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年春正月 拜伊飡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於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將退 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聞唐兵欲來 救百濟 遣大阿飡眞功阿飡□□□□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십일년춘정월 배이찬예원위중시 발병침백제 전어웅진남 당주부과사지 말갈병래위설구성 불극장퇴 불병격지 참살삼백여인 문당병욕래 구백제 견대아찬진공아찬****병수옹포 백어약입*********일촌
11년(서기 671) 봄 정월,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삼았다.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夫果)가 그곳에서 죽었다. 말갈의 병사가 쳐들어와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고 있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병사를 내어 쳐부수고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당나라 병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眞功)과 아찬****등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옹포(甕浦)를 지키도록 하였다. 흰 물고기가************ 뛰어들었는데 한 치였다.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하사월 진흥륜사남문
유월 견장군죽지등 영병천백제가림성화 수여당병전어석성 참수오천삼백급 획백제장군이인당과의육인
여름 4월, 흥륜사(興輪寺)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6월,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병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使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 天命有期 行遵此境 奉承機心稍動 窮武邊城 去由也之片言 失侯生之一諾 兄爲逆首 弟作忠臣 遠分花萼之陰 空照相思之月
추칠월이십육일 대당총관설인귀사임윤법사기서왈 ”행군총관설인귀치서신라왕 청풍만리 대해삼천 천명유기 행준차경 봉승기심삭동 궁무변성 거유야지편언 실후생지일락 형위역수 제작충신 원분화악지음 공조상사지월
가을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글을 보내왔다. “행군총관 설인귀는 신라 임금께 글월을 드립니다. 맑은 바람 맞으며 만리 길, 큰 바다 삼천리를 지나 황제의 명령을 받잡고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임금께서 이기적인 마음이 움직여서 변경의 성에 무력(武力)을 쓴다고 하더이다. 이는 중유(仲由)의 한마디 말을 저버린 것이요, 후생(侯生)의 한번 약조를 잊으신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었으니, 꽃과 꽃받침의 그늘이 크게 벌어진 격이요, 그리워하는 달빛이 헛되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興言彼此 良增歎詠 先王開府 謀猷一國 展轉百城 西畏百濟之侵 北警高句麗之寇 地方千里 數處爭鋒 蠶女不及桑時 耘人失其疇序 年將耳順 楡景日侵 不懼船海之危 遠涉陽侯之險
흥언피차 양증환영 선왕개부 모유일국 전전백성 서외백제지침 북경고구려지구 지방천리 수처쟁봉 잠녀불급상시 경인실기주서 년장이순 유경일침 불구선해지위 원섭양후지험
이리저리 말하자면 실로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선왕 개부(開府, 무열왕)께서는 나라를 통일할 것을 도모하시어 수많은 성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노략질을 경계하였습니다. 나라 안 천리 땅 곳곳마다 전쟁이 일어나 누에 치는 아낙은 제 때에 뽕잎을 따지 못하고 김매는 농부는 밭두둑을 잊었습니다. 선왕께서는 예순이라는 저물어가는 나이(楡景日侵: 나무그늘에 드리워져 어두워짐:황혼)에도 불구하고 뱃길의 위험을 겁내지 않으시고 멀리 험한 풍파를 건넜습니다.
瀝心華境 頓顙天門 具陳孤弱 明論侵擾 情之所露 聽不勝悲 太宗文皇帝 氣雄天下 神王宇宙 若盤古之九變 同巨靈之一掌 扶傾救弱 日不暇給 哀納先君 矜收所請 輕車駿馬 美衣上藥 一日之內 頻遇殊私 亦旣承恩
역심화경 돈상천문 구진고약 명론침요 정지소로 청불승비 태종문황제 기웅천하 신왕택우 약반고지구변 동거영지일장 부경구약 밍불하급 애납선군 긍수소청 경거준마 미의상약 일일지내 빈우수사 역기승은
중국 땅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천자가 계신 대궐 앞에 머리를 조아려 신라의 외롭고 약함을 말씀하시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밝히심에 마음 속 진정이 드러나니 듣는 사람이 슬픔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기개가 천하에 으뜸이었고 정신은 우주에 왕성하였으니, 반고(盤古)의 아홉 번 변화나 거령(巨靈)의 손바닥과 같았습니다. 쓰러지는 자를 부축하고 약한 사람을 구원하기에 날마다 겨를이 없었으니, 황제는 선왕을 애처롭게 여겨 청하는 바를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가벼운 수레와 날쌘 말, 아름다운 옷과 좋은 약을 주었고, 하루 동안에도 여러 번 만나서 특별하게 대우하였으니 은혜를 입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大王報書云 “先王貞觀二十二年 入朝 面奉太宗文皇帝恩勅 朕今伐高句麗 非有他故 ‘憐你新羅 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歲 山川土地 非我所貪 玉帛子女 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竝乞你新羅 永爲安逸 垂以計會 賜以軍期 新羅百姓 具聞恩勅 人人畜力 家家待用 大事未終 文帝先崩 今帝踐祚 復繼前恩 頻蒙慈造 有踰往日 兄弟及兒 懷金拖紫 榮寵之極 敻古未有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대왕보서운 선왕정관이십이년 입조 면봉태종문황제은칙 짐금벌고구려 비유타고 린니신라 섭호양국 매피침릉 미유영세 산천토지 비아소탐 옥백자녀 시아소유 아평정양국 평양이남백제토지 병걸니신라 영위안일 수이계회 사이군기 신라백성 구문은칙 인인축력 가가대용 대사미종 문제선붕 금제천조 복계전은 빈몽자조 유유왕일 형제급아 회금타자 영총지극 경고미유 분신쇄골 망진구치지용 간뇌토원 앙보만분지일
대왕이 답서에서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서기 648)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다. 그 조칙에서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를 낼 기일을 정하여 주셨다. 신라의 백성들이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임이 되기를 기다렸다. 큰일을 마치기도 전에 문제가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가 제위에 올라 선대 황제의 은혜를 이었으며, 인자한 베푸심이 지난날보다 더하였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금인(金印, 황금으로 만든 도장)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니, 영광스러운 총애의 지극함이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몸과 뼈가 가루가 되어 부서질지언정 쓸모를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간과 뇌가 들판을 덮더라도, 만 분의 일이나마 은덕에 보답하려 하였다.
