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宗興法 厭髑滅身
[距訥祗世一百餘年]
[거눌지세일백여년]
[원종이 불법을 일으킨 것은 눌지왕(訥祗王) 시대부터 100여 년 뒤의 일이다.]
新羅本記云 “法興大王卽位十四年 小臣異次頓爲法滅身.” 卽蕭梁普通八年丁未 西竺達摩來金陵之歲也. 是年 朗智法師亦始住靈鷲山開法 則大敎興衰 必遠近相感一時 於此可信 元和中 南澗寺沙門一念撰髑香墳禮佛結社文 載此事甚詳.
신라본기운 “법흥대왕즉위십사년 소신이차돈위법멸신.” 즉소량진통팔년정미 서축달마래금릉지세야. 시년 낭지법사역시주영취산개법 즉대교흥쇠 필원근상감일시 어차가신 원화증 남윤사사문일념선촉향분예불결사문 재차사심상.
신라본기(新羅本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에 하급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죽였다.”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서기 527)로 서천축(西天竺)의 달마(達摩)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였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에 머물면서 불법을 열었으니, 원화(元和) 연간(서기 806~820)에 남간사(南澗寺)의 스님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일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다.
其略曰 昔在法興大王垂拱紫極之殿 俯察扶桑之域 以謂‘昔漢明感夢 佛法東流 寡人自登位 願爲蒼生欲造修福滅罪之處.’ 於是朝臣[鄕傳云 工目謁恭等] 未測深意 唯遵理國之大義 不從建寺之神略. 大王嘆曰 “於戱 寡人以不德丕承大業. 上虧陰陽之造化 下無黎庶之歡 萬機之暇 留心釋風 誰與爲伴.
기략왈. 석재법흥대왕수공자극지전 부찰부상지역 이청‘석한명감몽 불법동류 과인자등위 원위창생욕조수복멸죄지처.’ 어시조신[향전언 공목알공등] 미측심의 유존리국지대의 불종건사지신약. 대왕탄왈 “어희 과인이부덕비승대업. 상휴음양지조화 하무여서지탄 만기지가 유심석풍 수여위반?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동쪽을 굽어 살펴보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한나라 명제(明帝) 꿈에 감응을 받아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부터 백성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고 싶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이[향전(鄕傳)에서는 공목(工目)과 알공(謁恭) 등이라고 한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따를 뿐 절을 세우려는 신령스런 생각을 따르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대왕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오호라! 과인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으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어그러뜨리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소. 그래서 정사를 보는 틈틈이 마음을 불교에 두었지만, 그 누가 과인과 함께 일을 할 수 있겠소?”
粤有內養者 姓朴字厭髑[或作異次 或云伊處 方音之別也 譯云厭也 髑頓道覩獨等 皆隨書者之便 乃助辭也. 今譯上不譯下 故云厭髑 又厭覩等也] 其父未詳 祖阿珍宗 卽習寶葛文王之子也.[新羅官爵凡十七級 其第四曰波珍飡 亦云阿珍飡也. 宗其名也 習寶亦名也 羅人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史臣亦云未詳 又按金用行撰阿道碑 舍人時年二十六 父吉升 祖功漢 曾祖乞解大王] 挺竹栢而爲質 抱水鏡而爲志 積善曾孫. 望宮內之爪牙 聖朝忠臣 企河淸之登侍.
오유내양자 성박자염촉[혹작이차 혹운이처 방음지별야 석운염야 촉순도도독등 개수서자지편내조사야. 금역상불역하 고운염촉 우염도등야] 기부미상 조아진종 즉습보갈문왕지자야.[신라관작범십칠급 디제사왕파진찬 역운아진찬야. 종기명야 습보역명야 라인추봉왕자 개칭갈문왕 기실사신역운미상 우안김용행찬아도비 사인시년이십육 부길숭 조공한 승조걸해대왕] 정죽백이위질 포수경이위지 적선증계. 망궁내지과아 성조충신 시하청지등시.
이때 마음 속으로 수양하는 자가 있었는데 성은 박씨이고 자는 염촉(厭髑)[혹은 이차(異次)라고도 하고 이처(伊處)라고도 하는데, 방언의 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역하면 염(厭)이라 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모두 조사이다. 윗글자는 번역하였지만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 한 것이다.]인데, 그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니, 바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신라의 관작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네 번째는 파진찬(波珍飡) 또는 아진찬(阿珍飡)이라고 한다. 종(宗)은 이름이고 습보(習寶)도 이름이다. 신라 사람들은 왕으로 추봉된 사람들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들도 잘 모른다고 하였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 이차돈)이 순교할 때의 나이는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이고 할아버지는 공한(功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 염촉은 대나무와 잣나무 같은 절개에 맑은 거울 같은 심지로 선행을 쌓은 집의 증손이었다. 그는 궁궐 안에서 왕을 보좌하는 신하가 되기를 바랐고, 또 거룩한 조정의 충신이 되어서 태평성대에 왕을 모시고 싶어 하였다.
