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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남화경

장자 병무


騈 拇 


1. 
騈拇枝指,出乎性哉! 而侈於德. 附贅縣疣,出乎形哉! 而侈於性. 多方乎仁義而用之者,列於五藏哉! 而非道德之正也. 是故騈於足者,連無用之肉也.,枝於手者,樹無用之指也.,騈枝於五藏之情者,淫僻於仁義之行,而多方於聰明之用也. 

발가락이 붙거나 육손가락이 됨은 인위로 된 것 아니니 덕에서 넘치는 것이라. 사마귀나 혹은 이미 그리 타고났지만 본래 모습으로 보면 정도를 넘어선 것. 이리저리 인의를 끌어다 쓰려는 자는 그것도 오장이 제자리를 지키니 상관없는 것이라 하지만 그는 도덕의 본연을 벗어난 올바름을 끌어대는 것이다. 발가락이 붙었다는 건 쓸모없이 살이 붙은 것이요, 손가락이 하나 더있는 것도 쓸데없이 하나 더해진 것이다. 그런 것을 오장의 뜻이라 말한다면 인의를 따르는 것 아니라 그저 총명함을 여기저기 붙여쓰는 것 뿐... 

-우리는 혹가다 이런 경우를 본다 오금손이 된 자나 6손인 사람 옛날엔 이를 불길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게 특이한 축복(?)이라고도 하지만 어찌 됐건 범상한 것은 아니다(異常). 그걸 뭐 이상한 것 아니요 다름을 다름 아니고 그저 그런거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궤변을 쫓는 자이다. 

是故騈於明者,亂五色,淫文章,靑黃黼黻之煌煌非乎? 而離朱是已. 多於聰者,亂五聲,淫六律,金石絲竹黃鐘大呂之聲非乎? 而師曠是已. 枝於仁者,擢德塞性以收名聲,使天下簧鼓以奉不及之法非乎? 而曾史是已. 騈於辯者,累瓦結繩竄句,遊心於堅白同異之閒,而敝跬譽無用之言非乎? 而楊墨是已. 故此皆多騈旁枝之道,非天下至至正也. 

그러니 밝음이 뒤얽힌 사람은 오색에 치이고 무늬에 혹하여 곤룡포 수의 화려함도 화려하지 않다 하지않나? 이런 이가 이주같은 이라. 

들은게 많은 이는 세상소리에 얽히고 6음계에 매여 쇠 돌 줄 대나무의 소리가 음계에 안맞는다 하지않나? (황종,대여:12음계 이름) 이런 이가 사광같은 이일세. 인을 그저 재주로만 사는 이는 하늘 덕을 버리고 본성을 막아 그저 명성얻기만 꾀하니 천하로 그저 떠들게만 하여 법을 따름을 못하게하니 틀린 것 아니냐? 이런 이가 증사같은 이라. 쓸데없이 말재간에 꼬인 이는 지붕잇는 끊묶듯 말귀를 만들어 견백동이의 궤변에만 마음 쓰는 법, 

이는 제대로 아닌 반푼짜리 명예로 쓸모없음이니 틀린 것 아니냐? 양묵과 같은 이가 이런 이라... 그러니 이 모든 것은 군더더기요 곁가지인 도리이니 천하가 이로는 지극한 바름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다. 

-너무 지나치게 한가지를 따르다 보면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한비자에 나오는 이주: 100보앞은 보면서 가까운걸 분변 못하는 사람), 음을 따지는 이는 까다로워 절대 음감을 추구하는 법. 그러나 그저 인자함을 흉내내며 다른 걸 다르다 않는 사람이 하는 짓이란 제 명성, 평판만 구하니 이런 사람은 사람들로 잡소리만 많게하여 법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말재간에 매인 이는 견백동이의 궤변만 늘어놓으며 그게 지혜라 말한다(불가지론 자) 

너무 까탈스러워도 문제지만 너무 남의 평판에 매여 자기 주관이 없는 자도 문제라... 말장난으로 진실을 호도한다고 그게 진실을 사는 것인가? 굽은 건 굽었다 하는 것 그것이 본성을 사는 것... 