至顯慶五年 聖上感先志之未終 成敻日之遺緖 泛舟命將 大發船兵 先王年衰力弱 不堪行軍 追感前恩 勉强至於界首 遣某領兵 應接大軍 東西唱和 水陸俱進 船兵纔入江口 陸軍已破大賊 兩軍俱到王都 共平一國
지현경오년 성상감선지지미종 성경일지유서 범주명장 대발선병 선왕연쇄력약 불가행군 추감전은 면강지어계수 견모영병 응접대군 동서창화 수륙구진 선병재입강구 육군이파대적 양군구도왕도 공평일국
현경(顯慶) 5년(서기 660)에 황제께서 선대 황제의 뜻을 끝맺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어 남겨둔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배를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규모의 수군을 일으켰는데, 선왕(무열왕)은 늙어 쇠약해져서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전날의 은혜를 생각하여 억지로 국경까지 나와서, 나에게 병사를 이끌고 황제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시었다. 동서에서 호응하고 수륙 양군이 함께 전진하였다.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설 무렵에 육군은 이미 대규모의 적군을 격파하고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나라를 평정하였다.
平定已後 先王遂共蘇大摠管平章 留漢兵一萬 新羅亦遣弟仁泰 領兵七千 同鎭熊津 大軍廻後 賊臣福信 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又於府城側近四處 作城圍守 於此 府城不得出入
평정이후 선왕수공소대총관평장 유한병일만 신라역견제인태 영병칠천 동진웅진 대군회후 적신복신 기어강서 취집여진 위핍부성 선파외책 총탈군자 복공부성 기장함몰 우어부성측근사처 작성이수 어차 부성부득출입
평정 후에 선왕은 소대총관(蘇大摠管, 소정방)과 함께 의논하여, 중국 병사 1만을 머물게 하였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仁泰)에게 병사 7천을 딸려서 함께 웅진(熊津)을 지키게 하였다. 황제의 군대가 돌아간 후에 백제의 신하 복신(福信)이 백마강의 서쪽 지방에서 일어나 백제 유민을 모아 부성(府城, 사비성)을 포위하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목책을 부수어 군수품을 빼앗고 다시 부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었다. 또한 부성 근처 네 곳에 성을 쌓아 포위한 채 지키고 있어서 부성에 들고 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 竝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粮食 遂使一萬漢兵 免虎吻之危難 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被賊摧破 一人不歸 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모영병주부해위 사면적성 뱡개타파 선구기위 복군양식 수사일만한병 면호문지위난 유진아군무역자이상식 지육년 복신주당참다 침취강동지지 웅진한병일천 왕차적도 피적최파 일인불귀 자패이래 웅진청병 일석상계
내가 병사를 이끌고 달려가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성을 한꺼번에 깨뜨려서 우선 부성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 중국 병사들의 범의 입안에 들어간 듯한 어려움을 면하게 하였으며,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병사들이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는 지경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6년(서기 661)이 되자 복신의 무리가 점점 늘어나서 강의 동쪽 땅까지 침범하였으므로, 웅진의 중국 병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깨져서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패배 이후로 웅진으로부터 오는 병사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馬 苦請難違 遂發兵衆 往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卽來打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摠叛 竝屬福信 福信乘勝 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摧 卽募健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신라다유역병 불가징발병마 고청난위 수발병중 왕위주류성 적지병소 수득래타 대손병마 실리이귀 남방제성 일시총반 병속복신 복신승승 복위부성 인즉웅진도단 절어염최 즉모건아 유도송영 구지핍곤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으나, 고통스런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병사들을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병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병마는 크게 손해를 입었고, 이로움을 잃고 되돌아왔다.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도 일시에 반란을 일으켜서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또다시 부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소금과 된장까지 떨어졌으므로, 즉시 건장한 청년들을 모아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궁핍해진 부성의 병사들을 구원하였다.
至六月 先王薨 送葬纔訖 喪服未除 不能應赴 勅旨發兵北歸 含資道摠管劉德敏等至 奉勅遣新羅供運平壤軍粮 此時 熊津使人來 具陳府城孤危 劉摠管與某平章自云 若先送平壤軍粮 卽恐熊津道斷 熊津若其道斷 留鎭漢兵 卽入賊手
지유월 선왕훙 송장재흘 상복미제 불능응부 칙지발병북귀 함자도총관유덕민등지 봉칙견신라공운평양군량 차시 웅진사인래 구진부성고위 유총관여모평장자운 약선송평양군량 즉공웅진도단 웅진약기도단 유진한병 즉입적수
6월에 선왕이 돌아가셨다. 장례를 겨우 마치고, 상복도 미처 벗지 못했기에 병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을 때에 황제가 조칙을 보내 병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으니, 함자도 총관 유덕민(劉德敏) 등이 와서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때에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어 위급하다고 전해왔다. 유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상의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질 것이 걱정입니다. 웅진 길이 끊어지면 그곳에 남아있는 중국 병사가 곧바로 적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劉摠管遂共某相隨 先打瓮山城 旣拔瓮山 仍於熊津造城 開通熊津道路 至十二月 熊津粮盡 先運熊津 恐違勅旨 若送平壤 卽恐熊津絶粮 所以差遣老弱 運送熊津 强健精兵 擬向平壤 熊津送粮 路上逢雪 人馬死盡 百不一歸
유총관수공모상수 선타옹산성 기발옹산 잉아웅진조성 개통웅진도로 지십이일 웅진양진 선운웅진 공위칙지 약송평양 즉공웅진절량 소이차견노약 운송웅진 건강정병 응향평양 웅진송량로상봉운 인마사진 백불일귀
유총관은 마침내 나와 동행하여 먼저 옹산성(瓮山城)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아서 웅진 가는 길을 열어 통하게 하였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떨어졌으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내면 칙령을 어기게 되어 걱정이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걱정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운반하게 하고, 강건한 병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는데 웅진으로 수송하던 도중에 눈을 만나서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 백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至龍朔二年正月 劉摠管共新羅兩河道摠管金庾信等 同送平壤軍粮 當時陰雨連月 風雪極寒 人馬凍死 所將兵粮 不能勝致 平壤大軍 又欲歸還 新羅兵馬 粮盡亦廻 兵士饑寒 手足凍瘃 路上死者 不可勝數
지용삭이년정월 유총관공신라양하도총관김유신등 동송평양군량 당시음우연월 풍설극한 인마동사 소장병량 불능승치 평양대구 우욕귀환 신라병마 양진역회 병사기한 수족동촉 노상사자 불가승수
용삭(龍朔) 2년(서기 662) 정월, 유총관이 신라 양하도(兩河道) 총관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당시에 궂은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까지 불어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서 가져간 군량을 모두 다 전할 수는 없었다. 평양의 황제군은 돌아가기를 원했다. 신라 병사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회군하였는데, 군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으며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行至瓠瀘河 高句麗兵馬 尋後來趂 岸上列陣 新羅兵士 疲乏日久 恐賊遠趂 賊未渡河 先渡交刃 前鋒暫交 賊徒瓦解 遂收兵歸來 此兵到家 未經一月 熊津府城 頻索種子 前後所送 數萬餘斛
행지호로하 고구려병마 심푸래진 안상열진 신라병사 피핍일구 공적원진 적미도하 선도교인 행봉잠교 적도와해 수수병귀래 차병도가 미경일월 웅진부성 빈색종자 전후소송 수만여두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무렵 고구려 병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병사들은 피로하고 굶은 지 오래였으나, 적이 따라올까 걱정이 되어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교전했는데, 선봉이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의 무리가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병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병사들이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부성에서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기에 앞뒤로 보낸 곡식이 수만 섬이었다.
