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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三 興法 第三- 寶藏奉老 普德移庵

寶藏奉老 普德移庵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다.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고려본기운 여계무덕정관간 국인쟁봉오두미교 당고조문지 견도사송천존상.” 래강도덕경 왕여국인청지 즉제이십칠대영류왕즉위칠년 무덕칠년갑신야. 명년견사왕당 구학불노 당제[위고조야]허지.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르길 고구려 말년 무덕정관(618~649)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다투어 신봉하자, 당나라 고조(高祖)가 이 소문을 듣고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왔다. 도사가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하자 왕과 나라 사람들이 들었는데, 즉 제27대 영류왕(榮留王)이 왕위에 오른 지 7년인 무덕 7년 갑신(서기 624)이었다. 그 다음 해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겠다고 청하자, 당나라 황제[고조를 말한다.]가 이를 허락하였다.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說王以儒釋並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급보장왕즉위[정관십육년임인야] 역욕병흥삼교 시총상개소문설왕이유석병치이황구미성 특사어당구도교.

 

보장왕(寶藏王)이 왕위에 오르자[정관 16년 임인(서기 642)이다.] 유불도 삼교를 함께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당시 총애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을 설득하기를, 유학과 불교는 함께 번성하고 있지만 도교는 아직 그렇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時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摠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시보덕화상주반룡사 민좌도필정 국조위의 누간불청. 내이신력비방장 남이우완산주[금선주야] 고대산이거언. 즉영휘원년경술유월야[우본전운 건봉이년정묘삼월삼일야] 미기국멸[이총장원년무진국멸 즉계거경술십구년의] 금경복사유비해방장시야운운[이상국사]

 

그 당시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좌도인 도교가 정도인 불교에 필적하면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염려하여서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통력으로 암자를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이다.]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기고 거기에 머물렀다. 이때가 영휘(永徽) 원년 경술(서기 652) 6월이다.[본전(本傳)에서는, 건봉(乾封) 2년 정묘(서기 667) 33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라가 멸망하였다.[총장(摠章) 원년 무진(서기 668)에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술년부터 19년이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는 날아온 암자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이상은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진락공유시재당 문열공저전행세.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이 시를 지어 당()에 남겨두었고, 문열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이 전기를 지어서 세상에 전하였다.

 

又按唐書云 先是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우안당서운 선시수양제정요동 유비장양명 불리어군 장사유서왈 필위총신 멸피국의 급개씨천조 이개위씨 내이양명시지응야.”

 

당서(唐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수()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칠 때에, 비장 양명(羊皿)이 전쟁에 불리해지자 죽으면서 맹세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총애 받는 신하가 되어서 저 나라를 멸망시키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개씨(蓋氏)가 권력을 잡자 개()를 씨()로 삼았으니, 곧 양()과 명()이 합해진 글자였다.”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三十六代嬰陽王立二十五年也]上表乞降. 時有一人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우안고려고기운 수양제이대업팔년임신 영삼십만병 도해래정. 십년감술시월 고려왕[시제삼십육대영양왕입이십오년야]상표걸항. 시유일인밀지소노어회중 수지표사 도양제강중. 제진표곳지노발중제흉. 제장선수 위좌우왈 짐위천하지주 친정소국이불이 만대지소치.” 시우상양명주왈 신사위고려대신 필멸국 보제왕지수.”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 이르길 수나라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서기 612)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10년 갑술(서기 614) 10월에는 고려왕(高麗王)[당시는 제25대 영양왕(嬰陽王)이 왕위에 오른 지 25년째 되는 해이다.]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작은 활을 품에 숨겨 사신을 따라 양제가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고려의 국서를 읽고 있는데,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추었다. 양제가 군사를 돌리며 주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정벌하다가 불리하여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그러자 우상 양명(羊皿)이 아뢰었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서 폐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唐書云盖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有文證. 而傳云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제붕후 생어고려 십오총명신무. 시무양왕문기현[국사 영류왕명건무 혹운건성 이차운무양 미상] 징입위신. 자칭성개명금 위지소문 내시중직야[당서운개소문자위막리지 유중서령. 우안신지비사서운 소문대영홍서병주.’ 즉소문내직명유문증. 이전운문인소영홍서 미상수시.]

 

양제가 죽은 뒤에 양명이 고구려에서 태어났는데 15세가 되자 총명하고도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당시에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국사에서는 영류왕의 이름을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양무라고 했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불러서 신하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성을 개씨라 하고 이름을 금()이라고 하였다.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당서에서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 불렀으니 중국의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神誌)비사서(秘詞序)를 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주를 달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문이 바로 벼슬 이름이라는 것이 문헌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전()에서는 문인 소영홍이 서를 썼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無道敎. 故國危矣.”

금주왈 정유삼족 국유삼교. 신견국중 유아유석무도교. 고국위의.”