彼至正者,不失其性命之情. 故合者不爲騈,而枝者不爲岐.,長者不爲有餘,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續之則憂.,鶴脛雖長,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性短非所續,無所去憂也. 意仁義其非人情乎! 彼仁人何其多憂也? 

지극한 바름이란 저 타고난 뜻을 잃지 않는 법. 그러므로 붙었다고 4발가락처럼 (두루뭉수리)하지 않으며 육손가락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법. 큰 사람이라고 여유부리거나 작은 사람이라고 부족하지 않은 법. 그러므로 오리가 다리 짧다고 길게 이을 것인가? 쓸데없는 걱정이요 학이 다리가 길다하여 잘라내면 비통할 일 그러니 본성이 크다고 잘라낼일 아니요, 본성이 작다고 이을 것 아니다. 그러면서 걱정을 덜 수 있는 것 아니다. 인의를 품는다는 건 사람의 뜻대로 안되는 것! 진짜 어진 이가 어찌 그런 걱정을 할까? 

- 올바름이란 본성대로 사는 것... 저는 저의 본성으로 나는 나의 본성으로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 "난 이래"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저와 나의 다름을 알고 잘 맞춰나가는 것 그것이 본성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도를 사는 모습을 규정하고 그로 사람을 재고 모자라다 덧붙이고 넘친다 자르려한다. 도를 사는 모습은 뭘 해서 알아서 아니라 제 본성대로 본성끼리 만나 사는 걸 의미한다. 

且夫騈於拇者,決之則泣.,枝於手者,齕之則啼. 二者或有餘於數,或不足於數,其於憂一也. 今世之仁人,蒿目而憂世之患.,不仁之人,決性命之情而饕貴富. 故曰仁義其非人情乎! 自三代以下者,天下何其囂囂也? 

또 4발가락인 걸 갈라주면 울고, 6손이가 떼어내면 통곡한다. 둘은 아마 숫자가 많아서거나 적어서 그러니 그네들 걱정이란게 결국 한가지 아닌가? 오늘날 어진 사람이란 세상 환란을 걱정하고 어질지 않은 이는 본디의 뜻을 잘라내고 부귀에 대해 논하는 법. 그러니 이르길 인의란 본디 사람 뜻 아니라하는 것! 하은주 삼대 이후 천하가 얼마나 시끄러워 졌는가? 

-그렇다고 소위 상식이란 걸로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인정치 않고 인위로 선비는 어쩌네 목사는 어쩌네 할 일 아니다.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저 현세에 눈이 매여 부귀나 논하며 천박해지기 쉬운 법... 

목사의 처신이네 선비의 처신이네 도통한 자의 처신이네 하면서 어떤 틀을 만들고 선입견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도를 벗어난 짓거리... 

머리기르고 수염기른들 도를 통한 증거인가? 염불하고 술수부리면 도통한 것인가? 

그럼 머리 긴 처녀들은 다 도통한 것일 터, 구름타고다니는 손오공이 진리를 사는가? 말이 화려한 이는 사기꾼이기 쉽고, 깔끔한 옷차림은 제비이기 쉽지않나? 

장자를 읽다보면 도대체 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노자처럼 이상적인 삶을 살자는 것인가? 아닌 현실에 맞춰 살자는 겐가 이도저도 아닌데 뭔 소리인가 싶다. 아니면 유불처럼 오욕칠정을 끊거나 잘 수련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 이야기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어떤 노부인이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그 친구의 며느리가 사과를 내오라니 빨간 사과를 물에 씻어 물 떨어지는 채로 소반에 들고 나오는 것... 

친구 부인은 놀라서 며느리에게 들어가 잘 깎아 오너라 합니다. 그러나 이 노부인은 그저 탐스럽게 생겼네 덥썩 베어무는 겁니다. 

