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道基羅
[一作我道 又阿頭]
[일작아도 우아두]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 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신라본기제사운 제십구눌지왕시 사문묵호자자고려지일선군. 군인모례[혹작모록]어가중작굴실안치. 시양견사사의착향물[고득상영사시운 앵견사승왈원표 선송명단급경상] 군신부지기향명여기소용. 견인제향 편문국중 묵호자견지왕 차지위향야 분지즉향기분복 소이달성어신성 신성미유과어삼보 약소차발원 즉필유영응.”[눌지재진송지게 이운양견사 공오]
「신라본기(新羅本記)」 제4권에 언급하길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도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가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다. 그 당시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옷과 향[고득상(高得相)이 역사를 읊은 시에서, ‘양나라에서 승려 원표(元表)를 보내어서, 향과 불경과 불상을 보내왔다.’라고 하였다.]을 보냈는데,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사용처를 몰랐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면서 온 나라에 두루 물어보도록 하였는데,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데, 정성을 신성한 곳으로 이르도록 합니다. 신성한 것으로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면서 소원을 빈다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왕은 진나라와 송(宋)나라 시대에 살았으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時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시왕녀병혁 사소묵호자분향표서 왕녀지병심유. 왕희후사뢰황 아이부지소귀.
그 당시 왕의 딸이 위독하여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게 하였는데, 곧 병이 나았다. 왕은 기뻐하며 후하게 사례하였는데, 얼마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우지이십일비처왕시 유아도화상 여시자삼인 역랴모례가 의표사묵호자. 왕수년 무병이종 기시자삼인유주 강독경율 왕왕유신봉자[유주운 여본비급제전기수이 유고숭전운서축인 혹운종오래]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는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종 세 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毛禮)의 집으로 왔는데,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몇 년 동안 머물렀는데 병이 나지 않았는데도 죽었다. 그 시종 세 사람은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불경을 읽고 계율을 강독하였으니, 간혹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주(注)에서는 본비(本碑)와 여러 전기의 내용이 아주 다르다고 하였다. 또 고승전에서는 인도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한다.]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堀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掘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 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寺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王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 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발아도본비운 아도고려인야. 모고도영 정시간 조위인아[성아야]굴마봉사구려 사지이환. 인이유신. 사생오세 기모영출가 연십육귀위 성관굴마 투현창화상강하취업. 연십구 우귀영어모. 모위왈 ”차국우금부지불법 이후삼천여월 계림유성왕출 대흥불교.“ 기경도내유칠처가람지허. 일왈 금교동천경림[금흥륜사 금교위서천지교 속와호운송교야 사자아도시기이중폐 지법흥왕정미초창 을묘대개 진흥왕필성] 이왈삼천기[금영흥사 여흥륜사개동대‘ 삼왈용궁남[금황룡사 진흥왕계유시개] 사왈용궁북[금분황사 선덕갑오시개] 오왈사천미[금영묘사 선덕왕을미시개] 육왈신유림[금천왕사 문무왕기묘개] 칠왈서청전[금담엄사]. 개전불시가람지허 법수장유지지 이귀피이파양대교 당공향어석사의.”
아도의 본비(本碑)에 이르길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인데 정시(正始) 연간(서기 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堀摩)[성이 아(我)이다.]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녀와 정을 통하고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임신을 하였다. 아도가 태어나 5세가 되자 어머니가 아도를 출가시켰다. 나이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굴마를 찾아뵈었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나이 19세에 다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였다. “이 나라에서는 지금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000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거룩한 왕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수도 안에는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이다. 금교는 서천(西川)의 다리를 말한다. 세상에서는 송교(松橋)라고 잘못 부른다.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없어졌다가 법흥왕(法興王) 정미년(서기 527)에 시작해서 을묘년(서기 535)에 크게 일어났으며 진흥왕(眞興王) 때에 완성되었다.]이고, 둘째는 삼천기(三川歧)[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이고,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이다. 진흥왕 계유년(서기 553)에 처음으로 열었다.]이고,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갑오년(서기 634)에 처음 열었다.]이고,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년(서기 635)에 처음 열었다.]이고,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기묘년(서기 679)에 열었다.]이고,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모두 석가모니 이전의 절터로 불법이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면, 마땅히 불교의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도품교지계림 우지왕성서리 금엄장사. 우시미추왕즉위이년계미지 지궐청행교법 세이전소미견위혐 지유장살지자. 내도은우속림[금일선현]모록가[록여예형근지와 고기운 “법사초래모록가 시천지진경 시인부지승명이운아두삼마.” 삼마자내향언기칭승야 유언사미야].