 

개금(蓋金)이 왕에게 아뢰길 솥에 세 개의 발이 있는 것처럼 나라에도 세 가지 종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이 나라 안을 보건대 오직 유교와 불교만이 있고 도교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敍達等道士八人[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 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王喜 以佛寺爲道館 尊道士坐儒士之上.

왕연지 주당청지. 태종견서달등도사팔인[국사운 무덕팔년을유 견사입당구불노 당제허지.” 거차득양명자갑술년사 임탁생우차 즉재년십여세의 이운총재 설왕견청 기년월필유일오. 금양존] 왕희 이불사위도관 존도사좌유사지상.

 

왕은 이 말을 옳다고 여기고는 당나라에 도교를 청하였다. 당 태종은 서달(敍達) 등 도사 8명을 보내주었다.[국사에서는, “무덕 8년 을유(서기 625)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구하였더니, 당 황제가 허락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양명은 갑술년(서기 614)에 죽었다가 고구려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나이가 겨우 10여 세에 총애 받는 재상이 되어서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보내 도교를 청했다는 것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의 날짜를 잘못 기록했을 것이다. 지금 둘 다 기록해 둔다.] 왕이 기뻐하며 절을 도교의 도관(道館)으로 만들고 도사를 높여 유학의 선비 위에 앉게 하였다.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勅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蓋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

도사등행진국내유명산천. 고평양성세신월성야 도사등주칙남하룡 가축위만월성. 인명용언성. 작참왈용언도 차운천년보장도. 혹착파영석[속운도제암 역운조천석 개석성제기차석조상제고야.]

 

도사들은 돌아다니며 나라 안의 유명한 산천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옛 평양성의 지세가 신월성(新月城, 반월성(半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을 외워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령하여 성을 중축하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 하였다. 또 예언서를 만들어서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하였다. 혹 영석(靈石)[세간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한다. 옛날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에게 올라가 조회했기 때문이다.]을 파내어 깨뜨리기도 하였다.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亦至十六年乃畢.

개금우주축장성동북서남 시남역여경 역지십육년내필.

 

개금은 또 왕에게 아뢰어 긴 성을 동북쪽과 서남쪽에 쌓도록 하였는데, 이때 남자들은 성을 쌓으러 나가고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으니 무려 16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大將軍李勣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與國史少殊 故幷錄].

급보장왕지세 당태종친통 이육군내정 우불리이환. 고종총장원년무진 우상유인궤대장군이적신라김인문등 공파국멸. 금왕귀당 보장왕서자솔사천여가 투우신라[여국사소수 고병록]

 

보장왕의 시대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이 직접 6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지만, 또 불리하여서 돌아갔다.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서기 668)에 우상 유인궤(劉仁軌), 대장군 이적(李勣),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공격하여 깨뜨리니 나라가 멸망하였다. 왕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가 4,000여 가구를 인솔하여 신라에 투항하였다.[국사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아울러 기록해둔다.]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대안팔년신미 우세승통도고대산경복사비래방장 예진성사지진 유시운

 

대안(大安) 8년 신미(서기 1092)에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가서 보덕성사(禮普聖師)의 영정에 예를 올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열반방등교 전수자오사운운 지가석비방후 동명고국위.

 

열반의 대승(大乘) 가르침은

우리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하네.

애석하도다 승방을 날려 온 후에

동명왕의 옛 나라가 위태로워졌구나.

 

 

跋云 高麗藏王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現於高麗馬嶺 告人云 汝國敗亡無日矣.’”

발운 고려장왕록어도교 불신불법 사내비방 남지차산. 후유신인현어고려마령 고인운 여국채망무일의.”

 

그 발문(跋文)에 이러한 말이 있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믿지 않았으므로, 보덕법사는 곧 승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렀다. 그 후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너희 나라가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구여국사 여구재본전여승전. 사유고재십일인. 무상화상여제자김취등창금동사 숙멸의융이사창진구사 지수창대승사 일승여심정대원등창대원사. 수정상유마사 사대여계육등창중대사 개원화상창개원사 명덕창연구사 개심여진명역유전 개여본전.

 

이것은 다 국사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승전(僧傳)에 실려 있다. 법사에게는 뛰어난 제자 11명이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창건하였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창건하였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창건하였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 대원(大原) 등과 대원사(大原寺)를 창건하였다.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창건하였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중대사(中臺寺)를 창건하였으며,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창건하였다.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하였고,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으니, 모두 다 본전과 같다.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洳 不省滄溟徙臥龍.

찬왈 석씨왕양해불궁 백천유노진조종 여왕가소봉저여 불성창명사와룡.

 

다음과 같이 기리는 글이 있다. 

 

불교는 넓디넓어 바다처럼 끝이 없어

유교 도교 같은 온갖 시내 다 받아들인다네.

고구려왕 가소롭게도 웅덩이만 막았지

와룡이 바다로 옮겨감을 알지 못하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