예를 아는 친구, 예를 아직 모르는 며느리, 예조차 초월하고 자연 그대로를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장자의 가르침은 뭘 없애고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관점을 달리하자는 겁니다. 한단계 다른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거죠... 

신선 사상이란게 그런거죠... 

세속을 떠났으나 세속의 모습을 그대로 사는 것... 

세속의 도리를 벗어나 저 지어진 본성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그렇듯... 화도내고 울기도 하면서.. 우리는 진리를 깨우치면 모든 걸 달관하리라 봅니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 처신을 잘하는 것 자체가 본연이 아니지요. 

게임을 승부로 하지않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겁니다. 한국이 브라질 축구 절대 못이기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들은 축구를 게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기 때문이지요. 

인정이 인의예지니 뭐니로 말라버린 것 아니라 본디 주어진 인정을 사는 것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떠난 삶입니다. 

참 알쏭달쏭하지요...



2. 
且夫待鉤繩規矩而正者,是削其性者也.,待繩約膠漆而固者,是侵其德者也.,屈折禮樂,呴兪仁義,以慰天下之心者,此失其常然也. 天下有常然. 常然者,曲者不以鉤,直者不以繩,圓者不以規,方者不以矩,附離不以膠漆,約束不以纆索. 故天下誘然皆生而不知其所以生,同焉皆得而不知其所以得. 故古今不二,不可虧也. 則仁義又奚連連如膠漆纆索而遊乎道德之間爲哉,使天下惑也! 

먹줄을 대고 자를 대 바로잡으려는 것은 그 본성을 깎아내는 것이라, 법을 찾고 친밀함을 핑계로 관계를 단단히 하는 자는 그 본디 덕을 침해하는 자요, 예악을 존숭하고 인의를 나불거림으로 천하를 농단하려는 자는 그 본디의 그러함을 잃게하는 자라. 천하는 그 본디의 그런 모습이 있고 그 본연의 그러함은 굽되 옭아매지 않고 바르되 줄을 대지 않고 원만하다고 규범을 들이대지 않고 똑바르다고 법을 강요치않고 떨어진 것을 붙이되 친밀하게하지 않는다 묶긴 묶되 꽉 가로막히지는 않는 법. 그러니 천하 모든 것이 그리 나고 그게 난 자리라, 마치 모든 것을 얻음은 그것이 어디서 나는지 몰라서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서 부족하거나 모자르지 않다. 즉, 인의가 서로 닿아있어 마치 한가지로 꼭 붙은 듯 보이나 도덕의 세계를 노니도록 하니 이로 천하로 궁금증에 빠트려 갸우뚱하게 한다. 

-우리는 나름의 그 천박한 잣대로 남을 판단한다. 그리 만든 건 소위 인의라는 가르침이니 그 가르침에 매여 본성의 덕을 잊은자는 하는 짓이 옭아매려하고 저들끼리 파당을 지으려하는 법 그러나 자연의 본성에 따라도 인의라는 규준은 그대로라 다만 차이는 거기에 매이느냐 자유롭게 사느냐의 차이라 

남의 머리 된 자는(지도자) 이를 알아야하는바, 天下有常然. 常然者,曲者不以鉤,直者不以繩,圓者不以規,方者不以矩,附離不以膠漆,約束不以纆索이란 구절이다. 천하 하나님 지으신 바대로 산다는 건 사람들의 법을 무시하는 것 아니라 다만 사람들 처럼 슬퍼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살되 옭아매거나 잣대를 들이대거나 너무 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옭아매고 판단하는 것 더더구나 사람들의 세운 판단으로 할 것 아니라 하늘의 눈으로 해야 한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끊어냄이 수도자의 자세일까? 출가자의 자세일까? 그건 인간 본연을 제 맘대로 규정하고 괴롭히는 짓... 

