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德王
聖德王立 諱興光 本名隆基 與玄宗諱同 先天中改焉(唐書言金志誠) 神文王第二子 孝昭同母弟也 孝昭王薨無子 國人立之 唐則天聞孝昭薨 爲之擧哀 輟朝二日 遣使吊慰 冊王爲新羅王 仍襲兄將軍都督之號
성덕왕립 휘흥광 본명융기 여현종휘동 선천중개언(당서언김지성) 신문왕제이자 효소동모제야. 효소왕훙무자 국인립지 당즉천문효소훙 위지거애 철조이일 견사조위 책왕위신라왕 잉습형장군도독지호.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였는데,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당 현종 연호) 연간에 고친 것이다.(『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 하였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를 애도하기 위하여 이틀간 조회를 쉬었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아울러 임금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형(효소왕)의 칭호인 장군도독(將軍都督)을 이어받게 하였다.
元年 九月 大赦 增文武官爵一級 復諸州郡一年租稅 以阿飡元訓爲中侍 冬十月 歃良州 櫟實變爲栗
원년 구월 대사 증문무관작일급 복제주군일년조세 이하찬원훈위중시 동시월 삽량주 력실변위율.
원년(서기 702)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리들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었으며,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 삽량주(歃良州)에서 도토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遣使入唐貢方物. 秋七月 靈廟寺災 京都大水 溺死者衆 中侍元訓退 阿飡元文爲中侍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遣阿飡金思讓朝唐
이년 춘정월 친사신궁 견사입당공방물 추칠월 영묘사재 경도대수 익사자중 중시원훈퇴 아찬원문위중시 일본국사지 총이백사인 견아찬김사양조당.
2년(서기 703) 봄 정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수도지역에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일본국 사신이 당도했는데, 모두 2백4명이었다.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였다.
三年 春正月 熊川州進金芝. 三月 入唐金思讓廻 獻最勝王經. 夏五月 納乘府令蘇判金元泰之女爲妃
삼년 춘정월 웅천주진김지 삼월 입당김사양회 언최승왕경 하오월 납승부영소찬김원태지녀위비
3년(서기 704) 봄 정월, 웅천주(熊川州)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다.
3월,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金思讓)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여름 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들였다.
四年 春正月 中侍元文卒 以阿飡信貞爲中侍. 三月 遣使入唐朝貢. 夏五月 旱. 秋八月 賜老人酒食 .九月 下敎禁殺生 遣使如唐獻方物. 冬十月 國東州郡饑 人多流亡 發使賑恤.
사년 춘정월 중시원문졸 이아찬신정위중시. 삼월 견사입당조공. 하오월 한 추팔월 사노인주. 구월 하교금살생 견사여당헌방물. 동시월 국동주군기 인다유망 발사진휼.
4년(서기 705) 봄 정월,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주었다.
9월,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의 주와 군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유랑하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 구제하였다.
五年 春正月 伊飡仁品爲上大等 國內饑 發倉廩賑之 三月 衆星西流 夏四月 遣使入唐貢方物 秋八月 中侍信貞病免 以大阿飡文良爲中侍 遣使入唐貢方物 穀不登 冬十月 遣使入唐貢方物 十二月 大赦
오년 춘정월 이찬인품위상대등 국내기 발창름진지. 삼월 중성서류. 하사월 견사입당조공방물. 추팔월 중신신정병면 이대아찬문양위중시 견사입당공방물 곡부등. 동시월 견사입당공방물 십이월 대사.
5년(서기 706) 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 안이 기근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3월, 뭇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중시 신정이 병이 들어 관직을 그만두었기에, 대아찬 문량(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六年 春正月 民多饑死 給粟人一日三升 至七月. 二月 大赦 賜百姓五穀種子 有差. 冬十二月 遣使入唐貢方物
육년 춘정월 민다기사 급속인일일삼승 지칠월 이월 대사 사백성오곡종사 유차 동십시월 견사입당공방물
6년(서기 707) 봄 정월,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으므로 한 사람에게 하루 좁쌀 석 되 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정도에 따라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七年 春正月 沙伐州進瑞芝. 二月 地震. 夏四月 鎭星犯月 大赦
칠년 춘정월 사벌주진서지. 이월 지진 하사월 진겅범월 대사.