南運熊津 北供平壤 蕞小新羅 分供兩所 人力疲極 牛馬死盡 田作失時 年穀不熟 所貯倉粮 漕運竝盡 新羅百姓 草根猶自不足 熊津漢兵 粮食有餘 又留鎭漢兵 離家日久 衣裳破壞 身無全褐 新羅勸課百姓 送給時服
남운웅진 북공평양 최소신라 분공양소 인력피극 우마사진 전작실시 연곡불숙 소저창량 조운병진 신라백성 초근유자부족 웅진한병 양식유여 우류진한병 이가일구 의상파괴 신무전갈 신라권과백성 송급시복
남으로는 웅진에 보내고, 북으로는 평양에 보내며 작은 나라인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다보니, 인력은 피로가 극에 이르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지을 시기를 놓쳐서 곡식이 익지 않았고, 저장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운송하느라 모두 떨어졌다. 신라의 백성들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했으나 웅진의 중국 병사들은 식량이 넉넉하였다. 또한 남아있는 중국 군사들이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해어져 몸에 걸칠 온전한 옷이 없다고 하기에, 신라에서 백성들에게 할당을 하여 계절에 맞는 옷을 보내 주었다.
都護劉仁願 遠鎭孤城 四面皆賊 恒被百濟侵圍 常蒙新羅解救 一萬漢兵 四年衣食新羅 仁願已下 兵士已上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 國家恩澤 雖復無涯 新羅效忠 亦足矜憫
도호유인원 원진고성 사면개적 항피백제침위 상몽신라애구 일만한병 사년의식신라 인원이파병사이상 피골수생한지 혈육구시신라 국가은택 수복무애 신라효충 역족긍민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은 멀리 고립된 성에 주둔하여 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에게 공격을 받고 포위를 당하였는데, 언제나 신라가 구원하여 풀어주었다. 1만 명의 중국 병사가 4년간 신라의 옷과 식량을 먹고 입었으니, 유인원 이하 모든 병졸과 장수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은혜가 비록 끝이 없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至龍朔三年 摠管孫仁師領兵 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艘 停在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已定 廻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共打一城 固守拒捍 不能打得
지용삭삼년 총관손인사령병 구구부성 신아병마 역발동정 행지주류하 차시 왜국선병 래조백제 왜선천소 정재백강 백제정기 안상수선 신라효기위한전봉 선차안진 주류실감 수즉항하남방이정 회군북벌 임종일성 집미불항 양군병력 공타일성 고수거한 불능타득
용삭 3년(서기 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정벌에 참여하였다. 행군이 주류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도우려 하였다. 왜선 일천 척이 백강(白江)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중국 군대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 언덕의 진지를 쳐부수니, 주류성은 대적할 용기를 잃고 곧바로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쪽 지방을 정벌했는데 임존성(任存城) 한 곳이 고집스럽게 항복하지 않았다. 두 군대가 힘을 합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키며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었다.
新羅卽欲廻還 杜大夫云 準勅 旣平已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 新羅以爲準勅 旣平 已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 旣平 又且百濟 姦詐百端 反覆不恒 今雖共相盟會 於後恐有噬臍之患 奏請停盟
신라즉욕회환 두 대부운 준칙 기형이푸 공상맹회 임존일성 수미항하 즉가공상맹서 신라이위준칙 기평 아후 공상맹회 임존미항 불가이위 기평 우차백제 간사백단 반복불항 금수공상맹회 어푸공유서제지환 주청정맹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杜大夫)가 칙명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 모두가 모여 맹약을 맺으라 하였으니, 비록 임존성 하나가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히 평정한 이후에 맹약의 모임을 가져야 하는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하게 평정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겼으며, 또한 백제는 행동이 간사하고 속임수가 많아서 이랬다저랬다 반복을 잘하니 지금 비록 모여서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매우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걱정되므로, 맹약을 중지하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至麟德元年 復降嚴勅 責不盟誓 卽遣人於熊嶺 築壇共相盟會 仍於盟處 遂爲兩界 盟會之事 雖非所願 不敢違勅 又於就利山築壇 對勅使劉仁願 歃血相盟 山河爲誓 畵界立封 永爲彊界 百姓居住 各營産業
지인덕원년 복강엄칙 책부맹서 즉견인어웅령 축단공상맹회 잉어맹처 수위양계 맹회지사 수비소원 불감위칙 우어취리산축단 대칙사유인원 삽혈상맹 산하위서 화계입봉 영위강계 뱍성거주 각영산업
인덕(麟德) 원년(서기 664)에 황제가 다시 엄한 칙령을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나무랐으므로, 나는 즉시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맺었고,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모여서 맹약을 맺은 일은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就利山)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대고 산과 강에 맹세하기를,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封土)로 세워서 이를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들이 살면서 저마다 생업을 꾸리도록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至乾封二年 聞大摠管英國公征遼東 往漢城州 遣兵集於界首 新羅兵馬 不可獨入 先遣細作三度 船相次發遣 覘候大軍 細作廻來竝云 大軍未到平壤 且打高句麗七重城 開通道路 佇待大軍來至 其城垂垂欲破 英公使人江深來云 奉大摠管處分 新羅兵馬不須打城 早赴平壤 卽給兵粮 遣令赴會 行至水谷城 聞大軍已廻 新羅兵馬 遂卽抽來
지건봉이년 문대총관영국공정요동 왕한성주 견병집어계수 신라병마 불가독입 선견세작삼도선상차발견 점후대군 세작뢰래병운 대군미도평양 차타고구려칠중성 개통도로 저대대군래지 기성수수욕파 영공사인강심래운 봉대총관처분 신라병마불수타성 고부평양 즉급병량 견영부회 행지수곡성 문대군이회 신라병마 수즉추래
건봉(乾封) 2년(서기 667),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 요동(遼東)을 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그곳에서 병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도록 하였다. 신라의 군대가 홀로 쳐들어갈 수는 없어서 우선 세 차례 첩보병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띄워서 중국 군대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첩보병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열어 통하게 해놓고, 중국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칠중성이 거의 깨질 무렵에, 영공의 사자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명령을 받았는데, 신라의 군대가 꼭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빨리 평양으로 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명령대로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는데, 중국 군대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어 신라 군대도 즉시 빠져 나왔다.
