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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三 塔像 第四- 皇龍寺 九層塔

皇龍寺 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 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신라제이십칠선덕왕즉위오년 정관십년병신 자장법사서학 내어오대감문수수법[상견본전] 문수우언 여국왕 시천축찰리종왕 예수불기 고별유인연 부동동이공공지족. 연이산천기험 고인성추패 다신사견 이시혹천신강화. 연유다문비구 재어중국 시이군신안태 만서화평의.” 언기불현. 장지시대성변화 읍혈이퇴.

 

27대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정관(貞觀: 당태종 연호) 10년 병신(서기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았다.[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보인다.] 문수보살이 또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 왕은 바로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다. 그러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의 공공(共工) 족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격이 거칠고 사나우며 많이들 미신을 믿어서 때때로 하늘의 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들이 편안하고 백성이 평화로운 것이다.” 그리고는 말을 끝내자 곧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보살의 화신임을 알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경유중국태화지변 홀유신인출문 호위지차?” 장답왈 구선시고신인예배 우문 여국유하유난.”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는가?” 자장이 대답하였다. “깨달음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신인이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가?”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장왈 아국북연말갈 남접왜인 여제이국 질범봉수 인구종횡. 시위민경.”

 

자장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도적들이 맘대로 돌아다닙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하니 신인이 말하길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신인운 금여국 이녀위왕 유덕이무위 고인국모지 의속귀본국.” 장문 귀향장하위이익호?” 신왈 황룡사호법룡 시오장자 수범왕지명 내호시사. 귀본국 성구층탑어사중 인국항복 구한래공 왕조영안의. 건탑지후 설팔관회 사죄인 즉외적불능위해. 경위아 어경기남안 치일정려 공자여복 여역보지덕의.”

 

신인이 말하길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구려. 그래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빨리 돌아가야만 하오.” 그래서 자장이 다시 물어보았다. “고국에 돌아가서 어떤 이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 “황룡사의 호법용(護法龍)은 바로 나의 맏아들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소이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할 것이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며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후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여 풀어주면, 외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나를 위해 서울 인근 남쪽 언덕에 절 하나를 지어 내 복을 빌어준다면, 나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할 것이오.”

 

言已 遂奉玉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언이 수봉옥헌지 홀은불현[사중기운 어종남산원향선가처 수건탑인유].

 

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받들어 바친 후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절의 기록에,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가 있는 곳에서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作龍樹]幹蠱 率小匠二百人.

정관십칠년계묘십육일 장당제소사경상가사폐백이환국 이건탑지사문어상. 선덕왕의어군신 군신왈 청공장어백제 연후방가.” 내이보백 청어백제. 장명아비지 수명이래 경영목석 이간용춘[일작용수]관고 솔소장이백인.

 

정관 17년 계묘(서기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승복과 폐백 등을 가지고 귀국해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였다.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는 나무와 돌을 다듬었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이 공사를 주관하여 200여 명의 장인들을 통솔하였다.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內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는 날에 아비지가 꿈에 자기 나라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의구심이 생겨서 공사를 멈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면서 깜깜해졌는데, 그 어둠 속에서 어떤 노승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더니, 승려와 장사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비지는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刹柱記云 鐵盤已上 高四十二尺 已下 一百八十三尺.”

찰주기운 철반이상 고사십이척 이하 일백팔십삼척.”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철 기반 위 높이는 42자이고 그 아래는 183자이다.”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大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자장이오대소수사리백립 분안어주중 병통고사계단급개화사탑 이부지용지청.[대화사재아곡현남 금울주 역장사소창야] 수탑지후 천지개태 삼한위일 이비탑지영보호? 후고려왕장모벌라 내왈 신라유삼보 불가범야 하위야?” 황룡장육 병구층탑 여진평왕천사옥대.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 를 받는 단)과 또 대화사(大和寺)의 탑에 나누어 모셨는데, 연못에서 나온 용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대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로 역시 자장법사가 창건하였다.]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훗날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말하였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수침기모. 주유구정 초인불감북규 차지유야.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나라가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경우이다.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찬왈 귀공신부압제경 휘황금벽동비맹 등임하시구한복 시각건곤특지평.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귀신의 도움으로 황제의 수도를 위압하니 휘황찬란한 금색과 청색 날아오를 듯한 용마루라.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겠나 비로소 천지가 유달리 태평함을 깨달았다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우해동명현안홍찬동도성립기운 신라제이십칠대 여왕위주 수유도무위 구한침노 약용궁남황룡사 건구층탑 즉인국지재가진. 제일층 일본 제이층중화 제삼층오월 제사층탁라 제오층응유 제육층말갈 제칠층단국 제팔층여적 제구층예맥.”

 

또 우리나라의 명현인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구한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 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 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五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우안국사급사중고기 진흥왕셰유창사후 선덕왕대정관십구년을사 탑초성. 삼십이효소왕즉위칠년 성역원년무술유월 벽력[사중고기운성덕왕대 오야 성덕왕대 무무술] 제삼십삼성덕왕재경신세 중성. 사십팔경문왕대ㅔ무자유월 제이벽력 동개제삼중수. 지본조광종즉위오년계축시월 제삼벽력 현종십삼년신유 제사중성. 우정종이년을해 제사벽력 우문중갑진년 제오중성. 우헌종말년을해 제오벽력 숙종병자 제육중수. 우고종이십오년무술동월 서산병화 탑사장육전우개재.

 

국사(國史)와 절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진흥왕 계유년(서기 553)에 절을 창건한 후에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서기 645)에 탑이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32대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인 성력(聖曆) 원년 무술(서기 698) 6월에 벼락을 맞았다.[절의 옛 기록에서는 성덕왕(聖德王) 시대라고 하였지만 잘못된 것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33대 성덕왕 대인 경신년(서기 720)에 다시 세워 완성하였다. 48대 경문왕 무자년(서기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고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우리 고려 광종(光宗)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계축년(서기 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서기 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정종 2년 을해(서기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문종 갑진년(서기 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현종 말년 을해(서기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고 숙종 원년 병자(서기 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그런데 고종 25년 무술(서기 1238) 겨울에 몽고의 침략으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