7년(서기 708) 봄 정월, 사벌주(沙伐州)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八年 春三月 菁州獻白鷹. 夏五月 旱. 六月 遣使入唐貢方物. 秋八月 赦罪人
팔년 춘삼월 청주헌백응. 하오월 한. 유월 견사입당공방물. 추팔월 사죄인.
8년(서기 709) 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九年 春正月 天狗隕三郞寺北 遣使入唐貢方物 地震 赦罪人
구년 춘정월 천구운삼랑사북 견사입당공방물 지진 사죄인.
9년(서기 710) 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지진이 났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十年 春三月 大雪. 夏五月 禁屠殺. 冬十月 巡狩國南州郡 中侍文良卒. 十一月 王製百官箴示群臣. 十二月 遣使入唐貢方物
십년 춘삼월 대설. 하오월 금도살. 동시월 순수국남주군 중시문량졸. 십일월 왕제백관잠시군신. 십이월 견사입당공방물.
10년(서기 711) 봄 3월, 눈이 많이 내렸다.
여름 5월,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살펴보았다. 중시 문량이 죽었다.
11월, 임금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十一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以伊飡魏文爲中侍 大唐遣使盧元敏 勑改王名. 夏四月 駕幸溫水. 秋八月 封金庾信妻爲夫人 歲賜穀一千石
십일년 춘이월 견사입당조공. 삼월 이이찬위문위중시 대당견사노월민 래개왕명. 하사월 가행온수. 추팔월 봉김유신처위부인 세사곡일천석.
11년(서기 712) 봄 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임금의 이름을 고치라는 칙명을 내렸다.
여름 4월, 임금이 온수(溫水)에 행차하였다.
가을 8월,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도록 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置典祀署 遣使入唐朝貢 玄宗御樓門 以見之. 冬十月 入唐使金貞宗廻 降詔書 封王爲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雞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 冬十月 中侍魏文請老 從之 十二月 大赦 築開城
십이년 춘이월 치전사서 견사입당조공 현종어루문 이견지. 동시월 입당사김정종회 강조서 봉왕위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 동시월 중시위문청노 종지. 십이월 대사 축개성.
12년(서기 713) 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당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사신을 접견하였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정종(金貞宗)이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임금을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에 책봉하였다.
겨울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기에 승낙하였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개성(開城)을 쌓았다.
十三年 春正月 伊飡孝貞爲中侍. 二月 改詳文詳文師爲通文博士 以掌書表事 遣王子金守忠入唐宿衛 玄宗賜宅及帛以寵之. 賜宴于朝堂 閏二月 遣級飡朴裕入唐賀正 賜朝散大夫員外奉御還之 夏旱 人多疾疫. 秋 歃良州山橡實化爲栗 冬十月 唐玄宗宴我使者于內殿 勑宰臣及四品已上淸官預焉
십삼년 춘정월 이찬효정위중시. 이월 개상문상문사위통문박사 이장서표사 견왕자김수충입당숙위 현종사택급뱍이총지 사연우조당. 윤이월 견급찬박유입당하정 사조산대부원외봉어환지하한 인다질역. 추 삽량주산상실화위율. 동시월 당현종연아사자우내전 래제신습사뭋이상청궁예언.
13년(서기 714) 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쳐 표문을 쓰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그를 총애하고, 조당(朝堂,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윤 2월,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인사를 드리니,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 가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가을, 삽량주(歃良州) 산에서 도토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겨울 10월, 당나라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우리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조칙으로 재상과 4품 이상의 주요 관리들에게 참여하도록 하였다.
十四年 春三月 遣金楓厚入唐朝貢. 夏四月 菁州進白雀. 五月 赦. 六月 大旱 王召河西州龍鳴嶽居士理曉 祈雨於林泉寺池上 則雨浹旬. 秋九月 太白掩庶子星. 冬十月 流星犯紫微. 十二月 流星自天倉入大微 赦罪人 封王子重慶爲太子
십사년 춘삼월 견김풍후입당조공. 하사월 청주진백작. 오월 사 유월 대한 왕소하서주용명악거사히효 기우어림천사지상 즉우래순. 추구월 태백엄서자성. 동시월 유성범자미. 십이월 유성자천창입대미 사죄인 봉왕자중경위태자.