至乾封三年 遣大監金寶嘉入海 取英公進止 奉處分 新羅兵馬 赴集平壤 至五月 劉右相來 發新羅兵馬 同赴平壤 某亦往漢城州 檢校兵馬 此時 蕃漢諸軍 摠集蛇水 男建出兵 欲決一戰
지건봉삼년 견대감김보가입해 취영공진지 봉처분 신라병마 부집평양 지오월 유우상래 발신라병마 동부평양 모역왕한성주 검교병마 차시 번한제군 총집사수 남건출병 욕결일전
건봉 3년(서기 668), 대감 김보가(金寶嘉)를 시켜 바다로 가서 영공의 진상품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가 신라 군사는 평양에 모이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우상(劉右相)이 와서 신라의 군대를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때 蕃漢(소수부족으로 한족화된) 군대가 사수에 집결하니, 남건(男建)도 출병하여 승부를 결정짓고자 하였다.
新羅兵馬 獨爲前鋒 先破大陣 平壤城中 挫鋒縮氣 於後英公更取新羅驍騎五百人 先入城門 遂破平壤 克成大功 於此新羅兵士竝云 自征伐已經九年 人力殫盡 終始平兩國 累代長望 今日乃成 必當國蒙盡忠之恩 人受效力之賞
신라병마 독위전봉 선파대진 평양성중 좌봉축기 어후영공경취신라효기오백인 선입성문 추파평양 극성대공 어차신라병사병운 자정벌이경구년 인력탄진 종시평양국 누대장망 금일내성필당국몽진충지은 인수효력지상
신라 군대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격파하니, 평양성의 예봉이 꺾이고 기세가 위축되었다. 그 후에 영공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뽑아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고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졸과 장수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 지 이미 9년이 지나 힘이 다하였으나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여러 대에 걸친 오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구나.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을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英公漏云 新羅前失軍期 亦須計定 新羅兵士得聞此語 更增怕懼 又立功軍將 並錄入朝 已到京下 卽云 今新羅並無功
영공루운 신라전실군기 역수계정 신라병사득문차어 경증박구 우립공군장 병록입조 이도경하즉운 금신라병무력
그러나 영공이 슬그머니 말하기를 ‘신라가 이전에 군대의 동원 기일을 어겼으니, 반드시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당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적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夫軍將歸來 百姓更加怕懼 又卑列之城 本是新羅 高麗打得三十餘年 新羅還得此城 移配百姓 置官守捉 又取此城 還與高麗. 且新羅自平百濟 迄定高麗 盡忠效力 不負國家 未知何罪 一朝遺棄 雖有如此寃枉 終無反叛之心
부장군귀래 백성경가박구 우비열지성 본시신라 고려타득삼십여년 신라롼득차성 이배백성 치관수착 우취차성 환여고려 차신라자평백제 흘정고려 진충효력 불부국가 미지하죄 일조유기 수유여차원왕 종무반반지심
장군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 지 삼십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들을 옮겨 살도록 하고 관리를 두어 지켰으나, 당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아침에 이렇게 버림을 당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반역할 마음은 갖지 않았다.
至總章元年 百濟於盟會處 移封易標 侵取田地 詃我奴婢 誘我百姓 隱藏內地 頻從索取 至竟不還 又通消息云國家修理船艘 外託征伐倭國 其實欲打新羅百姓聞之 驚懼不安 又將百濟婦女 嫁與新羅漢城都督朴都儒 同謀合計 偸取新羅兵器 襲打一州之地 賴得事覺 卽斬都儒 所謀不成
지총장원년 백제어맹회처 이봉역표 침취전지 견아노비 유아백성 은장내지 빈종색취 지경불환 우통소식운국가수리선소 외탁정벌외국 기실욕차신하백성문지 경구불안 우장백제부녀 가여신한한성도독박고유 동모합계 투취신라병기 습타일주지지 뢰득사각 즉참도유 소모불성
총장(總章) 원년(서기 668)에 백제가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밭과 토지를 침범하여 빼앗았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자기 나라로 데려가 숨기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한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은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이 듣고서 놀라고 겁을 내면서 불안해하였다. 또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가 우리의 한성 도독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장기를 훔쳐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마침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의 목을 베어 음모를 성공하지 못하게 하였던 일도 있었다.
至咸亨元年六月 高句麗謀叛 摠殺漢官 新羅卽欲發兵 先報熊津云 高句麗旣叛 不可不伐 彼此俱是帝臣 理須同討凶賊 發兵之事 須有平章 請遣官人來此 共相計會
지함형원년유월 고구려모반 총살한관 신라즉욕발병 선보웅진운 고구려기반 불가불벙 피차구시제신 이수동토흉적 발병지사 수유평장 청견관인래차 공상계회
함형(咸亨) 원년(서기 670) 6월,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켜 당의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였다.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와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함께 의논해야 할 문제이므로 관인을 이곳에 파견하여 함께 계획하기를 요청한다.’고 하였다.
百濟司馬禰軍來此 遂共平章云 發兵已後 卽恐彼此相疑 宜令兩處官人 互相交質 卽遣金儒敦及府城百濟主簿首彌長貴等 向府平論交質之事 百濟雖許交質 城中仍集兵馬 到彼城下 夜則來打
백제사마예군래차 수공평장운 발병이후 즉공피차상의 의령양처관인 호상교질 즉견김유돈급부성백제주박수미장귀등 향부평론교질지사 백제수허교질 성중잉집병마 도피성하 야즉래타.
백제의 사마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병사를 일으킨 뒤에 서로가 의심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두 편의 관인을 서로 바꾸어 볼모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유돈(金儒敦)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首彌), 장귀(長貴) 등을 웅진부로 보내어 볼모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볼모 교환에 응낙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만 되면 나와서 공격하곤 하였다.
