 신라승흔탈고구려오백리지지 성읍개거유지 비반지환성 차병공미능야
그러자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이 이미 오래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오백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玄將曰 已往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秋九月 王命庾信爲大將軍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현장왕 이왕지사 언가추론 소문경불종 추구월 왕명유신위대장군 영병벌백제 대극지 취칠성
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이제 따지는 것입니까?” 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임금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크게 승리를 거두고 일곱 성을 빼앗았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拒><之>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십사년 춘정월 견사대당공헌방물 유신자벌백제환 미견왕 백제대군복래구변 왕명거지 수부지가 왕벌파지 참수이천급
14년(서기 645)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못했을 때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유신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벌하러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據庾信傳 {補之口於王 未得歸家 又<急>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거유신전 {보지구어생 미득귀가 우급보백제복래침 왕이사급 내왈 국지존망 계공일신 서불탄노 왕기도지}
유신전에 따르면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아뢰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을 때, 백제가 또다시 침공했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임금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그대의 한 몸에 달렸으니 노고를 꺼리지 말고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 道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유신우불귀가 주야연병 서행 도과댁문 일가남녀 담방체읍 공불고이귀
유신은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하였다. 서쪽으로 행군하는 길에 자기 집의 문을 지나게 되었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冬十一月 拜伊飡毗曇爲上大等.
삼월 창조황룡사탑 종자장지청야 하오월 태종친정고구려 왕발병삼만이조지 백제승허 습취국서칠성 동십일월 배이찬비담위상대등
3월, 황룡사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름 5월, 당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내어 도왔는데, 백제가 그 빈틈을 타고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唐書云,貞觀二十一年卒 通鑑云,二十五, 當作二年卒, 以本史考之,通鑑誤也.)
십육년 춘정월 비담염종등 위여주불능선리 인모반거병 불극 팔일 왕훙 시왕선덕 자우랑산(당서운 정관이십일년졸 통람운 이십오년 당작이년졸 이본사고지 통람오야)
16년(서기 647) 봄 1월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반역을 꾀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8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唐書에 이르기를 ‘정관 21년(서기 647)에 죽었다.’ 하고 통감(通鑑)에서는 ‘25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찰해 보건대 『통감』의 기록이 잘못된 듯하다.]
論曰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犧理九州耳 至若呂雉武曌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王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姥嫗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羸豕孚蹢躅 其可不爲之戒哉.
논왈 신문지 고유여와씨 비정시천자 좌복희리구주이 지약여치무조 치유약지주 임조칭제 사서부득공연칭왕 단서고황후씨즉천왕후무씨자 이천언지 즉양강이음유 이인언지 즉남존이여비 이가허노국출규방 단국가지정사호 신라부기여자 처지왕위 성난세지사 국지불망 행야 서운 빈계지신 역운 영시부척척 기가불위지계재
사관이 논평한다. 나는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는데, 그녀는 올바른 천자(天子)가 아니었고 복희(伏羲)를 도와 9주(九州)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呂雉)와 무조(武曌) 같은 이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나와서 천자처럼 정치를 행하였으나,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하게 임금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나 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경우로 말하자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易經)』에서는 “암퇘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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