14년(서기 715) 봄 3월, 김풍후(金楓厚)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청주(菁州)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5월,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6월, 크게 가뭄이 들었다. 임금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가을 9월,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 북극 근방)을 가렸다.
겨울 10월,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다.
12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流星犯月 月無光. 三月 遣使如唐獻方物 出成貞[一云嚴貞]王后 賜彩五百匹田二百結租一萬石宅一區 宅買康申公舊居 賜之. 大風拔木飛瓦 崇禮殿毁 入唐賀正使金楓厚欲歸國 授員外郞還之. 夏六月 旱 又召居士理曉祈禱 則雨 赦罪人,
십오년 춘정월 유성범월 월무광. 삼월 견사여당헌방물 출성정(일운엄정)왕후 사채오백필전이백결조일만석대일구 댁매강신공구거 사지. 대풍발목비와 숭례전훼 입당하정사김풍후욕귀국수원외랑환지. 하유월 한 우소거사리효기도 즉우 사죄인.
15년(서기 716) 봄 정월, 유성에 달빛이 없어졌다.
3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성정왕후(成貞王后 혹은 엄정(嚴貞)를 궁에서 내보냈다. 채색 비단 5백 필과 밭 2백 결, 벼 1만 섬과 집 한 채를 주었다, 그 집은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사서 준 것이다. 큰 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렸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당나라에 들어갔던 하정사(賀正使) 김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그에게 원외랑(員外郞)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어서,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置醫博士筭博士各一員. 三月 創新宮. 夏四月 地震. 六月 太子重慶卒 諡曰孝殤. 秋九月 入唐大監守忠廻 獻文宣王十哲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
십육년 춘이월 치의박사산박사각일원. 삼월 창신궁. 하사월 지진. 유월 태자중경졸 시왈효상. 추구월 입당대감수충회 헌문선왕십철칠십이제자도 즉치대학.
16년(서기 717) 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 각각 1인씩을 두었다.
3월, 새로 궁궐을 지었다.
여름 4월, 지진이 났다.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가을 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및 72제자(七十二弟子)의 초상화를 바쳤으므로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中侍孝貞退 波珍飡思恭爲中侍. 二月 王巡撫國西州郡 親問高年及鰥寡孤獨 賜物有差. 三月 地震. 夏六月 震皇龍寺塔 始造漏刻 遣使入唐朝貢 授守中郞將還之. 冬十月 流星自昴入于奎 衆小星隨之 天狗隕艮方 築漢山州都督管內諸城
십칠년 춘정월 중시효정퇴 파진찬사공위중시. 이월 왕순무국서주군 친문고년급환과고독 사물유차. 삼월 지진 하유월 진황룡사탑 시조누각 견사입당조공 수수중알장환지. 동시월 유성자앙입우규 중소성수지 천구운간방 축한산주도독관내제성.
17년(서기 718) 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임금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는데,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몸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3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을 만들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겨울 10월, 유성이 묘(昴)성좌로부터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다. 천구성(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한산주(漢山州) 도독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十八年 春正月 遣使入唐賀正. 秋九月 震金馬郡彌勒寺.
십팔년 춘정월 견사입당하정. 추구월 진금마군미륵사.
18년(서기 719)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가을 9월, 금마군(金馬郡)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十九年 春正月 地震 上大等仁品卒 大阿飡裴賦爲上大等 三月 納伊飡順元之女 爲王妃 夏四月 大雨 山崩十三所 雨雹傷禾苗 五月 命有司埋骸骨 完山州進白鵲 六月 冊王妃爲王后 秋七月 熊川州獻白鵲 蝗蟲害穀 中侍思恭退 波珍飡文林爲中侍.
십구년 춘정월 지진 상대등인품졸 대아찬배부위상대등. 삼월 남이찬순원지녀 위왕비. 하사월 대우 산붕십삼소 우박상화묘. 오월 명진사매해골 완산주진백작. 유월 책왕비위왕후. 추칠월 훙천주헌백작 황충해곡 중시사공퇴 파진찬문림위중시.
