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第三 塔像 第四 迦葉佛 宴坐石
玉龍集及慈藏傳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옥룡집급자장전여재가전기개운 “신라월성동용궁남 유가섭불연좌석 기지즉전불시가람지허야 금황룡사지지 즉칠가람지일야.”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는 모두 이러한 말이 있다. “신라 월성(城東)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는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가 있는 곳은 일곱 개의 절 가운데 하나이다.”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來 圍僅三肘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護.
안국사 진흥왕즉위사년 개국삼년걔유이월 축신궁어월성동 유황룡현기지 왕의지 개위황룡사.연좌석재불전후면. 상일알언 석지고사오육척해 위근삼주 당립이평정. 진흥창사이래 개셩재화석유석열처. 사승첩철위호.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인 개국(開國) 3년 계유(서기 553) 2월에 월성(月城) 동쪽에 신궁(神宮)을 짓는데 황룡(皇龍)이 나타났던 자리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新宮을 고쳐 황룡사로 삼았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 정도였고 그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이지만, 우뚝 서 있었고 그 위는 평평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래로 두 번이나 불이 나 돌이 갈라진 곳이 있었다. 절의 승려가 쇠를 붙여서 돌을 보호하였다.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내유찬왈 혜일침휘불기년 유여연좌석의연 상전기도성창해 가석외연성미천.
기리는 글이 있는데 이러하다.
불교가 침체된 지 아득하여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만이 의연히 남아 있구나.
뽕나무 밭이 몇 번이나 푸른 바다가 되었던가
애달프게도 우뚝이 그 자리에 남았구나.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기이서산대병이후 전탑외신 이타석역이몰 이근여지평의.
그러나 몽고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은 이후로 불전과 탑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 돌도 파묻혀서 지면과 똑같이 평평해져버렸다.
按阿含經 伽“迦葉佛是賢刦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안아함경 가“가섭불시현겁재삼존야 인수이만세시 출현어세.”
『아함경(阿含經)』을 살펴보면 이러한 글이 있다. “가섭불(迦葉佛)은 바로 현겁(賢刦)의 세 번째 부처이다. 사람의 나이로는 2만 세 때 세상에 태어났다.”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刦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刦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刦. 此一住刦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 是第四尊也.
거차이증감법계지 매성겁초 개수무량세 첨감지수팔만세시 위주겁지초. 자차우백년감일세 지수십세시 위일감. 우증지인팔만세시 위일증 여시이십감이십증 위일주겁. 차일주겁중 유천불출세 금본사석가 시제사존야.
이 글에 의하여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하면, 매번 성겁(成刦)의 처음에는 모두 무량수(無量壽, 무한한 수명)를 누리다가 점점 줄어서 나이가 8만 세에 이르면, 그때가 바로 주겁(住刦)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백년마다 1세씩 줄어들어서 10세가 될 때까지의 기간이 1감이다. 또 여기서부터는 다시 증가하여 나이가 8만 세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이 1증이 된다. 이렇게 하여 20감하고 20증 하는 기간이 1주겁이 된다. 이 1주겁 동안에 1,000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네 번째 부처이다.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刦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刦初無量歲壽時 又幾何也.
사존개현어제구감중 자석존백세수시 지가섭불이만세시 이득이백만여세. 약지현겁초제일존구유손불시 우기만세야. 자구류손불시 상지겁초무량세수시 우기하야.
네 부처는 모두 제9감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백 세가 될 때부터 가섭불이 2만 세가 될 때까지는 이미 2백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 시초의 첫째 부처인 구류손불(拘留孫佛)에 이르면 또 몇 만 세가 된다. 구류손불 때부터 위로 올라가 겁초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리던 때까지는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歲也.
자석존하지우금지원십팔년신사세 이득이천이뱍삼십의 자구류손불 역가섭불시 지우금 즉직기만세야.
석가세존으로부터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서기 1281)까지가 이미 2,230년이나 되었으니,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시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 만 년이나 된다.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太一歷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豐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유본조명서오세문 작역대가 종대김정우칠년기묘 역수지사만구천육백여세 위반고개벽무인. 우연희궁록사김희녕소찬태일역법 자개벽상원갑자 지원풍갑가 일백구십삼만칠천육백사십이세 우찬고도운 개벽지획린 이백칠십육만세.
우리 고려의 명사 오세문(吳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서 대금(大金) 정우(貞祐) 7년 기묘(서기 1219)에서 거슬러 헤아려 49,600여 년에 이르면,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 녹사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태일역법(太一歷法)』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부터 원풍(元豐) 갑자년(서기 1084)에 이르기까지가 1,937,641년이라고 하였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춘추시대에 획린(獲麟: 노(魯)나라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77) 봄에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갔다가 기린을 잡은 일을 말한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저술하다가 여기에서 저술을 끝냈다)때까지가 2,760,000년이라고 하였다.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刦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안제경 차이가섭불시지우금 위차석지수. 상거어겁초개벽시위아자의. 삼가지설 상불급자아석지냔 기어개벽지설 소지원의.
여러 경전을 살펴보면 가섭불부터 지금까지를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로 삼는다. 그러나 오히려 겁초의 개벽한 때부터 따진다면 어린애 나이에 불과하다. 위의 세 천지개벽설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의 천지개벽설은 너무나 엉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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