다만 그 오욕칠정에 너무 매이지 말아야 한다. 불쌍한 이를 보며 마음에 안타까움을 느낄 줄 알고 굽은 걸 굽었다 할 줄 알고... 사람을 미워하기 보다 허탄한 것에 매인 심령의 가난함을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한다. 

夫小惑易方,大惑易性. 何以知其然邪? 有虞氏招仁義以撓天下也,天下莫不奔命於仁義,是非以仁義易其性與? 故嘗試論之,自三代以下者,天下莫不以物易其性矣. 小人則以身殉利,士則以身殉名,大夫則以身殉家,聖人則以身殉天下. 故此數子者,事業不同,名聲異號,其於傷性以身爲殉,一也. 臧與穀二人相與牧羊而俱亡其羊. 問臧奚事,則挾筴讀書.,問穀奚事,則博塞以遊. 二人者,事業不同,其於亡羊均也. 伯夷死名於首陽之下,盜跖死利於東陵之上,二人者,所死不同,其於殘生傷性均也. 奚必伯夷之是而盜跖之非乎! 天下盡殉也,彼其所殉仁義也,則俗謂之君子.,其所殉貨財也,則俗謂之小人. 其殉一也,則有君子焉,有小人焉.,若其殘生損性,則盜跖亦伯夷已,又惡取君子小人於其間哉! 

장자의 궤변 같은 이 말에서 생기는 이런 작은 궁금증은 바름이란걸 다시 생각하게 하고 큰 궁금증은 본성을 바뀌게하니 어찌 이런 당연함을 틀리다 하리? 유우씨가 인의를 세워 천하의 바탕인 하늘 덕이 흔들렸고 천하가 그 인의를 쫒아 다니느라 바빴다 인의가 그네들의 본성을 바꾼 것인가 아닌가? 옛 시론을 보면 하은주 삼대이후 천하의 사물들이 그 본성을 바꾼것 같다. 소인배는 이익에 목숨을 걸고 선비는 명예에 목숨을 걸고, 고관은 집안 일으키기에 목숨을 걸고 성인은 천하를 얻는데 목숨을 건다. 고로 이런 사람들은 사명과 그 일함이 일치하지 않고 본디 이름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니 그 본성을 해침으로 몸을 죽게만드는 짓 한가지라. 장과 여라는 두 사람이 양을 키우는데 둘다 양을 잃었다 장에게 어쩐 일이냐 물으니 책을 읽다보니 그리됐다 하고 곡에게 물으니 나다니느라 가둬두었다 그랬다 한다. 둘은 한 짓은 다르나 양을 잃은 것은 같다. 백이는 명예를 위해 수양산에서 죽었고, 도척은 이익을 구하다 동릉에서 죽었다 둘은 죽기는 했지만 그 죽음이 다르니 남은 생의 차이가 그 본성을 죽인다는 것에서는 같다. 어찌 백이는 옳고 도척은 그르다하리! 천하를 위해 죽어가니 인의나 따지다 그리된다 즉, 세상사람들이 군자라는 사람들이 그리한다. 재화를 위해 그리 목숨거는 이를 소위 소인배라 이른다. 그러나 죽음은 한가지니 군자에게나 소인배에게나 그렇다.남은 삶이 본성을 해한다는데서도 백이나 도척이나 한가지라 거기서 군자니 소인이니 가림이 뭔 소용이랴... 

-이 의미를 알게되면 작게는 바르고 그르다는 우리들의 잣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깊이 깨우치다보면 그 사람의 본성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데 선한 행동은 남들에게 선함이란 걸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선한 마음이 깃든 사람은 선함을 살아내게 된다. 

사람들이란 이런 삶을 살기보단 외연에 매여 명예요 재물에 그리고 천하에 매여 얻기 힘쓴다. 그러나 이리하고 저리한들 결과가 늘 그모양 같으면 그는 아직 속진에 매인자라... 백이는 명예롭고 도척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뭔 소용인가? 그 둘도 결국 남들이 말하는 세상의 인의라는 기준선에서 못 벗어난 것 아닌가? 
즉, 인의를 살되 남들이 아는 인의 아니고 하나님(천하의 常然)의 인의를 아는 것이 가르침이요 살아야 할 모습이다. 