至七月 入朝使金欽純等至 將畵界地 案圖披撿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三四年間 一與一奪 新羅百姓 皆失本望 並云 新羅百濟累代深讐 今見百濟形況 別當自立一國 百年已後 子孫必見呑滅 新羅旣是國家之州 不可分爲兩國 願爲一家 長無後患
지칠월 입조사김흠순등지 장화계지 안도피검백제구지 총령할환 황하미재 태산미려 삼사년간 일여일탈 신라백성 개실본망 병운 신라백제누내심수 금견백제형황 별당자립일굴 백년이후 자손필견탄멸 신라기시국가지주 불가분위양국 원위일가 장무후환
7월에 당에 입조하였던 사신 김흠순(金欽純) 등이 돌아와 장차 경계를 확정하려 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백제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삼사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세를 보면 스스로 따로 한 나라를 세운 셈이다. 백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삼켜져 멸망하고 말 것이다. 신라가 이미 백제를 하나의 주로 하였으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오래도록 후환이 없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去年九月 具錄事狀 發使奏聞 被漂却來 更發遣使 亦不能達 於後 風寒浪急 未及聞奏 百濟構架奏云 新羅反叛 新羅前失貴臣之志心 後被百濟之譖 進退見咎 未申忠款 似是之讒 日經聖聽 不貳之忠 曾無一達
거년구월 구록사장 발사진문 피표각래 경발견사 역불능달 어후 풍한랑급 미급문주 백제구가진운 신라반반 신라전실유신지지심 후피백제지참 진퇴견구 미신충관 사시지참 일경성덕 불이지충 증무일달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또한 당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갑고 파도가 심하여 결국 아뢰지 못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서 ‘신라가 반역한다.’고 아뢰었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나라 고관의 도우려는 마음을 잃었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든 물러나든 모두 허물을 입어 충성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참소가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어오니, 변함없는 충심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것이다.
使人琳潤至 辱書仰承 摠管犯冒風波 遠來海外 理須發使郊迎 致其牛酒 遠居異城 未獲致禮 時闕迎接 請不爲怪 披讀摠管來書 專以新羅已爲叛逆 旣非本心 惕然驚懼 數自功夫 恐被斯辱之譏 緘口受責 亦入不弔之數 今略陳寃枉 具錄無叛
사인림윤지 욕서앙승 총관범모풍파 원래해외 이수발사교영 치기우주 원거이성 미획치례 시궐영접 청불위괴 피독총관래서 전이신라이위반역 기비본심 창연경구 수자공부 공치사욕지기 함구수책 역입불조지수 금약진원왕 구록무반
사자인 임윤(琳潤)이 전한 편지를 보고서야,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바다에서 온 것을 알았다. 사자를 교외에 보내어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살아서 예를 갖추지 못하고 때맞춰 영접하지 못한 것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총관의 편지를 읽어보면 오로지 신라가 반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며, 걱정스럽고 놀라우며 두렵기만 하다. 우리의 공로를 자꾸 말하자니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지만, 입을 다물고 나무람을 받으면 또한 불길한 운수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지금 억울하고 그릇된 일을 대략 설명하고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國家不降一介之使 垂問元由 卽遣數萬之衆 傾覆巢穴 樓船滿於滄海 艫舳連於江口 數彼熊津 伐此新羅 嗚呼 兩國未定平 蒙指蹤之驅馳 野獸今盡 反見烹宰之侵逼 賊殘百濟 反蒙雍齒之賞 殉漢新羅 已見丁公之誅
국가불강일개지사 수문원유 즉견수만지중 경복소혈 누선만어창해 노축연어강구 수피웅진 벌차신라 명호 양국미정평 몽지종지구치 야수금진 반경팽제지침핍 적잔백제 반몽옹치지상 순한신라 이견정공지주
당에서는 한 명의 사신을 보내어 근본적인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고서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수만의 군사를 보냈으니, 병선은 푸른 바다를 덮어 배의 머리와 꼬리가 강어귀에 줄을 이었다. 저들 웅진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으니, 오호라! 두 나라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지금 짐승이 없어지자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처지가 되었구나.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을 받고, 당나라에 희생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丁公)의 죽음(丁公被戮, 정공이 잡혀죽음)을 당하였다.
大陽之曜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懷向日 摠管禀英雄之秀氣 抱將相之高材 七德兼備 九流涉獵 恭行天罰 濫加非罪 天兵未出 先問元由 緣此來書 敢陳不叛 請摠管審自商量 具狀申奏 雞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金法敏白
대양지요 수불회광 규곽본심 유호향일 총관품영웅지수기 초장상지고재 칠덕겸비 구유보렵공행천벌 람가비죄 천병미출 선문원유 연차래서 감진불반 청총관심자상량 구상신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란왕김법민왈”
햇빛이 비치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한 마음을 품고 있도다. 총관은 영웅의 뛰어난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주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 가지 종류의 학문을 섭렵하였으니, 삼가 천자의 벌을 행함에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지 않으리라. 황제의 군대를 내기 전에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기에, 감히 반역하지 않았음을 진술하였다. 총관은 스스로 깊이 살피고 생각하여 황제께 실상을 아뢰기를 바란다.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왕(雞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 김법민이 말하노라.”
置所夫里州 以阿飡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艘 捉郞將鉗耳大侯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飡當千功第一 授位沙飡
치소소부리주 이아찬진왕위도독 구월 당장군고간등 솔번병사만도평양 심구고루침대방 동시월육일 격당조선칠십여소 착낭장감이대후사졸백여인 기윤몰자 불가승수 급찬당천송제일 수위사찬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의 병사 4만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서, 대방(帶方)에 침입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나라 운반선 7십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일당천(一當千)의 공이 제일이었기에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十二年春正月 王遣將攻百濟古省城 克之, 二月 攻百濟加林城 不克, 秋七月 唐將高侃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 作八營留屯,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 進兵 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高侃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飡曉川沙飡義文山世阿飡能申豆善一吉飡安那含良臣等死之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십이년춘정월 왕견장공백제고성성 극지, 이월 공백제가림성 불극. 추칠월 당장고간솔병일만 이근행솔병삼만 일시지평양 작팔영유둔, 팔월 공한시성마읍성 극지 진병 거백수성오백허보작영 아병여고구려병역전 참수수천급 고간등퇴 추지석문전지 아병패적 대아식효천사찬의문산세아찬능신두선일길찬안나함양신등사지 축한산주화장성 주사천삼백육십보.
12년(서기 672) 봄 정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 백제의 가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이근행은 병사 3만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당도하여 여덟 개의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8월, 당나라 병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병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백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진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병사와 고구려 병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으나, 우리 병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ㆍ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ㆍ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ㆍ양신(良臣) 등이 그곳에서 죽었다.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4천3백6십 보였다.
