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我國文字 自古有之 今南海縣郞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夫餘人王文所書之法 類符擬篆. 紫府先生之內文 太子扶婁之五行 皆出於桓檀之世 而殷學漢文 盖王文遺範也.
아국문자 자고유지 금남해현낭하리암벽 유신시고각. 부여인왕문소서지법 유부의전. 자부선생지내문태자부루지오행 개출어환단지세 이은학한문 개왕문유범야.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날부터 있었으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쓴 서법은 부(符)나 전(篆)서와 비슷하다. 또 자부선생의 삼황내문과 부루태자의 오행은 모두 환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은나라의 한문은 왕문이 남긴 규범에 따른다.
南海縣 郞河里 岩壁 古刻 留記云 神劃 曾在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ㄱ’. 世稱神誌仙人所傳也.或者 以是爲造字之始 則其劃直一 曲二之形 其義 有管制之象 其形其聲 又似出於計意然者也.
남해현 낭하리 암벽고각 유기운 신획 증재태백산청암지벽 기향여’ㄱ‘. 세칭신지선인소전야. 혹자 이시위조자지시 즉기획직일 곡이지형 기의 유관제지상 기형기성 우사출어계의연자야.
남해현 낭하리 암벽에 오래된 조각이 있는데 유기에 신령한 글자 획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바위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ㄱ과 같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신지 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를 글자의 기원으로 삼는다. 곧 그 획이 곧게 나가서 굽은 형으로. 통제하는 뜻이 있으며, 그 형태와 소리는 어떤 의도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
故 以神人之德 愛求人世以準焉 則眞敎之行也 必人事皆正也. 賢能在位 老幼公養 壯者服義 多者勸化 姦詐息訟 干戈閉謀 是亦理化之一道也.
고 이신인지덕 애구인세이준언 즉진교지행야 필인사개정야. 현능재위 노유공양 장자복의 다자권환 간사식송 간과폐모 시역이화지일도야.
그러므로 신인의 덕으로 이 세상을 구하고자 법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니, 즉 신교의 참된 가르침이 행해짐에 반드시 사람들의 일도 모두 바르게 되었을 것이다. 현자와 유능한 자가 벼슬자리에 있고, 노인과 어린이를 공동으로 부양하고, 장정이 의무를 다하고, 많이 가진 자가 베풀어 주고, 간사한 자가 송사를 그치고, 전쟁 도모를 이것이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교화하는 한결같은 도리였던 것이다.
大辯說註 曰 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 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대변설주 왈 남해현낭하히지계곡암상 유신시고각 기문왈 환웅출렵 치제삼신.
대변설주 왈 남해현낭하리지계곡암상 유신시고각 기문왈환웅출렵 치제삼신. 우왈 대시전고지빙구설 구이후 내형이위기 우복기변이위지자 개문자지원 막비출어국속지소존신야.
대변설주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옛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글에 한웅께서 사냥 나가서 삼신께 제사를 올리셨다고 하였다.
又曰 大始傳古 只憑口舌 久而後 乃形以爲妓 又復妓變而爲之字 蓋文字之源 莫非出於國俗 之所尊信也.
우왈 대시전고 지빙구설 구이후 내형이위기 우복기변이위지자 개문자지원 막비출어국속 지소존신야.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득한 태고 시절에는 옛 일을 입에만 의지해 전해 오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형태를 본떠서 그림을 그리고 다시 변해 글자가 되었으니, 문자가 생긴 근원은 나라의 풍속에서가 아니고 높이 받들고 믿은 데서 나오는 것이다.
참고
남해 금산의 부소암 그림문자 해석
○ 현지 안내판 해석:
「이 석각(石刻)은 일명 徐市過此(서시과차: 서시가 여기를 지나가다)라 불려지는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그림문자를 말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중국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시종인 서시(徐市)가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 곳 금산(錦山)을 찾아와서 한동안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그러나 진시황 때는 이미 한문자(漢文字)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고문자가 아닐까 추측된다.」
○ 신시고각(神市古刻):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와 이동면 낭하리 경계에 있는 금산(錦山: 681m)의 바위(扶蘇岩)에 고문자(古文字)가 새겨져 있는데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해석은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사냥 나왔다가 祭(제)를 三神(삼신)께 드리다’로 해석되어 있다.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의 해석
① 사냥개를 형상화 한 것이다
② 수레를 타고가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②-1 머리(모자)에 꽂은 두 개의 깃(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②-2 몸을 지탱하여 고삐를 잡은 것이 은밀히 요약됨을 볼 수 있다.