時年二十二 當充舍人[羅爵有大舍小舍等 蓋下士之秩] 瞻仰龍顔 知情擊目 奏云 “臣聞古人問策蒭蕘. 願以危罪啓諮,” 王曰 “非爾所爲.” 舍人曰 “爲國亡身 臣之大節 爲君盡命 民之直義. 以謬傳辭 刑臣斬首 則萬民咸伏 不敢違敎.”
시년이십이 당윤사인[라작유대사소사등 개하사지질] 첨앙용안 지정격목 주운 “신문고인문책추요. 원이위죄계자.” 왕왈 “비이소위.” 사인왈 “위국망신 신지대절 위군진명 민지직의. 이요전서형신참수 즉만민함복 불감위교.
당시 나이가 22세였는데 사인(舍人)[신라의 관직에 대사(大舍)와 소사(小舍) 등이 있는데, 대체로 낮은 등급의 관직이다.]이 되었는데, 용안을 우러러보고 왕의 심정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나무꾼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이 큰 죄를 무릅쓰고 아뢰고자 합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인 염촉이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군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폐하의 말씀을 잘못 전하였다고 하여 신의 머리를 베시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서 감히 임금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王曰 “解肉枰軀 將贖一鳥 酒血摧命 自怜七獸 朕意利人 何殺無罪? 汝雖作功德 不如避罪.”
왕왈 해육평구 장속일조 주혈최명 자령칠수 짐의이인 하살무죄 여수작공덕 불여피죄.
왕이 말하였다. “옛날 시비왕은 자기 살을 베어 저울에 달아서 메추리를 쫓던 매에게 주어 그 메추리를 살렸다.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 일곱 마리의 짐승을 불쌍히 여겼노라. 짐의 뜻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쌓으려고 하지만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하다.”
舍人曰 “一切難捨 不過身命 然小臣夕死 大敎朝行 佛日再中 聖主長安.”
사인왈 “일절난사 불과신명 연소신석사 대교조행 불일재중 성주장안.”
그러자 사인이 다시 말하였다. “일체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 자신의 생명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이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불법이 아침에 행해질 수 있다면, 불법의 해가 다시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르고 임금님께서도 길이 편안하실 것이옵니다.”
王曰 “鸞鳳之子 幼有凌霄之心 鴻鵠之兒 生懷截波之勢 爾得如是. 可謂大士之行乎.”
왕왈 “난봉지자 유유능소지심 홍곡지아 생회절파지세 이득여시. 가위대사지행호.”
왕이 다시 말하였다. “난새와 봉황의 자식은 어려서도 하늘 위로 솟구칠 마음이 있고, 큰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도를 해칠 기세를 품는다고 하더니, 네가 바로 이와 같구나. 보살의 행실이라 할만 하도다!”
凌霄: 하늘을 치솟아 높이 날아오름
於焉大王權整威儀 風刀東西 霜仗南北 以召群臣 乃問 “卿等於我欲造精舍 故作留難?”[鄕傳云 “髑僞以王命 傳下興工創寺之意 群臣來諫. 王乃責怒於髑 刑以僞傳王命.”]
어언대왕권정위의 풍도동서 상장남북 이조군신 내문 경등어아욕조정사 고작유난[향전운 촉위이왕명 전하흥공창사지의 군신래간. 왕내책노어촉 형이위전왕명.”]
그리하여 대왕은 일부러 위엄스러운 모습을 하고, 동서로는 바람을 일으킬 것 같은 칼을 늘어놓고 남북으로는 서슬이 퍼런 형을 집행하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신하들을 불러서 물어보았다.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일부러 지체시켰는가?”[향전(鄕傳)에서는, “염촉이 왕명이라 속이어서 절을 지으라는 뜻을 전하자,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염촉을 문책하고는 왕명을 거짓으로 전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하였다.”라고 하였다.]
於是群臣戰戰兢懼 傯侗作誓 指手東西. 王喚舍人而詰之 舍人失色 無辭以對. 大王忿怒 勅令斬之 有司縛到衙下 舍人作誓 獄吏斬之. 白乳湧出一丈[鄕傳云 舍人誓曰 “大聖法王欲興佛敎 不顧身命 多劫結緣 天垂瑞祥 遍示人庶.” 於是其頭飛出 落於金剛山頂云云] 天四黯黲 斜景爲之晦明 地六震動 雨花爲之飄落.