九月 彗星七出北方 王以向者百濟往訴於唐 請兵侵我 事勢急迫 不獲申奏 出兵討之 由是 獲罪大朝 遂遣級飡原川奈麻邊山及所留兵船郞將鉗耳大侯萊州司馬王藝本烈州長史王益熊州都督府司馬禰軍曾山司馬法聰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구월 혜성칠출북장 왕이향자 백제왕소어당 청병침아 사세급박 불획신주 출병토지 유시 획죄대조 수견급찬원천내마변산급소유병선랑장감이대푸래주사마왕예본열주장사왕익웅주도독부사마예군증산사마법총군사일백칠십인 상표걸죄왈
9월, 혜성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임금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병사를 청하여 우리를 침공했을 때, 일이 급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않고 병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 및 붙잡아 두었던 당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과 병사 1백7십 명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糜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然深讐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신모사죄근신 석신위급 사약도현 원몽증수 득면도멸 분신미골 미족상보홍은 쇄수회진 하능앙수자조 연심수백제 핍근신번 고인천병 멸신설치
“신(臣)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저의 처지가 위급하여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멀리서 건져주신 은혜를 입어 겨우 죽을 것을 면하였습니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엔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우리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황제의 군대를 끌어들여 저희를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였습니다.
臣懼破滅 自欲求存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少垂神聽 炤審元由
신구파멸 자욕구존 왕피흉역지명 수입난사지죄 신공사의미신 선종형육 생위역명지신 사위배은지귀 슨록사상 모사진문 복원소수신청 소심원유
저는 파멸이 두려워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제가 행한 일의 의도를 아뢰지 못하고 먼저 벌을 받아 죽게 된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遂使聖朝出言 命將討臣之罪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瀦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신전대이래 조공부절 근위백제 재휴직공 수사성조출언 명장토신지죄 사유여형 남산지죽 부족서신지죄 포야지림 미족작신지계 저지종사 도열신신 사청칙재 감심수륙
저는 전대 이래로 조공을 끊지 않았으나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마침내는 황제의 조정에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저의 죄는 죽어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남산(南山)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 써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사직을 헐어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저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 친히 판단을 내려주신다면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臣櫬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並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儻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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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관을 곁에 놓고 머리의 진흙도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과 같아서 그 빛을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하여 동식물이 모두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멀리 벌레에게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만약 용서를 하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을 날이 오히려 생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勅旨 某頓首頓首 死罪死罪”
비소희기 감진소회 불승복검지지 근견원천등 배표사죄 복청칙지 모돈수돈수 사죄사죄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마음속의 생각을 펼치,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原川) 등을 보내 글월을 올려 사죄하고,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布六匹 三十升布六十匹
겸진공은삼만삼촌오백푼 동삼만참천푼 침사백매 우황백이십푼 금백이십푼 사십승초육필 삼십승포육십필
이와 동시에 은 3만3천5백 푼, 구리 3만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20 푼, 금 1백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是歲 穀貴人飢
시세 곡귀인기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十三年春正月 大星隕皇龍寺 在城中間地震 拜强首爲沙飡 歲賜租二百石 二月 增築西兄山城 夏六月 虎入大宮庭 殺之
십삼년춘정월 대성운황룡사 재성중간지진 배강수위사찬 세사조이백석 이월 증축서형산성 하유월 호입대궁정 살지.
13년(서기 673) 봄 정월, 커다란 혜성이 황룡사(皇龍寺)에 떨어졌다. 재성(在城, 도성을 이름)에 지진이 났다. 강수(强首)를 사찬으로 삼고 해마다 벼 2백 섬을 주었다.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와서, 잡아다 죽였다.
秋七月一日 庾信卒 阿飡大吐謀叛付唐 事泄伏誅 妻孥充賤 八月 以波珍飡天光爲中侍 增築沙熱山城
추칠월일일 유신졸 아찬대토모반부당 사설복주 처라충천 팔월 이파진찬천광위중시 증축사열산성
가을 7월 1일, 유신(庾信)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였으나, 일이 탄로나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와 자식들은 천민으로 만들었다. 8월, 파진찬 천광(天光)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九月 築國原城(古薍長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一名迭巖城)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歃良州骨爭峴城
구월 축국원성(고완장성)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주양성(일명질암성)달함군주감성거열주만흥사산성삽량주골쟁현성
9월, 국원성(國原城:옛날 완장성),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혹은 질암성),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王遣大阿飡徹川等 領兵船一百艘 鎭西海 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 凡九戰 我兵克之 斬首二千餘級 唐兵溺瓠瀘王逢二河 死者不可勝計
왕견대아찬철천등 영병선일백소 진서해 당병여말갈거란병래침북변 범구전 아병극지 참수이천여급 당병익호로왕봉이하 사자불가승계
임금이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병사가 말갈과 거란의 병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싸워 우리의 병사가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목을 베었고, 당의 병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冬 唐兵攻高句麗牛岑城 降之 契丹靺鞨兵攻大楊城童子城 滅之 始置外司正 州二人郡一人 初 太宗王滅百濟 罷戍兵 至是復置
동 당병공고구려우잠성 항지 거란말갈병공개영성동자성 멸지 시치외사정 주이인군일인 초태종왕명백제 파수병 지시복치
겨울, 당나라 병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과 말갈의 병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오늘날 공수처???)을 두었는데, 주(州)에는 두 사람, 군(郡)에는 한 사람을 두었다. 일찍이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파수병들을 없앴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둔 것이다.
十四年春正月 入唐宿衛大奈麻德福傳 學曆術還 改用新曆法
십사년춘정월 입당숙위대나마덕복전 학력술환 개용신역법
14년(서기 674) 봄 정월,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던 대나마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배우고 돌아왔다. 사용하던 역법을 새 역법으로 고쳤다.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詔削王官爵 王弟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在京師 立以爲新羅王 使歸國 以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劉仁軌爲雞林道大摠管 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 發兵來討
왕납고구려반중 우거백제고지 사인수지 당고종대노 조삭왕관직 왕제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인문재경사 입이위신라왕 사귀국 이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유인궤위계림도대총관 위위경이필우영군대장군이근행부지 발병래토.
임금이 당에 반란을 일으킨 고구려의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를 내려 임금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그리고 당의 서울에 있던 임금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에게 보좌하도록 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벌해왔다.