②-3 뒷바퀴(車輪)
②-4 분명치 않지만 소나 말이 수레를 끄는 형상 ②-3과 함께 보면 뒤에는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는 수레를 끌고 가는 짐승을 표현하여 움직이는 수레의 골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
③ 짐승이 화살을 맞은 형상이다.
③-1 (육지) 짐승
③-2 화살촉 두 개가 짐승에 명중한 형상이다.
④-1 두 마리의 새가 앞과 뒤에서 서로 연이어 날아가는 형상이다.
④-2 화살촉, 대개 명중의 요체는 화살촉에 있으므로 화살촉을 그려 활을 쏜 것을 보인 것이다.
⑤ 물고기를 그린 것이다.
⑤-1 물고기 지느러미
⑤-2 꼬리를 비스듬히 그려 헤엄치는 것을 보임
⑥ 깃대 위에 기수가 있고, 깃대 두 개의 깃발을 묶은 것이 나와 있고, 그 깃대를 말뚝에 꽂았음을 표시한다.
⑥-1 깃대
⑥-2 旗手(기수)
⑥-3 위 깃발(잠깐 말리어 자태가 좋다)
⑥-4 아래 깃발(쫙 퍼져 날림)
⑥-5 말뚝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그 배치순서에 의해 해석하면
‘사냥개를 뒤에 데리고 수레를 몰며, 옆으로 짐승을 쏘며, 앞으로는 새를 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곳을 거너서 기와 깃대를 꽂았으니 기간(旗竿)을 세우는 것은 국경을 표시하던 것인데 물고기의 형상은 격지라는 것을 뜻하고, 그 너머에 깃발을 세운 형상을 붙인 것을 보면 사냥하던 길에 한 물(남해도와 육지 사이 노량바다)을 건너서 국경을 확정한 어떠한 제왕의 紀功銘(기공명: 공을 기록하여 새긴 것)인 것 같은데 남해의 지형이 육지에 가까운 섬이니 물고기 상을 중간에 놓은 것이 더욱 들어 맞는다.’
'머리 위의 두 개의 획은 모자에 두 개의 새 깃털을 꽂는 우리나라 풍속과 들어 맞는다.(고구려 벽화, 백제와 산라 금관) 또한 깃발 끝이 둘,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용강고분(龍岡古墳) 갑사수기도(甲士手旗圖)와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각도 가로쓰기인데 「속 박물지」에‘倭(왜), 辰餘國(진여국) 惑(혹) 橫書(횡서) 惑(혹) 左書(좌서)라는 기록이 있다’ .
숫자
神市有算木 蚩尤有鬪佃目 夫餘有書算 其曰算木也 其曰佃目也.
신시유산목 치우유투전목 부여유서산 기왈산목야 기왈전목야.
신시 때에 산목이 있었고 치우천왕 때에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 때에 서산이 있었다.
산목과 전목은 아래와 같다.
檀君世紀 檀君嘉勒二年 三郞乙普勒伶正音三十八字 是謂加臨多 其文 曰
단군세시 단군가륵이년 삼랑을보륵여정음삼시팔자 시위가림다 기문 왈
단군세기를 보면 가륵단군(3세) 2년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라고 하였다. 그 글자는 아래와 같다.
