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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五 孝善 第九 - 貧女養母

卷第五 孝善 第九

 

貧女養母

 

孝宗郞遊南山鮑石亭[或云三花述] 門客星馳 有二客獨後. 郞問其故 曰 芬皇寺之東里有女 年二十左右 抱盲母相號而哭. 問同里 曰 此女家貧 乞啜而反哺有年矣 適歲荒 倚門難以藉手 贖賃他家 得穀三十石 寄置大家服役 日暮橐米而來家 炊餉伴宿 晨則歸役大家 如是者數日矣 母曰 昔日之糠粃 心和且平 近日之香秔 膈肝若刺而心未安 何哉 女言其實 母痛哭 女嘆己之但能口腹之養 而失於色難也 故相持而泣 見此而遲留爾.

효종랑유남산포석정[혹운삼화술] 문객성치 유이객독후. 랑문기고 왈 분황사지동리유녀 년이십좌우 포맹모상호이곡. 문동리 왈 차녀가빈 걸철이반포유년의 적세황 기문난이적수 속임타가 득곡삼십석 지치대가복무 일모탁미이래가 취향반숙 진즉귀역대가 여시자수일의 모왈 석일지당비 심화차평 근일지향갱 격간약자이심미안 하재?” 여언기실 모통곡. 여탄기지단등구복지양 이실어색난야 고상지이읍견차이지유이.”

 

효종랑(孝宗郞)이 남산의 포석정(鮑石亭)[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놀고 있을 때, 문객들이 모두 달려 왔는데 오직 두 사람만이 늦게 왔다. 그래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어떤 처녀가 스무 살쯤 먹어 보이는데, 눈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집이 가난한 이 처녀는 구걸을 하여 어머니를 여러 해 동안 봉양해 왔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구걸만으로는 밥을 얻기가 어렵게 되자 다른 사람에게 몸을 팔고 30섬의 곡식을 받아 주인집에 맡겨놓고 일해 왔었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싸 와서 밥을 해 드리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돌아가서 일을 했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가, “옛날에는 거친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는데도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구나.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라고 묻자 딸이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였고, 그 어머니는 통곡을 했답니다. 딸은 자신이 다만 어머니를 배부르게 하는 봉양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걸 보느라 늦었습니다.”

 

郞聞之潸然 送穀一百斛. 郞之二親亦送衣袴一襲 郞之千徒斂租一千石遺之. 事達宸聰 時眞聖王賜穀五百石 幷宅一廛 遣卒徒衛其家 以儆刦掠. 旌其坊爲孝養之里 後捨其家爲寺 名兩尊寺.

랑문지체연 송곡일백두. 랑지이친역송의궤일습 낭지천도검조일천석유지. 사달신총 시진성왕사곡오백석 병택일루 견졸도위기가 이경갑략. 정기방위효양지리 후사기가위사 명양존사.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곡식 100곡을 보냈다. 효종랑의 부모님도 옷 한 벌을 보냈으며, 효종랑의 무리 1,000여 명도 벼 1,000섬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섬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여 도둑을 막게 하였다. 또 그 마을에 효행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효양리(孝養里)라 하였다. 훗날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