19년(서기 720) 봄 정월, 지진이 났다.
상대등 인품이 죽었기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이찬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큰 비가 와서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이 떨어져 볏모가 상하였다.
5월, 관리에게 명하여 해골을 땅에 묻게 하였다.
완산주(完山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웅천주(熊川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중시 사공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二十年 秋七月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 冬 無雪
이십년 추칠월 징하슬라도정부이천 축장성어북경. 동 무설
20년(서기 721) 가을 7월, 하슬라(何瑟羅) 지방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十一年 春正月 中侍文林卒 伊飡宣宗爲中侍. 二月 京都地震. 秋八月 始給百姓丁田. 冬十月 遣大奈麻金仁壹入唐賀正 幷獻方物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이십일년 춘정월 중시문림졸 이찬선종위중시. 이월 경도지진. 추팔월 시급백성정전. 동시월 견대나마김인일입당하정 병헌방물 축보벌군성 이차일본적로.
21년(서기 722) 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었기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가을 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
겨울 10월, 대나마 김인일(金仁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二十二年 春三月 王遣使入唐獻美女二人 一名抱貞 父天承奈麻 一名貞菀 父忠訓大舍 給以衣着器具奴婢車馬 備禮資遣之 玄宗曰 女皆王姑姊妹 違本屬別本國 朕不忍留 厚賜還之.
이십이년 춘삼월 왕견사입당헌미녀이인 일명포정 부천승나마 일명정완 부충훈대사 습이의착기구노비거마 비례자견지 현종왈 여개왕고자매 위본속별본국 짐불인류 후사환지.
22년(서기 723) 봄 3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한 명의 이름은 포정(抱貞)으로 아버지가 나마 천승(天承)이고, 또 한 명의 이름은 정완(貞菀)으로 아버지가 대사 충훈(忠訓)이다. 그들에게 의복,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주어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玄宗)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내종 자매로서 친척과 헤어져 고국을 떠났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도록 하지 못하겠다.” 고 하며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貞菀碑云 孝成六年 天寶元年歸唐 未知孰是. 夏四月 遣使入唐 獻果下馬一匹牛黃人蔘美髢朝霞紬魚牙紬鏤鷹鈴海豹皮金銀等. 上表曰 臣鄕居海曲 地處遐陬 元無泉客之珍 本乏賨人之貨 敢將方産之物 塵瀆天官 駑蹇之才 滓穢龍廐 竊方燕豕 敢類楚雞 深覺靦顔 彌增戰汗. 地震
정완비운 효성육년 천보원년귀당 미지숙시. 하사월 견사입당 헌과하마일필우황인삼미체조하주어아주루응령해표피금은등 상표왈 신향거해곡 지처하추 원무천객지진 본핍종인지화 감장방산지물 진독천관 노건지재 재예용구 정방연시 감류초계 심각전안 미증전한 지진.
정완의 비석에는 ‘효성왕(孝成王) 6년 즉 천보(天寶) 원년(서기 742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누가 돌아간 건지 알 수 없다.
여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ㆍ은 등을 바쳤다.
글을 올려 말하길 “우리나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지방 토산물로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과 비슷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워서 떨리고 진땀이 흐를 뿐입니다.”
지진이 났다.
二十三年 春 立王子承慶爲太子 大赦 熊川州進瑞芝. 二月 遣金武勳入唐賀正 武勳還 玄宗降書曰 卿 每承正朔 朝貢闕庭 言念所懷 深可嘉尙 又得所進雜物等 並踰越滄波 跋涉草莽 物旣精麗 深表卿心 今賜卿錦袍金帶及綵素共二千匹 以答誠獻 至宜領也. 冬十二月 遣使入唐獻方物 炤德王妃卒.
이십삼년 춘 입왕자승경위태자 대사 웅천주진서지. 이월 견김부훈입당하정 무훈환 현종강사왈 경 매승정삭 조공궐정 언념소뢰 심하희상 우득소진잡물등 병유월창파 발섭초망 물기정여 심표경심 금사경백포금대채소공이천필 이담성헌 지의영야. 동십이월 견사입당헌방물 소덕왕비졸.