오시군신전전극구 총통작서 지수동서 왕환사인이힐지 사인실색 무사이대. 대왕분노 칙령참지 유사박도아하 사인작서 옥리참지. 백유출일장[향전운 사인서왈 “대성법왕욕흥불교 불원신명다겁결연 대수단상 편시인서.” 어시기두비출 낙어금강산정운운] 천사암참 사경위지회명 지육진동 우화위지표락.
그러자 신하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황급히 맹세하며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은 사인을 불러서 꾸짖었고 사인은 낯빛이 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대왕은 분노하여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유사가 사인을 묶어 관아로 끌고 갔는데, 사인은 맹세하였고 옥리가 목을 베었다. 그때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향전(鄕傳)에서는, “사인이 맹세하기를 ‘위대하고 거룩하신 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시려고 하시니, 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속세에서 맺은 인연을 모두 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상서로운 조짐을 내리시어 사람들이 두루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날아 올라가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다.”라고 하였다.] 사방의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비낀 햇살마저 빛을 감추었고 온 땅이 진동하였으며 꽃비가 떨어졌다.
* 黯黲; 암울함
聖人哀戚 沾悲淚於龍衣 冢宰憂傷 流輕汗於蟬冕. 甘泉忽渴 魚鼈爭躍 直木先折 猿猱群鳴. 春宮鑣之侶 泣血相顧 月庭交袖之朋 斷腸惜別 望柩聞聲 如喪考妣. 咸謂‘子推割股 未足比其苦節 弘演刳腹 詎能方其壯烈? 此乃扶丹墀之信力 成阿道之本心 聖者也!“
성인애척 점비루어용의 총재우상 유경한어선면. 감천홀갈 어별쟁약 직목선정 원유군명. 춘궁표지여 읍혈상고 월정교수지붕 단장석별 망궤문성 여상고비. 함위자추할고 미족비기고절 홍연고복 거능방기장렬 차내부단지지신력 성아도지본심 성자야!”
왕이 몹시 슬퍼하며 눈물이 곤룡포를 적시자, 재상들도 걱정하면서 진땀이 모자 밖으로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 오르고, 곧은 나무도 먼저 꺾여서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태자의 궁궐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았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은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 듯 이별을 슬퍼하였으며, 관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모두들 “개자추(介子推)가 허벅지 살을 베어낸 것도 염촉의 고통스러운 절개에는 비교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염촉의 장렬함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임금님께서 불교를 믿는 힘을 도와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이룬 것이니, 성자로다!”라고 하였다.
* 弘演: 배를 갈라 위(衛)의 의공(懿公)의 간(肝)을 자기 배속에 넣었다 전해진다.
遂乃葬北山之西嶺[卽金剛山也 傳云頭飛落處 因葬其地 今不言何也] 內人哀之 卜勝地造蘭若 名曰刺楸寺. 於是家家作禮 必獲世榮 人人行道 當曉法利.
수내장북산지서령[즉금강산야 전운두비낙처 인장기지 금불언하야] 내인애지 복승지조난약명왈자추사. 어시가가작례 필획세영 인인행도 당효법리.
드디어 북산(北山)의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하는 말에 머리가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서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일까?]에 장사 지냈다. 대궐 사람들이 이 일을 슬퍼하여서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예를 올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도를 행하면 당연히 불법의 이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眞興大王卽位五年甲子 造大興輪寺[按國史與鄕傳 實法興王十四年丁未 始開 二十一年乙卯 大伐天鏡林 始興工. 梁棟之材 皆於其林中取足 而階礎石龕皆有之. 至眞興王五年甲子 寺成. 故云甲子 僧傳云七年 誤].
진흥대왕즉위오년갑자 조대흥륜사[안국사여향전 실법흥왕십사년정미 시개 이십일년을묘 대벌천경림 시흥공. 양동지재 개어기림중채취 이개초석감개유지. 지진흥왕오년갑자 사성. 고운갑자 승전운칠년 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인 갑자(서기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국사(國史)』와 향전(鄕傳)에 의하면 실은 법흥왕 14년 정미(서기 527)에 처음 터를 잡고 21년 을묘(서기 535)에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베어내어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둥과 들보의 재목은 모두 다 그 숲에서 충분히 가져다 썼으며, 주춧돌과 섬돌과 감실 등도 모두 갖추어졌다. 진흥왕 5년 갑자(서기 544)에 이르러서 절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갑자년이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서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를 지었다.