아도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이르러 왕성 서쪽 마을에 머물렀으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 자리이다. 이때가 미추왕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인 계미년(서기 263)이었다. 아도는 대궐로 나아가 불법을 행하고자 하였지만 세상에서는 불법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꺼렸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그래서 곧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이다.]의 모록(毛祿)[녹(祿)은 례(禮)자와 모양이 비슷해서 잘못 쓴 것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으로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이름을 몰라서 아두삼마(阿頭彡麽)라고 하였다." 삼마는 우리말로 중을 말한다. 사미(沙彌)라 말하는 것과 같다.]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
三年 時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삼년 시성국공주질 무의불효. 칙사사방구의. 사솔연부궐 기질수리. 왕대열 문기소수 대왈 빈도백무서구 단원창불사어천경림 대흥불교 봉복방가이. 왕허지 명흥공. 속방질검 퍈모이옥 주이강연 시혹천화락지 호흥륜사.
3년에 당시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이나 의원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의원을 찾았다. 법사가 급히 대궐로 나아가자 병이 드디어 치료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원하는 것을 물어보자, 법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빈도(貧道, 승려가 자신을 낮추어 이름)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에 복을 달라고 기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라고 명을 내렸다. 풍속이 소박하고 검소했기 때문에 풀을 엮어서 집을 지었다. 법사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을 하였는데, 때때로 하늘의 꽃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한다.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모록지매명사씨 투사위니 역어산천기창사이거 명영흥사. 미기 미추왕즉위 국인장해지. 사환모록가 자작총 폐호자절 수불복현. 인차대교역폐.
모록의 누이동생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의탁해 비구니가 되었다. 또한 삼천기(三川歧)에도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는데 영흥사(永興寺)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이 왕위에 오르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살하였으니,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불법도 없어졌다.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驗矣.
지이십삼법흥대왕 이소량천감십삼년갑오등위 내응석씨 거미추왕계미지세이백오십이년. 도녕소언삼천여월험의.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서기 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켰으니, 미추왕 계미년(서기 263)부터 252년이 된다. 그러니 고도령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던 것이다.
據此 本記與本碑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在晉末大元之間. 則二道法師以小獸林甲戌到高麗 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 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근차 본기여본비이설상루부동여차 상시론지 양당이승전급삼국본사개재. 여제이국불교지시개진말대원지간 즉이도법사이소수림삽술지고려 명의 차전불오. 약이비처왕시방시도라 즉시아도유고려백제세내래야. 수대성행지 출몰불상 미필개이. 억역신라봉불 비만심여차.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다른 것이 이와 같다. 시험 삼아 비교해 보겠다. 양나라와 당나라의 두 고승전과 삼국의 본사에서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불교가 진나라 말 대원(大元) 연간(서기 376~396)에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순도와 아도 두 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년(서기 374)에 고구려에 도착한 것은 분명하니, 이 전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만약 비처왕(毗處王) 때 처음으로 신라에 이르렀다면, 즉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 100년이나 머물렀다가 온 셈이다. 비록 위대한 성인의 행동거지는 세상에 나왔다 숨었다 하는 것이 평범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반드시 모두 다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신라가 불교를 받든 것이 이처럼 늦지도 않았을 것이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우약제미추지세 즉각초선어도려갑술백여년의. 우시계림미유문물에교 국호유미정 하가아도래청봉불지사 우불합고려미도이월지우라야. 설사서흥환폐 하기간적요무문이상불식향명재 일하대후 일하대선.
또한 만약 미추왕의 시대라면 고구려에 왔다는 갑술년(서기 374)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게 된다. 그 당시 계림에는 문물(文物)과 예교(禮敎)가 없었고 나라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법을 받들라고 청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고구려에 오지 않았는데 고구려를 뛰어넘어 신라에 도착했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이다. 설사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폐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그 사이가 적막하여서 듣지도 못하였고 또 향의 이름도 몰랐단 말인가? 그 하나는 너무나 연대가 늦고, 또 그 하나는 너무나 연대가 빠르다.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晉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규부동점지세 필시우려제이종호라. 즉눌지기여소수림상접야. 하도지사여저라. 의재눌지지세 우왕녀구병 개전위아도지사 즉소위묵호자비진명애 내지목지사. 여양인지살마위벽안호 진조석도안위칠도인류야.
생각해 보건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된 형세는,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한 즉 눌지왕의 시대는 이미 소수림왕의 시대와 서로 접해 있었다.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도착한 것은 마땅히 눌지왕의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왕의 딸이 병을 고친 것도 모두 다 아도의 일이라고 전해져 왔으니, 그렇다면 묵호자라는 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곧 지목한 말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양나라 사람들은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로서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왕자였다)라고 하며 진나라 사람들이 도안(道安) 스님을 칠도인(柒道人)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乃阿道危行避諱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내아도위행피위이불언명성고야 개국인수기소문 이묵호아도이명분작이인위전이. 황운아도의표사묵호 즉이차가험기일인야.