23년(서기 724) 봄에 왕자 승경(承慶)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에서 영지를 바쳤다.
2월, 김무훈(金武勳)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무훈이 돌아올 때 당 현종이 글을 보냈다. “경(卿)은 정삭(正朔)을 받들 때마다 궁궐에 조공하고, 가슴에 품은 뜻을 말함이 매우 가상하다. 또한 그대가 바친 여러 물건들을 받고 보니 모두가 푸른 바다를 건너고 거친 들판을 넘어 왔건만, 한결같이 정결하고 고와서 그대의 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대에게 비단 두루마기와 금 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을 합하여 2천 필을 주어 정성스러운 예물에 답례하노니, 물건이 도착하거든 잘 받도록 하라.”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白虹見. 三月 雪. 夏四月 雹 中侍宣宗退 伊飡允忠爲中侍. 冬十月 地震
이십사년 춘정월 백홍견. 삼월 설. 하사월 박 중신선종퇴 이찬윤충위중시. 동시월 지진.
24년(서기 725) 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떨어졌다. 중시 선종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二十五年 夏四月 遣金忠臣入唐賀正. 五月 遣王弟金釿質入唐朝貢 授郞將還之
이십오년 하사월 견김중신입당하정. 정월 견왕제심근질입당조공 수랑장환지.
25년(서기 726) 여름 4월, 김충신(金忠臣)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5월, 임금의 아우인 김근질(金釿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그에게 낭장(郞將)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二十六年 春正月 赦罪人 遣使入唐賀正 夏四月 以一吉飡魏元爲大阿飡 級飡大讓爲沙飡 冬十二月 修永昌宮 上大等裴賦請老 不許 賜几杖.
이십육년 춘정월 사죄인 견사입당하정. 하사월 이일길찬위대아찬 급찬대양위사찬. 동십이월 수영창궁 상대등배부청노 불허 사궤장.
26년(서기 727) 봄 정월,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여름 4월, 일길찬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하였다.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二十七年 秋七月 遣王弟金嗣宗 入唐獻方物 兼表請子弟入國學 詔許之 授嗣宗果毅 仍留宿衛 上大等裴賦請老 從之 以伊飡思恭爲上大等.
이십칠년 추칠월 견왕제김사종 입당헌방물 겸표청자제입국학 조허지 수사종과의 잉유숙위 상대등배부청노 종지 이이찬사공위상대등.
27년(서기 728) 가을 7월, 임금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아울러 글을 올려 자제들의 국학(國學) 입학을 청하니, 황제가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였으며,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고 남아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二十八年 春正月 遣使入唐賀正.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이십팔년 춘정월 견사입당하정. 추구월 견사입당조공.
28년(서기 729)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王族志滿朝唐 獻小馬五匹狗一頭金二千兩頭髮八十兩海豹皮十張 玄宗授志滿太僕卿 賜絹一百匹紫袍錦細帶 仍留宿衛 冬十月 遣使朝唐貢獻方物 玄宗賜物有差
이십구년 춘이월 견왕족지만조당 헌소마오필구일두금이천량두빌팔십량해표피십장 현종수지만태복경 사견일백필자포백세대 잉유숙위. 공시월 견사조당공헌방물 현종사물유차.
29년(서기 730) 봄 2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고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천 냥, 머리카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당 현종이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백 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당 현종이 사신들에게 선물을 직위에 따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三十年 春二月 遣金志良入唐賀正 玄宗授太僕少卿員外置 賜帛六十匹放還 降詔書曰 所進牛黃及金銀等物 省表具之 卿二明慶祚 三韓善隣 時稱仁義之鄕 世著勳賢之業.
30년(서기 731) 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니, 당 현종이 그에게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과 무늬없는 비단 60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또 조서를 내렸다. “우황과 금은 등의 물건을 보낸 것은 그대의 글을 보고 잘 알아보았다. 그대의 나라 해와 달이 경사스럽고 복되며, 삼한이 사이좋게 잘 지내니 오늘날 어질고 의로운 나라로 불리고, 대대로 훌륭하고 어진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文章禮樂 闡君子之風 納款輸忠 效勤王之節 固藩維之鎭衛 諒忠義之儀表 豈殊方悍俗 可同年而語耶 加以慕義克勤 述職愈謹 梯山航海 無倦於阻脩 獻幣貢琛 有常於歲序 守我王度 垂諸國章.
