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은 한마디로 제왕론(덕치라 불리는)으로 오늘날 리더십과 비길 만한 장이지요... 잘 읽다보면 남의 머리되고 싶은 잘난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리라 믿습니다...
應 帝 王
1.
齧缺問於王倪,四問而四不知.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네가지를 물었는데 넷 다 모른다고 했다.
齧缺因躍而大喜,行以告蒲衣子.
설결이 이로 인해 크게 깨치고 기뻐서 포의자에게 가 전했다.
蒲衣子曰:「而乃今知之乎? 有虞氏不及泰氏. 有虞氏,其猶藏仁以要人.,亦得人矣,而未始出於非人. 泰氏其臥徐徐,其覺于于.,一以己爲馬,一以己爲牛.,其知情信,其德甚眞,而未始入於非人.
포의자 말하길: [이제 알았느냐? 유우(순임금)은 태황(3황 중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유우씨는 어짊을 지녔기에 사람들 사이에 사는 것. 사람을 얻었기에 사람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태황은 잠자리에 누우면 한가롭고 깨서는 좀 모자란 듯했다. 한 번은 자기를 말이라고 하고 한 번은 소라고 한 바. 그는 情(뜻:본질)과 신뢰를 알고 그 덕이 깊어 진리에 이르러, 사람의 경지를 넘어섰다.
왕예는 요임금때 현인으로 설결의 스승이요 포의자는 순임금의 스승이다. 여기서 중국인들의 사상을 알게 되는 것이 3황시대가 가장 태평성대요 5제로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도리가 혼탁해 진다보는... 이는 마치 성서에서 인간의 타락이전이 에덴이요 진리가 살아 숨쉬고 만물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다고 믿듯이 말이다...
왕예의 4질문은 제물론에도 나온 바... 설결이 1, "선생님께서는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하자 왕예는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2,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모르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자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이에 설결이 , 3, "그렇다면 물物이란 알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왕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지만 시험삼아 말해 보겠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진정 모르는 것이 아닌 줄 어떻게 알며,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모르는 것이 아닌 줄 어떻게 알겠는가?
이제 내가 시험삼아 자네에게 물어 보겠다. 사람이 습지에 거주하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이 나무에 거처하면 두려워서 벌벌 떠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셋 가운데 누가 바른 거처를 알겠는가?
사람은 가축을 먹고, 순록과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가마귀는 쥐를 좋아하는데, 이 넷 가운데 누가 바른 맛을 알겠는가? 원숭이는 편저로 암놈을 삼고 순록은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과 여희(유명한 미인)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이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숨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그들을 보면 결사적으로 도망치니, 이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바른 미색을 알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데 인의의 단서와 시비의 갈림길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어지러우니, 내가 어떻게 그 구별을 알 수 있겠는가?" 다시 설결이 4, "선생님께서 이해利害를 모르신다면(떠났다면) 지인至人은 진실로 이해를 모르는(떠난) 것입니까?"라고 하자,
왕예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인은 신이다. 큰 늪을 채운 갈대가 불타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으며, 벼락이 산을 부수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몰아 사해의 밖에서 노닐므로 죽음과 삶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해문제 같은 말단임에랴!" 을 말한다.
보통사람인 우리가 배우면 꺼꾸로 배워 올라가야 할진대
1, 먼저 이해를 떠나야 겠지요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는 남의 머리 될 자격 없지요... 그 다음은?
2, "나"를 버려야 겠지요 나가 있어 모든 걸 파악한다는 어줍쟎은 생각... 다음은
3,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깨달아야지요.
4, 그 다음이 세상 만물이 하나요 나도 그 중 하나라는 沒我의 경지에 들어야 남의 머리되어도 부끄럽지 않지요....
한마디로 나를 넘어서야 남의 머리 되는 겁니다. 불교론 無我요 沒我, 解脫 得道 覺醒 見性으로 표하고 기독교에선 "나는 죽었고 주님만이"라는 표현이지요... 2. 肩吾見狂接輿,狂接輿曰:「日中始何以語女?」
견오가 광접여를 만나게 됐다 광접여가 묻길: [일중시가 너를 어찌 말하드냐?]
肩吾曰:「告我君人者以己出經式義度,人孰敢不聽而化諸!」
이르길: [내가 된사람이라 이미 경전과 형식과 의와 도리를 넘어섰다 하며 사람중 누가 감히 너를 듣지 않고도 교화되리라 합디다.]