二月 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秋七月 大風毁皇龍寺佛殿 八月 大閱於西兄山下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十年 封安勝高句麗王 今再封 不知報德之言 若歸命等耶 或地名耶) 幸靈廟寺前路閱兵 觀阿飡薛秀眞六陣兵法
이월궁내천지조산 종화초 영진금기수 추칠월 대풍훼황룡사불전 팔월 대열어서형산하 구월명의안법사위대서상 봉안승위보덕왕(십년 봉안승고구려왕 금재봉 부지보덕지언 역귀명등야혹지명야) 행영묘사전로열병 관아찬설수진육진병법
2월, 궁궐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가을 7월, 커다란 바람이 불어 황룡사의 불전이 무너졌다.
8월,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에 책봉하였다.(문무왕 10년-서기 670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지금 재차 책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영묘사(靈廟寺) 앞길에 행차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
十五年春正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 頒之.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 出九軍 待之
십오년춘정월 이동주백사급주군인 반지. 이월 유인궤파아병어칠중성 인궤인병환 조이이근행위안동진무대사 이경략지 왕내견사 입공차사죄 제사지 복왕관작 김인문중로이환 개봉임해군공 연다취백제지 수저고구려남경위주군 문당여거란말갈병내침 출구군 대지.
15년(서기 675) 봄 정월, 구리로 각 관청 및 주ㆍ군의 인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2월,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병사를 쳐부수었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당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임금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이 도중에 당으로 되돌아가니,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 지역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게 되었다. 당나라 병사가 거란과 말갈의 병사와 함께 침략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군대를 출진시켜 대비하였다.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艘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추구월 설인귀이숙위학생풍훈지부김진주 복주어본국 인풍훈위향도 내공천성 아장군문훈등역전승지 참수이천사백여급 취병선사십소 인귀해위퇴주 득전마일천필
가을 9월,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인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핑계로 풍훈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에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헤치고 도망하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遣使入唐貢方物 緣安北河設關城 又築鐵關城
이십구일 이근행솔병이십만 준매초성 아군격주지 득전마삼만삼백팔십필 기여병장 칭시 견사입당공방물 연안북하설관성 우축철관성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3백8십 필을 얻었으며 그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문과 성을 설치하고 또한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靺鞨入阿達城劫掠 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 圍七重城 不克 小守儒冬死之 靺鞨又圍赤木城滅之 縣令脫起率百姓 拒之 力竭俱死
말갈입아달성각략 성주소나역전사지 당병역거란말갈병래 위칠중성 불극 소수유동사지 말갈우위적목성명지 현령탈기솔백성 거지 력갈구사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가 죽었다. 당나라 병사가 거란과 말갈 병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소수 유동(儒冬)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포위하여 멸하였다. 현령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 力戰死之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匹
당병우위석현성 발지 현령선백실모등 역전사지 우아병여당셥대소십팔전 개승지 참수육천사십칠급 득전마이백필
당나라 병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또한 우리 병사가 당나라 병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천4십7명의 목을 베고 전마(戰馬) 2백 필을 얻었다.
十六年春二月 高僧義相奉旨 創浮石寺 秋七月 彗星出北河積水之間 長六七許步 唐兵來攻道臨城拔之 縣令居尸知死之 作壤宮. 冬十一月 沙飡施得領船兵 與薛仁貴戰於所夫里州伎伐浦 敗績 又進大小二十二戰 克之 斬首四千餘級 宰相陳純乞致仕 不允 賜几杖
십육년춘이월 고승의상봉지 창부석사 추칠월 혜성출북사적수지간 장육칠허보 당병래공도임성발지 현령거시지사지 작양궁. 동십일월 사찬시득영선병 여설인귀전어소부리주기벌포 패적우진대소이십이전 극지 참수사천여급 재상진순걸치사 불충 사궤장
16년(서기 676) 봄 2월, 고승 의상(義相)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두 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정도 되었다. 당나라 병사가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재상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
十七年春三月 觀射於講武殿南門, 始置左司祿館, 所夫里州獻白鷹
십칠년춘삼월 관사어강무전남문 시치좌사록관 소부리주헌백응
17년(서기 677) 봄 3월,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고, 처음으로 좌사록관(左司祿館)을 두었으며.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十八年春正月 置船府令一員 掌船楫事 加左右理方府卿各一員 置北原小京 以大阿飡吳起守之 三月 拜大阿飡春長爲中侍 夏四月 阿飡天訓爲武珍州都督. 五月 北原獻異鳥 羽翮有文 脛有毛.
십팔년춘정월 치선부령일원 장선즙사 가좌우리방부경각일원 치북원소경 이대아찬오기수지. 삼월 배대아찬춘장위중시. 하사월 아찬천훈위무진주도독. 오월 북원헌이조 우핵유문 경유모.
18년(서기 678) 봄 정월, 선부령(船府令) 1인을 두어 선박에 관한 일을 맡게 하고 좌ㆍ우리방부(左右理方府)에 경(卿)을 각 1인씩을 더 두었다. 북원(北原)을 소경(小京)으로 삼고 대아찬 오기(吳起)에게 지키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春長)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 아찬 천훈(天訓)을 무진주(武珍州) 도독으로 삼았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 털이 나 있었다.
十九年春正月 中侍春長病免 舒弗邯天存爲中侍. 二月 發使略耽羅國 重修宮闕 頗極壯麗. 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角干天存卒 創造東宮 始定內外諸門額號 四天王寺成 增築南山城.
십구년춘정월 중시춘장병면 서불한천존위중시. 이월 발사략탐라국 중수궁궐 파극장여. 하사월 형혹수우림. 유월 태백입월 유성범참대성. 추팔월 태백입월 각간천존졸 창조동궁 시정내외제문액호 사천왕사성 증축남산성.
19년(서기 679)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서불한 천존(天存)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耽羅國)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여름 4월, 화성이 우림(羽林)성좌에 들어섰다.
6월, 금성이 달의 자리에 들어가고, 유성이 참대(參大)성좌를 침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의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완성하였다.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다.