李太白全書 玉塵叢談云 ‘渤海國 有書於唐 擧朝無解之者 李太白 能解而答之.’ 三國史記 云 憲康王十二年春 北鎭奏 ‘震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去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 云 ‘寶露國 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이태백전서 옥진총담운 발해국 유서어당 거조무해지자 이태백 능해이답지 삼국사기운 헌강왕십이년춘 불진주 ‘진국인입진 이편목괘수이거 수취이헌.’ 이목서십오자 운 ‘보로국 여흑수국인 공향신라국화통.’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 <삼국사기> 헌강왕 12년의 봄에, 북쪽 진지애서 ‘대진=발해국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 나무 판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습니다’라고 상주하고 편목을 바쳤는데, 그 나무에 쓰여진 열다섯 글자의 내용은 ‘보로국이 흑수국의 사람과 함께 신라국과 화친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헌강왕 당시 발해국은 소위 고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
且高麗光宗時 張儒 接伴使著聞. 初 避亂到吳越. 越氏有好事者 刻東國寒松亭曲於琴底 漂逆波. 越不得解其辭 適遇張儒 拜問其辭 張儒卽席 以漢詩 解之曰
차고려광종시 장유 접반사저문. 초 피란도오월. 월씨유호사자 각동국한송정곡어금저 표역파.월부득해기사 적우장유 배문기사 장유즉석 이한시 해지왈
또 고려 광종 때 장유는 접반사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초기에 난을 피해 오월에 가 있었다. 월나라 사람 중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의 한송정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워 놓았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그 자리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어 말하기를,
月白寒松夜 월백한송야
겨울 소나무에 달밝은 밤에
波晏鏡浦秋 파안경포추
파도가 조용한 경포의 가을
哀鳴來又去 애명래우거
슬피 울며 오가는
有信一沙鷗 유신일사구
마음 가는 백사장 갈매기 한 마리.
盖琴底所刻文 疑古加臨多之類也
개금저소각문 의고가림다지유야
아마 거문고 바닥에 새겼던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인 것 같다.
元董仲三聖紀注 云 辰餘倭國 或橫書 或結繩 或鍥木 惟高麗 摸寫穎法. 想必桓檀上世 必有文字摸刻也.
원동중삼성기주 운 진여왜국 혹횡서 혹결승 혹계목 유고려 모사영법. 상필환단상세 필유문자 모각야.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고조선의 진한과 부여와 왜국은 혹은 가로로 글 쓰는데 혹은 노끈을 맺고[結繩]하고 혹은 나무에 문자를 새겼는데[鍥木], 고려는 상형글씨를 썼다. 생각컨대 필시 환단의 상고 시절의 문자를 본떠서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리라.
-辰韓은 가로로 글을 적고, 다른 작은 나라들은 끈을 묶어 수를 나타내거나 나무를 깎아 수를 나타내는데 고려에서는 뭔가를 베껴 새겼는데 아마도 환단시절 글자를 새긴 것일 것이다.
崔致遠 嘗得神誌古碑 所刻之天符經 更復作帖 以傳於世 卽與郞河里岩刻的 是皆實跡也.
최치원 상득신지고비 소각지천부경 경복자첩 이전어새 즉여낭하리암각적 시개실적야.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를 만들어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 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같은 것으로 이 둘은 확실히 실재했던 흔적(증거)이다.
世傳 神市有鹿書 紫府有雨書 蚩尤有花書 鬪佃文束 卽其殘痕也 伏羲有龍書 檀君有神篆 此等字書 遍用於白山黑水靑邱九黎之域.
세전 신시유녹서 자부유우서 치우유화서 투전문속 즉기천흔야 복희유용서 단군유신전 차등자서 편용어백산흑수청구구려지역.
세상엔 전하기를 신시 때에 녹서가 있었고, 자부선생 때 우서가 있었고, 치우천왕 때에는 투전문이라는 화서가 있었다고 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흔적이다. 복희 때 용서가 있었고, 단군 때 신전이 있었는데, 이러한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 지역에서 널리 사용했다.
夫餘人王文 始以篆爲煩 而稍省其劃 新作符隸而書之. 秦時 程邈奉使於肅愼 得王文隸法於漢水 又因其劃而小變之形 是今之八分也. 晉時 王次仲 又作楷書 次仲 王文之遠裔也. 今究其字之所源 則皆神市之遺法 而今漢字 亦承其支流也 明矣.
부여인왕문 시이전위번 이초성기획 신작부예이서지. 진시 정막봉사어숙신 득왕문예법어한수 우인기획이소변지형 시금지팔분야. 진시 왕차중 우작해서 차중 왕문지원예야. 금구기자지소원즉 개신시지유법 이금한자 역습기지유야 명의.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으로 전서가 번거롭다 하고 좀 그 획수를 약간 줄여 새로 부예(符隸: 기호화된 예서)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를 한수에서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1/5을 줄인)체이다. 진(晉)나라의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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