狂接輿曰:「是欺德也. 其於治天下也,猶涉海鑿河,而使蚊負山也. 夫聖人之治也,治外乎! 正而後行,確乎能其事者而已矣. 且鳥高飛以避矰弋之害,鼷鼠深穴乎神丘之下,以避熏鑿之患,而曾二蟲之無如!」
광접여 말하길:[그럼 그건 사기이다. 그런 식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바다를 걷어내고 하천을 만들어내는 것 즉, 모기가 산을 지고가는 형국이라. 대저 성인의 다스림이란 다스리는 것을 이미 넘어선 것! 바르면 남들이 따르는 법이요 정확하면 그 모든 걸 이미 있는 것처럼 가지런히 할 수 있다. 또한 새가 높이 날면 화살을 맞아 죽는 꼴을 피하는 법이요, 새앙쥐 깊이 구멍 속에 있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듯하니 쥐불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은 진리를 아지 못하는 버러지 인데...
- 견오란 전설상의 인물로 접여와 동시대 사람은 아니다 접여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니...일중시는 견오의 스승이라 하니 더더구나 가상의 인물...
다만 여기서 상징하는 바는 사람으로 경전과 형식 그리고 정의와 도리를 넘어선 사람을 보통 사람이 알아챌 눈이 없다. 오직 서로 같은 경지로 넘어섰을 때만 가능할 뿐 그저 범인의 눈으론 이상한 넘 취급할 뿐이다.
혹여 남들의 달콤한 말에 자신이 경지를 넘어섰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고 나서면 바다를 걸어 건너고 물길을 새로 내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진리를 알고 올바르고 정확해 가지런히 만들어도 워낙 산만한 사람들이 가만 안두는데... 그리 나서라 하나?
더구나 그 소리 듣고 하다못해 진리를 모른다는 짐승도 화를 피할 도리를 아는 법이거늘 그를 알아채지 못하나?
*쥐나 구멍파고 사는 짐승을 잡을땐 한 쪽 구멍에 연기를 피워 다른 구멍으로 나오는 걸 잡는 법... 그러나 연기가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이 굴을 파고 있으면 소용없는 짓...
이 글이 주는 교훈은 일종의 이중적 파라독스로... 도를 깨우친 자는 속세와 멀리 떨어지거나 깊이 숨는 법... 그런 이를 부축여 넌 된 사람이다 내놓는 건 그를 죽이는 것... 남의 말에 귀기울인다는 자체가 아직 남의머리 되기 틀린 사람이란 것... 남의 말을 듣는 것 아니라 진리를 들을 줄 알아야 깨우친 이다.
다윗이 메시아로 불리는 것은 나단의 말을 듣고 무릎꿇을 줄 알기 때문이요... 아무리 간음과 살인의 죄를 지었어도 그 아래 솔로몬이 허락됨은 진리를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닫힌 사람은 고여 썩을 뿐이요 닫힌 태는 더이상의 생산을 못하는 무용지물이듯... 사래가 웃은 건 자기의 태가 닫힌 걸 아는 정도의 지혜였지 그 태 조차도 주관하시는 진리를 몰랐던 탓이지요. 3. 天根遊於殷陽,至蓼水之上,適遭無名人而問焉,曰:「請問爲天下.」
천근이 은양땅을 가다가 요수 상류에서 무명인을 만나 물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알고싶습니다]
無名人曰:「去! 汝鄙人也,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厭,則又乘夫莽眇之鳥,以出六極之外,而遊無何有之鄕,以處壙垠之野. 汝又何帠以治天下感予之心爲?」
무명인이 답하길:[가라 이 더러운 놈아 어째 그런 질문을 하나! 난 조물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려는데, 꼴보기 싫군, 이제 막 이 모든걸 벗어날 방도를 얻어(莽眇之鳥: 멀리 날아갈: 신선이 학을 타고 논다지요?) 육극 바깥으로 나서려던 참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한없이 너른 들판을 노니려한다. 넌 무슨 까닭에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물어 내 마음을 흔드나?
又復問.
그래도 다시 재차 물으니
無名氏曰:「汝遊心於淡,合氣於漠,順物自然而無容私焉,而天下治矣.」
무명씨 말하길: [네가 마음을 담담히 쓰고, 기를 조용히하여 만물을 자연스레 대하여 사사로움이 없으면 그게 다스리는 법이다]
- 육극을 떠난다는 말은 세상 번잡함을 떠나 조용히 제 천명을 누림을 말한다.
마음을 그저 담담하게 쓴다는 말이 뭔가? "나"란 걸 지우라는 말...내 마음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 버리라는 말이지요, 기를 없는것에 맞춰라... 기운이란 위로 솟는 것이니 그저 없다싶게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만물에 자연스레 따르라는 말은 삿된 마음으로 말없는 만물을 제 뜻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나"를 꺾고 지워라 이 말입니다. 세상을, 권세를 얻었으면 남의 것 빌어쓴다는 마음으로 잘 쓰고 돌려줘야 한다고 곱게곱게 쓸 일입니다. 그게 천하를 다스리는 법이지요.
제자리로 돌리는 것....
