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龍寺 丈六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皇龍寺. 至己丑年 周圍墻宇 至十七年方畢.
신라제이십사진흥왕즉위사십년계유이월 장축자궁어용궁남 유황룡현기지 내개치위불사 호황룡사. 지기축년 주위당우 지십칠년방필.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인 계유(서기 553) 2월에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바꾸어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기축년(서기 569)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未幾 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撿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 金一千兩 恐誤 或云 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미기 해남유일거방 래박어하곡현지사포[금울주곡포야] 검간유첩문운 “서축아육왕 취왕철오만칠십근 황금삼만푼[별전운 철사십만칠천근 금일천냥 공오 혹운 삼만칠천근] 장주석가삼존상미취 재강범해이축왈 ‘원도유연국토 성장육존용.’” 병재모양일불이보살상.
얼마 되지 않아 바다 남쪽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이다.]에 정박하였다. 이 배를 조사해 보니 이러한 내용의 공문이 있었다.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다른 전에서는 철이 47,000근이고 금이 1,000냥이라 했는데 잘못된 것인 듯하다. 혹은 37,000근이라고도 한다.]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장륙존(丈六尊)의 모습을 이루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 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현이구상상문. 칙사복기현지성동상개지지 창동축사 요안기삼존. 수기금철어경사 이대건육년갑오삼월[사중기운 계사시월십칠일] 주성장육존상 일고이취. 중삼만오천칠근 입황금일만일백수십푼 이보살 이철이만이천근 황금일만일백삼십육분.
하곡현의 관리가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문서로 아뢰었다. 왕은 그 현의 성 동쪽에 높고 밝은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그 세 불상을 모시게 하였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운반해 와, 대건(大建) 6년 갑오(서기 574) 3월[사중기(寺中記)에는 계사년(서기 573)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에 장륙존상을 주조했는데 단 한 번에 성공하였다. 그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2,000근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
安於皇龍寺 明年 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 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안어황룡사 명년 상루유지종 옥지일척. 대왕승하지조. 혹운 상성재진평지세자 류야.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는데, 그 이듬해 불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까지 이르렀으니 땅을 한 자나 적셨다. 이것은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 이루어졌다고도 하지만 잘못된 말이다.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養眞身 斂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時王之太子 獨不預斯事 王使詰之. 太子奏云 “獨力非功 曾知不就.”
별본운 아육왕재서축대향화국 생불후일백년간 한부득공양지신 검화금철약간근 삼도주성무공. 시왕지태자 독불예사사 왕사힐지. 태자주운 “덕력비공 증지불취.”
다른 책에 이르길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은 인도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나고 100년 간 부처님의 진신을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서 금과 쇠 몇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주조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유독 태자 혼자서만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은 그를 꾸짖었다. 그러자 태자가 아뢰었다. “혼자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벌써 안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王然之 乃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 五百中國 十千小國 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成. 相好畢備 阿育此翻無憂.
왕연지 내재강범해. 남염부제십육대국 오백중국 십천소국 팔만취락 미불주선 개주불성. 최후도신라국 진흥왕주지어문잉림 상성. 상호필비 아육차번무우.
그 말을 옳게 여긴 왕은 그것을 배에 싣고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남인도) 16개 나라와 500의 중간 크기의 나라, 10,000의 작은 나라와 80,000의 촌락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모두 불상을 만드는 일을 성공하지 못하였다. 최후로 신라에 이르렀는데,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불상을 주조하는 데 드디어 성공하였다. 이로써 진흥왕이나 아육왕의 근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後大德慈藏西學 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與別記所載符同] 像成後 東竺寺三尊 亦移安寺中.
후대덕자장서학 도오대산 감문수현신수결 잉촉운 “여국황룡사 내석가여가섭불강연지지 연좌석유재 고천축무우왕 취왕철약간근범해 역일천삼백여년 연루내도이국 성안기사. 개위연사연야.”[여별기소재부동] 상성후 동축사삼존 역이란사중.
후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 가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나 비결을 주면서 부탁하길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釋迦)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의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 년이 지나서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완성되어 그 절에 모셨던 것이다. 대개 위엄과 인연으로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기록된 것과 같다.] 불상이 다 완성된 후에 동축사의 삼존불도 황룡사로 옮겨 모셨다.
寺記云 “眞平王六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사기운 “진평왕육년갑진 금당조성 선덕왕대 사초주진골환희사 제이주자장국통 차국통혜훈 차상률사.”운. 금병화이래 대상여이보살대융몰 이소석가유존언.
절의 기록에는 이렇게 말하길 “진평왕 6년 갑진(서기 584)에 금당(金堂)을 만들었다.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초대 주지는 진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慈藏) 국통(國統)이었고 그 다음은 국통 혜훈(惠訓)이고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몽고와의 전쟁이 있은 이래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다.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찬왈 진방하처비진향 향화인연최아방 부시육왕난하수 월성내방구행장.
기리길
티끌 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마는 향불 모시는 인연 우리나라가 최고라네.
아육왕이 착수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오느라 그랬던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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