아담을 내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분노하시기에 하나님 아니라 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인간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대로 분노하는 것이지 분노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스리는 것 아니다. 어디다 어떤 분노를 발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분노를 알면 쉬울까? 

且夫屬其性乎仁義者,雖通如曾史,非吾所謂臧也.,屬其性於五味,雖通如兪也,非吾所謂臧也.,屬其性乎五聲,雖通如師曠,非吾所謂聰也.,屬其性乎五色,雖通如離朱,非吾所謂明也. 吾所謂臧者,非仁義之謂也,臧於其德而已矣.,吾所謂臧者,非所謂仁義之謂也,任其性命之情而已矣.,吾所謂聰者,非謂其聞彼也,自聞而已矣.,吾所謂明者,非謂其見彼也,自見而已矣. 夫不自見而見彼,不自得而得彼者,是得人之得而不自得其得者也,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也. 夫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雖盜척與伯夷,是同爲淫僻也. 余愧乎道德,是以上不敢爲仁義之操,而下不敢爲淫僻之行也. 

또 부러 그 본성에 인의를 맞춘들 누가 증삼과 사추처럼 통하리 나는 아니니 감추인 것이라 할 만하다. 그 본성에 속한 이의 5미를 누가 유만큼 통할까 내가 아니니 감추인 것이랄 밖에... 그 본성에 속한 5성이 뭘까 누가 사광만치나 알까?나는 아니란 걸 아니 총명한 것. 그 본성에 속한 5색을 안다는 건 누가 이주만큼 알까? 나는 아니란 걸 아니 밝음이라. 난 아직 감추인 자라 인의니 뭐니 일컬을 말이 없다 감취었다란 말이 덕에 아직 머물러 있다는 말이요. 그 성명의 본디 뜻에 맡기어져 있다는 말이라 스스로 총명하다 함은 누가 남이 그리하는 것 아니요 나 스스로 그리 아는 것. 내가 밝은 사람이란 것도 남들이 그리 봄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 봄이니 스스로 자처하지 않음으로 남이 알게 되면 내 스스로 구하지 않음으로 남들을 얻게 되는 법, 이것을 부러하지 않으며 사람을 얻는다 하는 것자신을 갈고닦지 않으며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라. 적당한 사람을 그 자리에 놓아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정하지 않으면 정하는 것 도척과 백이가 기를 쓰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데서 서로 같다고 할 것이다. 늘 모자람을 후회함이 도덕이니, 위로는 감히 인의로 조종하지 않으려하고 아래로는 부러 피하려도 않는 것... 

-그러니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인의가 아닌 본성에 따른 인의를 살기 원한다면 그저 삶이란 큰 틀을 살아가면 된다. 그저 큰 틀의 삶을 산다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매이지 말고 또 다른 틀의 삶을 살면 된다... 그래서 지극히 통한자는 외려 길가의 촌부와 같다는 것... "진짜 큰 지혜는 오히려 아둔한 자와 같다". 지혜를 깨우쳤네 머리기르고 수염길러 도골선풍을 꾸미는 자는 아직도 그저 흉내나 내는 앵무새 정도... 다만 어떤 때가 되면 그 차이가 드러날 뿐... 뭘 깨우친다고 머리에 뿔이 나는 것도 아니요 귀신을 통한다고 모든 걸 다 아는 것 아니다. 다만 사람으로 났으면 사람들처럼 잘 얘기하고 순간순간의 오해를 풀어가며 살면 될 일... 잘 나누고... 

사람아닌 사람이 되자는 것이 진리를 사는 것 아니라 진짜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노력(하늘님이 부어주신 形)이 지혜를 구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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