참고 글... 오복(五福)과 육극(六極)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리는 복(福)은 누구나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 하면서 복의 반대가 되는 흉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흉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당할 대로 다 당하고서도 미리 방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후회하기 보다는 그냥 운이 나빠서 흉을 당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인간의 본연적인 허물인 것이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그 속에 어리석음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그 계획은 반드시 실패에 대한 대책을 포함하고 있어야 치밀한 계획이 된다. 성공만 전제로 하고 있는 계획은 실패했을 경우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생각할 때는 그 반대편에 있는 흉의 관념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즉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는 사고의 양방향성에 의의를 두면서 『서경』홍범편에 나오는 오복과 육극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복(五福)은 첫째 수(壽), 둘째 부(富), 셋째 강녕(康寧), 넷째 유호덕(攸好德), 다섯째 고종명(考終命)이다. (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 康寧, 四曰攸好德, 五曰 考終命.) 오복(五福)으로 볼 수 있는 수(壽)는 120살이다. 부(富)는 재물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어야 하며, 강녕(康寧)은 질병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유호덕(攸好德)은 평상시 그가 좋아하는 바가 덕과 복의 도(道)이어야 한다. 고종명(考終命)은 사람마다 주어진 길고 짧은 명이 중간에 횡천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마쳐져야 한다. 육극(六極)은 첫째 흉단절(凶短折), 둘째 질(疾), 셋째 우(憂), 넷째 빈(貧), 다섯째 악(惡), 여섯째 약(弱)이다. (六極 一曰凶短折, 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 惡, 六曰弱.) 흉단절(凶短折)은 불행하게 60세 이전에 죽으면 단(短)이라 하고, 비통하게 30세 이전에 죽으면 절(折)이라고 한다. 즉 60세 이전에 죽으면 단명(短命)이고 30세 이전에 죽으면 요절(夭折)이다. 질(疾)은 항상 병을 끼고 사는 것이고, 우(憂)는 근심거리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빈(貧)은 재물이 곤궁한 것이고, 악(惡)은 추하고 비천한 것이다. 약(弱)은 몸이 비정상적이며 열등한 것이다. 4.
陽子居見老聃,曰:「有人於此,嚮疾强梁,物徹疏明,學道不倦 . 如是者,可比明王乎?」
양자거가 노담을 보고 이르길:[여기 한 사람이 있어 괴로움을 잘이기기는 돌다리같고 만물을 꿰뚫어 보아 밝히 알고 진리를 공부함에 게으르지 않다. 이런 사람을 명왕과 비길 수 있나?]
老聃曰:「是於聖人也,胥易技係,勞形怵心者也. 且也虎豹之文來田,猨狙之便來藉. 如是者, 可比明王乎?」
노담이 답하길:[성인 입장으로 보자면 잠깐 기(재주)에 매이는 자요 겉모양에나 신경쓰고 마음은 차마 다듬지 못하는 자니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가 화를 부르고 원숭이의 재주가 업수이 여김을 받듯 나중에 버림받지요 이런 자를 어찌 명왕에 견줄까요?]
陽子居蹴然曰:「敢問明王之治.」
양자거가 기꺼워 묻길:[감히 명왕의 다스림에 대해 묻습니다]
老聃曰:「明王之治:功蓋天下而似不自己, 化貸萬物而民弗恃.,有莫擧名, 使物自喜.,立乎不測,而遊於無有者也.」
노담이 말하길:[명왕의 다스림이란 "공이 천하를 덮어도 자기는 없듯 하고, 만물을 빌 정도가 되도 사람들을 믿지않는 법. 제 이름 들먹이는 것을 막으며 만물이 스스로 기쁘게 한다." 있어도 있는지 모르니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제 할일이나 하는 사람이지]
-우리는 어떤 이가 성실하고 모든 것에 잘 대처하면 그가 참 깨달은 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 처신이 남다르고 훌륭하기에... 그러나 당자가 모르는 것이 그리 외연만을 닦다 보면 화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호랑이 표범의 그 무늬를 보고 그를 탐하기에 사냥질을 시작하고... 그 재주를 보고 원숭이를 잡아 들이듯... 자기를 오히려 안온한 데 두지 못하고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차라리 껍닥은 두고 내실을 다짐만 못하다.
여지껏 우리는 성실함, 겸손함에 대해 생각해왔다 늘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를 고치려 노력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라고... 그러나 여기보면 그로만 되지않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를 감추는 겸손함이다. 속진에 나를 내어 놓으면 때묻고 아님 명을 재촉하는 법...
그런 태도로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그런 모습으로만 사는 것에 그치고 만다면 그건 문제를 낳는다. 명왕과 성실한 사내 하나... 겉보기엔 둘다 별반 다를 바없으나 문제는 실지 그의 살아지는 삶이다... 명왕의 다스림엔 자기란 것이 없다...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은 진짜로 진리에 사는 사람 아니다. 아니 굳이 말하면 이제 한 참 오르막 오르는 중일 뿐이다...내리막 아니 정상에 오른 사람이 갖춰야 할 도덕은 진짜로 그리 살아내는 것이다. 그삶에서 자기를 잊고 공을 잊고 있는듯 없는 듯 사는 사람이다.