大淸之初 梁使沈湖將舍利 天嘉六年陳使劉思幷僧明觀奉內經幷次 寺寺星張 塔塔雁行 竪法幢 懸梵鐘. 龍象釋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薩出現於世[謂芬皇之陳那 浮石寶蓋 以至洛山五臺等是也] 西域名僧降臨於境. 由是倂三韓而爲邦 掩四海而爲家. 故書德名於天 衢之樹 影神迹於星河之水 豈非三聖威之所致也[謂阿道法厭髑也].
대청지초 양사심호장사리 천가육년진사유사병승명관봉내경병차 사사성장 탑탑안행 수법당현범종. 용상석도 위환중지복전 대소승법 위경국지자운. 타방보살출현어세[위분황지진나 부석보개 이지낙산오대등시야] 서역명승강림어경. 유시병삼한이위방 엄사해이위가. 고서덕명어천구지수 영신적어성하지수 기비삼성위지소치야[위아도법염촉야].
태청(大淸) 초년(서기 547)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를 가지고 왔고, 천가(天嘉) 6년(서기 565)에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으며,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았다. 뛰어난 고승들이 이 세상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법이 나라의 상서로운 구름처럼 감쌌다. 다른 지역의 보살이 이 세상에 나타났고,[분황사(芬皇寺)의 진나(陳那)와 부석사(浮石寺)의 보개(寶蓋)에서 낙산사(洛山寺)의 오대(五臺) 등에 이르기까지가 이것이다.]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강림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한이 합쳐져 한 나라가 되었고 온 세상이 합쳐져 한 집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덕 있는 이름은 천구(天)의 나무에 새겨지고, 그의 신성한 행적은 은하수에 비추어졌으니, 이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아도와 법흥과 염촉을 말한다.]
降有國統惠隆法主孝圓金相郞大統鹿風大書省眞怒波珍飡金嶷等 建舊塋 樹豐碑. 元和十二年丁酉八月五日 卽第四十一憲德大王九年也. 興輪寺永秀禪師[于時瑜伽諸德 皆稱禪師]結湊斯塚禮佛之香徒 每月五日 爲魂之妙願 營壇作梵.
강유국총혜륭법주효원김상랑대통녹풍대서성진노파진찬김억등 건구영 수풍비. 원화십이년정유팔월오일 즉제사십일헌덕대왕구년야. 흥륜사영수선사[우시유가제덕 개칭선사]결주사총예불지향도 매월오일 위혼지묘원 영단작범.
그 뒤에 국통(國統), 혜륭(惠隆), 법주(法主), 효원(孝圓), 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찬 김억(金嶷) 등이 염촉의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 이때가 원화 12년 정유(서기 817) 8월 5일이었는데, 바로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었다. 흥륜사의 영수선사(永秀禪師)[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스님들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불렀다.]가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모임을 만들고 매월 5일마다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어 법회를 열었다.
又鄕傳云 ‘鄕老每當忌旦 設社會於興輪寺.’ 則今月初五 乃舍人損軀順法之晨也. 嗚呼 無是君 無是臣 無是臣 無是功. 可謂劉葛魚水 雲龍感會之美歟.
우향전운 ‘향노매당기단 설사회어흥륜사.’ 즉금월초오 내사인손구순법지진야. 오호 무시군 무시신 무시신 무시공. 가위유갈어수 운룡감회지미여.
또 향전(鄕傳)에 ‘시골 노인들이 제삿날 아침이면 법륜사에서 모임을 가졌다.’라고 하였다. 이번 달 5일은 바로 사인이 목숨을 바쳐 불법을 따르던 날이었다. 아아, 이러한 군왕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하도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신하가 없었다면 이러한 공도 없었을 것이다.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감응하여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法興王旣擧廢立寺 寺成 謝冕旒 披方袍 施宮戚爲寺隷[寺隷至今稱王孫 後至太宗王時 宰輔金良圖信向佛法 有二女 曰花寶蓮寶 捨身爲此寺婢. 又以逆臣毛尺之族 沒寺爲隷. 二族之裔至今不絶] 主住其寺 躬任弘化.
법흥왕기거폐립사 사성 사면류 피방포 시궁척위사예[사예지금칭왕손 후지태종왕시 재보김양도신향불법 유이녀 왕화보연보 사신위차사비. 우이역신모척지족 몰사위예. 이족지예지금부절] 주주기사 숭임홍화.