문장예악 천군자지풍 납관수충 효근왕지절 고 번유지진위 량충의지의표 기수방한속 가동년이어야 가이모의극근 술직유근 제산항해 무권어조수 헌폐공심 유상어세서 수아왕도 수제국장.
문장과 예악은 군자의 기풍을 드러내었고, 성의껏 받들고 충성을 지키며 왕의 도리를 다하니, 진실로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요 충성과 의로움의 모범이니, 어찌 이역(異域) 오랑캐들의 문화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대는 의(義)를 사모함에 매우 근실하고 조정에 조회함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산 넘고 물 건넘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폐백과 보물을 바침에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니, 우리 왕법을 지켜서 나라의 기록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乃眷懇誠 深可嘉尙 朕每晨興佇念 宵衣待賢 想見其人 以光啓沃 俟卿覯止 允副所懷 今使至 知嬰疾苦 不遂抵命 言念遐闊 用增憂勞 時候暄和 想痊復也 今賜卿綾綵五百匹 帛二千五百匹 宜卽領取.
내권간성 심하가상 짐매신흥저념 소의대현 상견기인 이광계옥 사경구지 윤복소회 금사지 지영질고 불수저명 언념하활 용증우노 시후훤화 상전복야 금사경릉체오백필 백이천오백필 의즉영취.
그 간곡한 정성을 돌아보니 깊이 가상한 일이다. 짐은 새벽마다 일어나 그대를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은 채 어진 이를 기다렸다. 그대를 만나면 마음속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하였고, 그대를 기다려 마음 속 품은 뜻을 나누고자 하였는데, 지금 사신이 와서 그대가 병 때문에 오라는 명을 받들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걱정이 더할 따름이다. 날씨가 점차 따스해지면 병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무늬있는 채색비단 5백 필과 무늬없는 비단 2천5백 필을 드리니 잘 받기를 바란다.”
夏四月 赦 賜老人酒食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觀射車弩.
하사월 사 사노인주식 일본국병선삼백소 월해습아동변 왕명장출병 대파지. 추구월 명백관회적문 관사거노.
여름 4월, 죄수들을 사면하고, 고령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임금이 장수를 시켜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가을 9월, 백관을 적문(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 쏘는 것을 함께 관람하였다.
三十一年 冬十二月 以角干思恭伊飡貞宗允忠思仁 各爲將軍
삼십일년 동십이월 이각간사공이찬정종윤충사인 각위장군.
31년(서기 732) 겨울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ㆍ윤충ㆍ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삼십이년 추칠월 당현종이발해말갈 월해입구등주.
32년(서기 733) 가을 7월, 발해(渤海)와 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노략질하였다.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 會 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金思蘭本王族 先因入朝 恭而有禮 因留宿衛 及是 委以出疆之任.
견태복원외경김사란귀국 잉가수왕위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 발병격말갈남비. 회 대설장여 산로조애 사졸사자과반. 무공이환 김사란본왕족 선인입조 공이유례 인류숙위 급시 위이출강지임.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임금에게 관작을 더해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로 삼고 병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도록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병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므로 머물러 숙위(宿衛)로 일하다 이때에 이르러 외지로 나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冬十二月 遣王姪志廉 朝唐謝恩. 初 帝賜王白鸚鵡雄雌各一隻及紫羅繡袍金銀鈿器物瑞紋錦五色羅綵共三百餘段. 王上表謝曰
동십이월 견왕질지겸 조당사은. 초 제사왕백앵무웅자각일쌍급자라수포금은세기물서문백오색라채골삼백여단. 왕상표사왈
겨울 12월, 임금의 조카 지렴(志廉)을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이에 앞서 황제가 임금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와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으로 물들인 비단 등 도합 3백여 단(段)을 주었다. 임금이 글을 올려 감사하였다.