객담이지만 시이저가 왜 브르투스의 칼을 맞는가? 왜 요순시대엔 사람들이 군주의 이름을 몰랐을까?
제왕이란 뭔 업적을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
자질을 갖췄어도 정작 한 줌도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하면 그 자질은 차라리 없음만 못하고 오히려 자기만 볶다가 끝날 뿐... 5.
그러나 진정 배우는 자라면 아직도 넓고 넓은 배움의 세계에 물가에서 부서지는 파도 물방울만 가지고 놀고있음을 알고 은인자중해야지요. 그 본질을 사는 것은 아니지요.눈이라도 밝으니 사람들의 운명이라도 읽지만... 그래서 재주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를 보고 맘에 드는 소리나 하는 사람이 있다니 깨우치려는 스승의 애정입니다. 아마 못 알아듣는 버릴 제자면 이런 수고도 않겠지요...여기서 모양(形)이라 함은 사람마다의 개성이라 해도 좋고 사람마다의 삶의 가치. 잔고기의 판단이요 머물어있는(생령이 없는) 판단이고, 물이 흐르는(생령이 살아있는) 판단이라. 판단은 9개 이름이 있고 이제 3가지를 보였으니 또 오라해라] 6. 无爲名尸,无爲謀府.,无爲事任,无爲知主. 體盡无窮,而遊无朕.,盡其所受乎天,而无見得,亦虛而已. 至人之用心若鏡,不將不迎,應而不藏,故能勝物而不傷.
하릴없음은 주검을 이르는 말, 하릴없음은 뭐든 하는 법이고 없음은 지혜의 근본입니다. 육신이 다하면 궁극에 이르고 뭐하나 주인 됨없다. 그 다함을 받아들이는 자리에 하늘이 임하고 그래서 얻음이 부질없다. 또 자기란게 없지요 깨달은 사람은 자기를 거울처럼 씁니다. 비치지 않으려 하지도 않고 감추는건 감추는 대로 비추죠 그래서 상채기 없이 만물을 이기게 되지요.
南海之帝爲儵,北海之帝爲忽,中央之帝爲混沌. 儵與忽時相與遇於混沌之地,混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混沌之德,曰:「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嘗試鑿之.」日鑿一竅,七日而混沌死.
남해의 왕을 숙이라합니다. 북해의 왕을 홀이라 하구요 가운데 있는 왕을 혼돈이라하지요. 숙과 홀이 만나면 혼돈이요 혼돈은 선을 기다리는 법 숙과 홀은 혼돈의 덕을 보고싶어 합니다 그래서:[사람들은 7개 구멍으로 듣고 먹고 자는 걸 봅니다, 그러나 이는 저란게 없어요 그저 구멍이지요] 하루에 한 구멍이지만 7일이면 혼돈이란게 죽지요.
-사람들은 그저 시계추 모양 흔들립니다. (儵)조급하거나 (忽)무신경하거나... 그 가운데는 혼돈 뿐이지요... 7구멍이란 뭘까요? 눈 코 귀 그리고 들고 싸는 곳... 아마도 옛 현인들은 입과 뒷구멍을 하나로 본모양입니다. 맞지요 연결된 것이니... 7공이지요 이 말은 보고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싸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 보는 淺薄한 인생의 판단을 말하지요...
그저 구멍란 더 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먹고 싸는데 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구든 잘먹고 좋은 냄새 맡고 좋은것 듣기 바라고 입에 넣었다가 쾌변하면 좋지요...
그러나 그 행위에 매이면 주인됨을 잊게 된다... 7공의 주인은 정신.... 도란, 진리란 이런 7공에 매인 삶과는 상관없다.
혼돈이 죽는다는 건 간단해서 그걸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우기에 조급함과 나태함을 이기는 겁니다.
잘난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선택이란 좋은것 듣고 보고 먹자 하지만 어차피 배설물이란 더러운 것...
이는 진리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심일 뿐... 어차피 몸밖으로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이란 걸 모르나? 금덩어리 먹으면 금덩어리 싸나?
중요한 건 뭘 먹고 보고 듣던 쌓아두지 않는 거죠
성경에도 나오듯 입으로(눈으로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 아니라 (입으로든 뒤로든) 나오는 것이 더럽고 악하다고...
현명한 지도라란 쌓아두지 않는 사람... 오히려 잘 굴러가도록하는 사람...
돈은 돌고 돈다고 돈이라듯... 재물이든 명예든 한 곳에 꿍쳐두면 탈나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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