법흥대왕이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일으켜 절을 세웠는데, 절이 세워지자 면류관을 벗고 승려의 옷을 입었으며, 궁궐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절의 종은 지금도 왕손이라고 불린다. 그 뒤 태종왕(太宗王) 시대에도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었는데, 두 딸이 있었으니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고 한다. 그는 두 딸을 절의 노비로 삼았다. 또 역적의 신하 모척(毛尺)의 가족도 절의 종으로 삼았다. 두 집안의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眞興乃繼德重聖 承袞職處九五 威率百僚 號令畢備. 因賜額大王興輪寺. 前王姓金氏 出家法雲 字法空[僧傳與諸說亦以王妃出家名法雲 又眞興王爲法雲 又以爲眞興之妃名法雲 頗多疑混]
진흥내계덕중성 승곤직처구오 위솔백료 호령필비. 인사액대왕흥륜사. 전왕성김씨 출가법운 자법공[승전여제설역이왕비출가명법운. 우진흥왕위법운 우이위진흥지비명법운 안다의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인 법흥왕의 덕을 이어 받고 왕위에 올라 위엄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호령을 갖추었다. 그래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이름은 법운(法雲)이며 자는 법공(法空)이다.[『승전(僧傳)』과 여러 설을 보면, 왕비도 출가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하였다. 그런데 진흥왕도 법운이고 진흥왕의 왕비도 법운이어서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많다.]
冊府元龜云 “姓募名秦 初興役之乙卯歲 王妃亦創永興寺. 慕史氏之遺風 同王落彩爲尼. 名妙法 亦住永興寺 有年而終.”.
책부원귀운 “성모명진 초흥역지을묘세 왕비역창영흥사 모사씨지유풍 동왕낙채위니. 명묘법 역주영흥사 유년이종.”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왕의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다. 처음 절을 짓기 시작하던 을묘년(서기 535)에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였다. 사씨(史氏)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과 같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은 묘법(妙法)으로 영흥사에 살았는데 몇 해 만에 죽었다.”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卒.”
국사운 “건복삼십일년 영흥사소상자괴 미기 진흥왕비비구니졸,”
『국사(國史)』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건복(建福) 31년(서기 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왕의 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巴刁夫人爲尼者之卒也.’ 乃創寺立像之主故也 二興捨位出家 史不書 非經世之訓也.
안진흥내법릉지질자. 비사도부인박씨 모량리영실각간지녀 역출가위니. 이비영흥사지창주야. 즉공진자당작법. 위‘법흥지비파도부인위니자지졸야.’ 내창사입상지주고야 이흥사위출가 사불서 비경세지훈야.
살펴보니, 진흥왕은 곧 법흥왕의 조카이다.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은 박씨로, 모량리(牟梁里) 영실(英失) 각간의 딸인데,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한 즉 진(眞)을 마땅히 법(法)으로 고쳐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법흥왕의 왕비 파도부인(巴刁夫人)이 비구니가 되어 죽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분이 바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두 왕이 모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사관이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又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熊川卽公州也 時屬新羅故也 然恐非丁未也. 乃中大通元年己酉歲所創也. 始創興輪之丁未 未暇及於他郡立寺也].
우어대통원년정미 위양제창사어웅천주 명대통사[웅천즉공주애 시속신라고야 연공비정미야. 내중대통원년기유세소창야. 시창흥륜지정미 미다급어타군입사야]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서기 527)에 양나라 황제가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창건하고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웅천은 곧 공주(公州)인데, 이 당시 신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미년은 아닌 것 같다. 중대통(中大通) 원년인 기유(서기 529)에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흥륜사를 처음 세운 정미년에는 다른 지방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다.]
讚曰 聖智從來萬世謀 區區輿議謾秋毫 法輪解逐金輪轉 舜日方將佛日高.
찬왈 성지종래만세모 구구여의만추호 법륜래축금륜전 순일방장불일고.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성인의 지혜는 예로부터 만세 앞을 계획하나니
구구한 의논들 털끝만큼도 못하다네.
법륜(法輪, 불법)이 풀려 금륜(金輪, 제왕)을 쫓아 구르니
태평성대가 불교로 인해 이루어지려네.
右原宗
우원종
위는 원종을 기리는 글이다.
徇義輕生已足驚 天花白乳更多情 俄然一劒身亡後 院院鍾聲動帝京
순의경생이족경 천화백유경다정 아연일검신망후 원원종성동제경
의(義)를 위해 목숨 버린 것도 놀라운데
꽃비 내리고 흰 젖 솟구치니 더욱 마음이 가는구나.
문득 한 칼에 몸은 이미 죽었지만
절마다 종소리가 서울을 뒤흔드는구나.
右厭髑.
우염촉.
위의 것은 염촉을 기리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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