“伏惟 陛下 執象開元 聖文神武 應千齡之昌運 致萬物之嘉祥. 風雲所通 咸承至德 日月所照 共被深仁. 臣地隔蓬壺 天慈洽遠 鄕睽華夏 睿澤覃幽. 伏視瓊文 跪披玉匣 含九霄之雨露 帶五彩之鵷鸞.
”복유 폐하 집상개원성문신무 응천령지창운 치만뭉지가상. 풍운소통 함승지덕 일월소조 공피심인. 신지격봉호 천자흡원 향규화하 예택담유. 복시경문 궤피옥갑 함구소지우로 대오채지원람.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 법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림에 문(文)은 성스럽고 무(武)는 신이하니, 운수가 천년 동안 왕성하고 만물의 상서로움을 이룩할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가는 곳마다 모두 폐하의 지극한 덕(德)을 받게 되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마다 폐하의 깊은 은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봉래(蓬萊, 봉래산)와 방호(方壺, 방장산)로 막혔으나 황제의 자애로움은 먼 데까지 닿았으며, 궁벽한 지방에서 대국을 바라보니 황제의 은택은 어두운 곳까지 뻗쳤습니다. 엎드려 조서를 읽고서 꿇어앉아 옥장식 함을 열어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오색의 봉황과 난새가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辯惠靈禽 素蒼兩妙 或稱長安之樂 或傳聖主之恩. 羅錦彩章 金銀寶鈿 見之者爛目 聞之者驚心. 原其獻款之功 實由先祖 錫此非常之寵 延及末孫 微効似塵 重恩如嶽 循涯揣分 何以上酬” 詔饗志廉內殿 賜以束帛.
변혜영금 소창양묘 혹칭장안지악 혹전성주지은. 라백채장 금은보전 견지자란목 문지자경심. 원기헌관지공 싱유선조 석차비상지총 연급말손 미효사진 중은여악 순애췌분 하이상수 조향지렴내전 사이속백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인 앵무새는 흰 것과 푸른 것 둘이 신묘하게 어울려 혹은 장안(長安)의 노래를 부르고 혹은 황제의 은혜를 말하는 듯합니다. 비단의 다채로운 문양과 보물의 금은 장식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지자면 사실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이토록 커다란 은총을 내리어 말대의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니,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태산같이 무겁습니다. 저의 분수를 헤아려보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조칙으로 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도록 하고 그에게 비단을 내려주었다.
三十三年 春正月 敎百官 親入北門奏對.
삼십삼년 춘정월 교백관 친입북문주대.
33년(서기 734) 봄 정월,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止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입당숙위좌영군위원외장군김충신상표왈 신소봉진지 영신집절 본국발병마 토제말갈 유사속주자. 신자봉성지 서장치명 당차지시 위체인김효방신망 경류신숙위.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분부는 폐하의 신임표(節)를 가지고 본국에 가서 병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물리쳐 없애고, 일이 있으면 계속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을 받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리라 맹세하였으나, 마침 저를 대신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숙위로 계속 머물게 되었습니다.
臣本國王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上 無忘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不祗.
신복국왕이신구시천정 견사종질지렴대신 금이도흘 신즉합환 매사전소봉진상 무망숙야 폐하선유제 가본국왕흥광녕해군대사 석지정절 이토흉잔 황위재림 수원유근 군즉유명 신감불지.
본국의 왕은 제가 오랫동안 황제를 모셨다하여 종질(從姪)인 지렴을 보내어 저와 교대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당도하였으니 저는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명을 늘 생각하여 밤낮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명을 내려 본국 왕 흥광(興光)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신임표를 주어 흉악한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임하면 비록 먼 곳이라도 가까운 듯하여, 군주가 명을 내리면 신하는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蠢爾夷俘 計已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義貴乎三捷 縱敵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再宣殊裔 豈惟斯怒益振.
준이이부 계이회화 연제악무본 유헌유신 고출사의귀호삼첩 종적환이어수대 복망 폐하인신환국 이부사가신 진장천지재선수예 기유사노익진.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으리라 생각되나, 악을 제거하려면 근본을 다스려야 하고 법령을 펴는 데는 새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내는 데는 정의가 세 번의 승리보다도 귀중한 것이고, 적을 풀어놓으면 후환이 여러 대에 끼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에 저에게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주시어 황제의 뜻을 먼 지역까지 거듭 선포하게 해주시면 합니다.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桴滄海 獻捷丹闈 効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陛下圖之 帝許焉.