곧 아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느라 꺼려하여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묵호와 아도가 두 사람이라고 여기어서 따로따로 전기를 썼던 것이다. 하물며 아도의 모습이 묵호와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이 말로 그들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無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贋難詳.
도녕지서칠처 즉이상개선후예언지. 양전실지 고금이사천미적어오차. 삼천여월 미필진신. 개자눌지지세 저호정미 무려일백여년 약왈일천여월 즉태기의. 성아단명 의안난상.
그리고 고도녕이 차례로 말한 일곱 곳은 단지 절을 창건하는 순서를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두 전(傳)이 없어져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올려놓았다. 3,000여 달이라는 말도 반드시 모두 다 믿을 수는 없다. 대체로 눌지왕의 시대부터 정미년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00여 년이나 되지만, 만일 1,000여 달이라 한다면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성이 아(我)이고 이름이 외자인데, 의심스럽지만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賚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蓋高麗聞道之始也.
우안원위석담시[일운혜시]전운 시관중인자출가이후 다유이적 진효무태원구년말 뢰경율수삽부 왕요동선화. 현수삼승 입이귀계 갸고려문도지시야.
또 원위(元魏) 시대의 승려 담시(曇始)[혜시(惠始)라고 된 것도 있다.]의 전기를 살펴보니, 이러한 기록이 있다.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이었는데 출가한 이후부터 신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서기 384) 말에 불경과 율서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삼승(三乘)을 가르쳐주고 그 자리에서 불교의 계율에 귀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의 도를 듣게 된 시초였다.
義熙初 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凶奴赫連勃勃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普赦沙門 悉皆不殺.
의희초 복환관중 개도삼보. 시족백어면 수보니수 미상점습 천하함칭백족화상운. 진말 역방흉흉노혁련발발파획관중 참륙무수. 시시역우해 고불능상. 발발차환지 진사사문 실개불살.
의희(義熙) 초년(서기 405)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 중앙지역)에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으며, 비록 흙탕물을 건넌다 해도 발이 젖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진 말에 북쪽의 흉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깨뜨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당시 담시도 화를 당하였지만 칼날이 그를 해치지는 못하였다. 발발이 감탄하여서 중들을 널리 용서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僞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시어시잠눈산택 수두타행. 탁발도복극장안 천위관낙. 시유벅릉최호 소습좌도 시질석교. 기위거위보 위도소신. 내여천사구겸지설도 불교무익 유상민리 권영폐지운운.
담시는 몰래 산으로 숨어서 동냥하며 수행하였다. 탁발도(拓拔燾)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까지 위세를 떨쳤다. 당시에 박릉(博陵)의 최호(崔皓)가 도교를 조금 배웠는데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최호는 지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러서 탁발도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도교의 교주인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여, 불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백성들의 이익을 해칠 뿐이라며, 불교를 없애자고 권하였다고 한다.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 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後不知所終.
태평지말 시방지도장화시지 내이원회지일 홀장석도궁문. 도문영참지. 누불상 도자참지 역무상. 사북원소양호 역불감근 도대생참구 수감여질. 최구이인상차발악병. 도이과유어피 어시주멸이가문족. 선하국중 대홍불법 시후부지소종.”
태평(太平) 말년(서기 450)에 담시는 탁발도를 불교로 교화시킬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곧 정월 초하룻날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렀다.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들은 탁발도는 담시를 베어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러 번 베어도 담시를 다치게 할 수 없었고, 탁발도 자신이 직접 베었지만 역시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북쪽 동산에서 기르던 호랑이에게 물게 하였지만 역시 호랑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탁발도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는데, 결국 나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독한 질병에 걸렸다. 탁발도는 그 잘못이 저 두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두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나라 안에 명하여 불법을 크게 펼치도록 하였다. 담시는 그 뒤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議曰 “曇始以太元末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의왈 “담시이태원말도해동 의희초환관중 즉유차십여년 하동사무문? 시기회궤불특지인 이여아도묵호난타연사상동 삼인중의일필기변위야.”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 말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 초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 땅에 10여 년을 머물러 있었던 것인데, 어떻게 우리 역사에 아무 기록이 없을까? 담시는 매우 괴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어서 아도, 묵호, 난타 등과 그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필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雞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찬왈 설옹금교동불개 계림춘색미전회 가령청제다재사 선착모랑댁이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금교에 눈이 쌓이고 얼음은 풀리지 않으니
계림의 봄빛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다네.
어여뻐라,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毛郞)의 집 매화 먼저 피게 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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