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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第三 塔像 第四- 金官城 婆娑石塔

金官城 婆娑石塔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 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戊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금관호계사파사석탑자 석차읍위금관국시 세조수로왕지비 허황후 명황옥 이동한건무이십사년무신 자서역아유타국소재래.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왕비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서기 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초공주승이친지면 범해장지동 조파신지노 불극이환. 백부왕 부왕명재자탑. 내호이보 래박남애.

 

애초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아버지인 왕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아뢰자 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곧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으로 와서 정박하였다.

 

有緋帆茜旗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유비범천기주옥지미 금운주포 초해능고어강산처왈능현 천기초입해애왈기출변.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싣고 왔기 때문에 지금도 주포(主浦)라고 하고, 처음에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벗었던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왔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 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祗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수로왕빙영지 동어국일백오십여년. 연우시해동 미유창사봉법지사. 개상교미지 이토인불신복 고본기무창사지문 예제팔대질지왕이년임진 치사어기지. 우창왕후사[재아도눌지왕지세 법흥왕지전] 지금봉복언 겸인진남왜. 구견본국기.

 

수로왕이 황후를 맞이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해동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아직 없었다.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은 불교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도 절을 세웠다는 글이 없었다. 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서기 452)에 이르러서야, 그곳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여서[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이니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까지도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 왜구까지 진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點鷄冠血爲驗者是也. 金官國亦名駕洛國 具載本記.

탑방사면오층 기조루심기. 석미적반색 기질영취 비차방류야. 본초소운점계관혈윌험자시야. 금관국역명가락국 구재본기.

 

탑은 사각형에 5층인데, 그 조각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매우 연하여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한,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찬왈 재염비범천패경 걸영차막해도경 기도도안부황옥 천고남왜알노경.

 

기리기를

 

석탑 실은 붉은 돛 배 깃발도 가벼워

사나운 파도 막아 달라 신령께 빌었다네.

어찌 황옥만을 도와 이 해안에 왔겠는가

천고토록 날뛰는 고래같은 왜적의 침략 막고자 해서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