二十年春二月 拜伊飡金軍官爲上大等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妻之(一云迊飡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이십년춘이월 배이찬김군관위상대등 삼월 이금은기급잡채백단 사보덕왕안승 수이왕매처지(일운잡찬김의관지녀야) 하교서왈
20년(서기 680) 봄 2월,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임금의 여동생(혹은 잡찬 김의관(金義官)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雞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舊章 以寡人妹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 式奉宗祧 克茂子孫 永豊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인륜지본 부부유선 왕화지기 계사위주 왕작소위광 계명재심 불가구공내보지의 영궐기가지업 금양진길일 솔순구장 이과인매녀위항려 왕의공돈심의 식봉종조 극무자손 영풍반석 기불성여 기불미여.”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왕됨의 근본은 나라를 이어감이 가장 중요하다. 왕의 자리를 빛나게 하고 창업(계림에서 시조를 얻음)을 염두에 두어 내조의 예를 늘 갖춰 그 왕업을 일으켜야 한다. 이제 좋은 날을 맞아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서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함께 마음과 뜻을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무성하게 함이 마땅하리라. 길이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 鳩居鵲巢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飡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하오월 고구려왕사대장순연무등상표왈 신안승언 대아찬김관장지 봉선교지 병사교서 이외생공녀 위하읍내주 잉이사월십오일지차 희구교회 망지유치 절이제녀강규 왕희적제 본창성덕비관범재.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이 아뢰옵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임금의 조카 따님을 이곳의 안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요임금이 자기의 딸을 규(嬀,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주의 왕이 공주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성스러운 덕이 드러난 일로써, 사위될 자가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臣本庸流 行能無筭 幸逢昌運 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신본용류 행능무산 행봉창운 목욕성화 매하수택 욕보무계 중몽천총 강차인친 수즉농화표경 숙옹성덕.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실과 재능에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귀한 사람이 되어 매번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듭 대왕의 인척을 보내주시는 총애를 입으니 만발한 꽃의 기쁨을 표하고, 겸허히 성덕에 따를 뿐입니다.
吉月令辰 言歸弊館 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길일영진 언귀폐관 억재난우 일조획신 사비망시 희출의표 기유일이부형 실수기사 기자선죠이하 식총희지 신미몽교지 우감즉조 무임열에지지 근견신대장운태대형연무 봉표이문.”
이제 길일에 누추한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을 살더라도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아침에 얻은 셈입니다. 본래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며, 생각하지도 못하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보통의 부형(父兄)이 실로 이러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모두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 찾아가 뵙지는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加耶郡置金官小京
가야군치금관소경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二十一年春正月朔 終日黑暗如夜. 沙飡武仙率精兵三千 以戍比列忽. 置右司祿館. 夏五月 地震 流星犯參大星. 六月 天狗落坤方 王欲新京城 問浮屠義相 對曰 雖在草野茅屋 行正道 則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城 亦無所益 王乃止役
이십일년춘정월삭 종일흑암여야 사찬무선솔정병삼천 이수비열혹 치우사록관. 하오월 지진유성범참대성. 유월 천구락곤방 왕욕신경성 문부도의상 대왈 수재초야모옥 행정도 즉부업장구위불여 수노인작성 역무소익 왕내지역.
21년(서기 681) 봄 정월 초하루,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두웠고, 사찬 무선(武仙)이 정예 병사 3천을 이끌고 비열홀을 지켰으며, 우사록관(右司祿館: 재정사무국정도)을 설치하였다.
여름 5월, 지진이 났다. 유성이 참대성(參大星: 서쪽 오리온좌를 의미하기도 함)을 침범하였다.
6월, 천구(天狗:天狗星: 혜성이며 불길한 징조)가 서남쪽에 떨어졌다. 임금이 왕성을 새로 짓고자 하여 승려 의상에게 물어보니, 의상이 대답하였다.
“비록 들판의 초가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스러운 업이 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들을 힘들게 하여 성을 만들지라도 역시 이익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공사를 그만두었다.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中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遺詔曰
추칠월일일 왕훛 시왈문무 군신이유언장동해중대석상 속전왕화위룡 잉지기석위대왕석 유조왈
가을 7월 1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임금이 화(化)하여 용이 되었다.’라 하고, 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불렀다. 왕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寡人運屬紛紜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攜 聿寧遐邇 上慰宗祧之遺顧 下報父子之宿寃 追賞遍於存亡 疏爵均於內外 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 薄賦省傜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內無虞 倉廩積於丘山 囹圄成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敎 更結沈痾 運往名存 古今一揆 奄歸大夜 何有恨焉
”과인운속분운 시당쟁전 서정북토 극정강봉 벌반초휴 율녕하이 상이종조지유고 하보부자지숙원 추상편어존망 소작균어내와 주병과위농시 구려원어인수 박부성요 가급인족 민간안도역내무려 창름적어구산 영어성어무초 가위무괴어유현 무부어사인 자범모풍상 수성고질 우노정교 경결침아 운왕명존 고금일규 엄귀대야 하유한언.
“과인은 어지러운 운을 타고 태어나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하였고, 배반하는 자는 정벌하고 협조하는 무리와는 손을 잡아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히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이 남긴 유명을 달래었고 아래로는 부자의 묵은 원수를 갚았으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에게 상을 공평히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고르게 주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천수를 다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금을 가벼이 하고 요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백성들은 만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죄수가 없어 풀이 우거졌으니, 신령에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낫기 어려운 병에 걸렸는데,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애쓰느라 더욱 위중한 병이 되었다. 죽고 나면 이름만이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어두운 죽음으로 가는 것에 어찌 여한을 품겠는가?
太子早蘊離輝 久居震位 上從群宰 下至庶寮 送往之義勿違 事居之禮莫闕 宗廟之主 不可暫空 太子卽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태자조온이휘 구거진위 상종군재 하지서료 송왕지의물위 사거지례막관 종묘지주 불가잠공 태자즉어구전 사립왕위 차산곡천무 인대추이 오왕북산지분 거견금부지채 위주서릉지망 유문동작지명.
태자는 일찍부터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를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있는 이를 섬기는 예를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산과 골짜기도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향로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왕의 서릉(西陵)을 바라보면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 뿐이다.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석일만기지영 종성일봉지사 초목가기상 고토혈기방 도비자재 이기간독 공노인력 막제유혼 정이사지 상통무이 여차지류 비소악언
지난날 만사를 다루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파게 되는 것이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역사서에 꾸짖음만 남길 따름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도 죽은 이의 넋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其邊城鎭遏 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並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속광지후십일 변어고문외정 의서국지식 이화소장 복경중 자유상과 상제도 무종검약 기변성진알 급주현과세 어사비요자 진의양폐 율령격식 유불편자 즉경개장 포고원군 영지차의 주자시행.
내가 숨을 거두고 열흘이 지나면 곧 창고 문 앞 바깥의 뜰에서 불교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을 입는 법도는 정해진 규정을 따르되 장례의 절차는 반드시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과 요새, 주와 현의 장레 비용 세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에 편치 못한 것이 있으면 즉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알리도록 할지니, 주관하는 이는 시행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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