고역무부작기 필경기소혈 정지황우 수이신지소성 위국가지대리 신등복승부해창 헌첩단위 효모발지공 답우로지시 신지망야. 복유폐하도지” 제허언.
그러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을 떨칠 뿐이겠습니까? 병사들도 또한 기운을 내어 반드시 오랑캐의 소굴을 뒤엎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것이며, 마침내 작은 나라 신하인 저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커다란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다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승전보를 대궐에 바칠 것입니다. 터럭같이 작은 공적이나마 세워서 비와 이슬과 같은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감히 폐하께서 제 뜻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夏四月 遣大臣金端竭丹 入唐賀正 帝宴見於內殿 授衛尉少卿 賜緋襴袍平漫銀帶及絹六十匹. 先時遣王姪志廉謝恩 獻小馬兩匹狗三頭金五百兩銀二十兩布六十匹牛黃二十兩人蔘二百斤頭髮一百兩海豹皮一十六張 及是授志廉鴻臚少卿員外置.
하사월 견대신김단갈단 입당하정 제연견어내전 수위위소경 사비란포평만은대급견육십필 선시견왕질지렴사은 헌소마양필구삼두금오백냥은이십량포육십필우황이십량인삼이백근두발일배걍해표피일십육장 급시수지렴홍려소경원외치.
여름 4월,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니,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견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을 제수하고, 비란포(緋襴袍: 비단으로 된 위아래 통옷)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십 필을 주었다. 이는 앞서 임금의 조카 지렴이 황제의 은혜에 감사로 작은 말 두 필, 개 세 마리, 금 5백 냥, 은 2십 냥, 베 6십 필, 우황 2십 냥, 인삼 2백 근, 머리카락 1백 냥,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에 지렴에게도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주었다.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勑賜浿江以南地
삼십사년 춘정월 형혹범월 견김의충입당하정. 이월 부사김영재당신사 증광록소경 의충회 래사패강이남지.
34년(서기 735) 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2월,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자,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는 조칙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三十五年 夏六月 遣使入唐賀正 仍附表陳謝曰 “伏奉恩勑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勑 以忠貞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 粉骨糜身 無由上答.”
삼십오년 하유월 견사입당하정 잉부표진사왈 “복봉은래 사패강이남지경 신생거해예 목화성조. 수단소위심 이공무가래 이충정위사 이노부족상 폐하강우로지은 발일월지조 석신토경 광신읍거. 수사간벽유기 농상득소. 신봉사륜지지 하영총지심 분골미신 무유상답.”
35년(서기 736) 여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 “삼가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받았습니다. 신이 해양인의 후예로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황제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충성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나 나타낼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충성과 정절로 일을 삼았으나 노력은 상을 받기에 부족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비와 이슬 같은 은덕을 베풀고, 해와 달처럼 비추어 저에게 땅을 주시어 고을이 넓어졌습니다. 드디어 땅을 개간할 기대를 갖게 되었고, 농사짓고 누에칠 장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세밀한 뜻을 받들어 영화로운 은덕을 깊이 입었으니,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冬十一月 遣從弟大阿飡金相朝唐 死于路. 帝深悼之 贈衛尉卿. 遣伊飡允忠思仁英述 檢察平壤牛頭二州地勢.
동십일월 견종제대아찬김상조당 사우로 제심도지 증위위경 견이찬윤충사인영술 검찰평양우두이주지세.
겨울 11월, 임금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狗登在城鼓樓 吠三日.
구증재성고루 폐삼일.
개가 재성(在城) 누각에 올라가 사흘간 짖었다.
三十六年 春二月 遣沙飡金抱質入唐賀正 且獻方物 王薨 諡曰聖德 葬移車寺南.
삼십육년 춘이월 견사찬김구질입당하정 차헌방물 왕훙 시왈성덕 장이거사남.
36년(서기 737) 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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