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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二 奇異 券二- 後百濟 甄萱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光啓中 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 皆知名於世 萱號傑出 多智略.

삼국사본전운견훤상주가은현인야 함통팔년정해생 본성이 후이견위씨. 부아자개 이농자활 광계중 거사불성[금상주] 자칭장군 유사자. 개지명어세 훤호걸출 다지략.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서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서기 867)에 태어났는데,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연간(서기 885~887)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이다.]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세상에 이름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걸출하고 지략이 많았다.

 

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 諡曰白?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 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爲阿慈介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蓋 四子寶蓋 五子將軍小蓋 一女大主刀金.”

이제가기운 진흥대왕비사도 시왈백융부인. 제삼자구륜공지자 파진간선품지자각간작진. 처왕교파리 생각각원선 시위아자개야. 자지제일처상원부인 제이처남원부인. 생오자일녀 기장자시상보훤 이자장군능애 삼자장군용개 사자보개 오자장순소개 일녀대주도금.”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왕비인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夫人)이다. 셋째 아들은 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은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고, 선품의 아들은 각간(角干) 작진(酌珍)이다. 작진의 아내 왕교파리(王咬巴里)가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다. 51녀를 두었는데, 그 장자가 바로 상보(尙父) ()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又古記云 昔一富人 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墻下 針刺於大蚯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 自稱甄萱. 至景福元年壬子稱王 立都於完山郡 理四十三年. 以淸泰元二年乙未 萱之三子纂逆 萱投太祖. 子神劍卽位 天福元年丙申 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 百濟敗績 國亡云.”

우고기운 석일부인 거광주북촌 유일여자 자용단정 위부왈 매유일자의남도침교혼. 부위왈 여이장사관침자기의 종지.’ 지명심사어북장하 침자어대구인지요. 후인임생일남 년십오 자칭견훤. 지경복원년임자칭왕 입도어완산군 리사십삼년. 이청태원이년을미 훤지삼자찬역 훤투태조. 자신검즉위 천복원년병신 여고려병외전어일선군 백제패속 국망운.

 

또 고기(古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어떤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있었으니 자태와 용모가 매우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침실에 와서 함께 자곤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서 그 자의 옷에 꽂아두어라.’라고 하였고, 딸은 그렇게 하였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실을 찾았는데,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 후에 임신을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불렀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서기 892)에 왕이라 일컬었고, 완산군(完山郡)에 수도를 정하고 43년을 다스렸다. 청태(淸泰) 원년 갑오(서기 934)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아들 신검(神劍)이 왕위에 올랐지만, 천복(天福) 원년 병신(서기 936)에 일선군(一善郡)에서 고려 군사와 싸웠는데, 백제가 패하자 나라가 망하였다.”

 

初 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초 훤생유보시 부경우야 모향지 이아치우림하 호래유지. 향당문자이언. 급장체모웅기 지기척당불범. 종군입왕경 부서남해방수 침과대적 기기항위사졸선 이노위비장.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았고 어머니는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기를 수풀 아래 놓아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체격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기개가 뛰어나고 비범하였다. 군인이 되어 서울 경주에 들어갔는데, 서남쪽 바닷가를 지킬 때는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릴 정도로 그 기백이 항상 사졸들보다 앞섰기에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國權 綱紀紊弛 加之以飢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萱竊有叛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南都統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 龍紀元年己酉也 一云景福元年壬子.

당조종경복원년 시신라진성왕재위육년 폐수쟈측 절롱국권 강기문이 가지이기근 백성유이 군도봉기. 어시훤절유반심 소취도려 행격경서남주현 소지향응 순월지간 중지오천. 수습무진주자왕 유불감공연칭왕. 자서위신라서남도통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국개국공. 용기원년기유야 일운경복원년임자.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오른 지 6년째가 된다. 총애 받는 신하들이 임금님 곁에 있으면서 몰래 국권을 농락하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해이해졌으며, 여기에 기근까지 더해지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러자 견훤은 남몰래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먹고, 무리를 모아 경주의 서남쪽 주와 현을 공격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사이에 군사가 5천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습격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를 신라서남도통(新羅西南都統)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어사중승(兼御史中承) 상주국(上柱國) 한남국개국공(漢南國開國公)이라고 하였다. 이때가 용기(龍紀) 원년 기유(서기 889)였는데, 경복 원년 임자(서기 892)라고도 한다.

 

是時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喜得人心 謂左右曰 百濟開國六百餘年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舡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 卷土歷黃山.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予今敢不立都 以雪宿憤乎?”

시시북원적양길웅강 궁예자투위휘하. 훤문지 요수양길직위비장. 훤서순지완산주 주민영노. 희득인심 위좌우왈 백제개국육백여년 당고종이신라지청 견장군소정방 이강병십삼만월해 신라김유신 권토역황산. 여당병합공백제멸지 여금감불립도 이설숙분호?”

 

당시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이 강성하여서 궁예(弓裔)는 제 스스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를 듣고는 멀리서 양길에서 직책을 내려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 이르렀는데,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며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백제가 나라를 연 지 600년 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넜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땅을 휩쓸며 황산(黃山)을 지나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하니 내 지금 감히 수도를 세워 원한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수자칭후백제왕 설관분직. 시당광화삼년 신라효공왕사년야.

 

이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라고 칭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으로 신라 효공왕(孝恭王) 4(서기 900)이다.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 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정명사년무인 철원경중심홀변 추재아태조즉위 훤문지 견사칭하 수헌공작선지리산죽전등. 훤여아태조 양화음극 헌총마어태조.

 

정명(貞明) 4년 무인(서기 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갑작스럽게 변하여 우리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면서 공작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견훤이 우리 태조와 속으로는 상극이었지만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척해서 좋은 말을 바치기까지 하였다.

 

同光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 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爲外甥眞虎交質.

동광삼년동시월 훤솔삼천기 지조물성[금미상]. 태조역이정병해여지각 훤병예 미결승부. 태조역권화 이노기사 이서걸화. 이당제왕신위질 훤역이위외생진호교질.

 

동광(同光) 3(서기 925) 겨울 10월에는 견훤이 3,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에 이르렀다. 태조도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싸웠으나 견훤의 병사가 날쌔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없었다. 태조는 임시로 화친하여서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 목적으로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내자, 견훤도 외손주 진호(眞虎)를 볼모로 삼아 서로 교환하였다.

 

十二月 攻取居西[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思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십이월 공취거서[금미상]제이십여성. 견사입후당칭번. 당책수검교대위겸시중판백제군사 의전도독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사백제왕 식읍이천오백호.

 

12월에 견훤이 거서(居西)[지금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2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리고 사신을 후당(後唐)에 보내어 번국(藩國)이라 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에서 검교태위(檢校太尉) 겸시중(兼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에 제수하고, 예전처럼 도독행전주자사(都督行全州刺史)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사(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思事) 백제왕을 지내게 하고 식읍을 2,500호로 하였다.

 

四年 眞虎暴卒 疑故殺 卽囚王信. 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사년 진호폭졸 의고살 즉수왕신. 사인청환전년소송총마 태조소환지.

 

4(서기 926)에 견훤의 사위 진호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였다고 의심하고는 그 즉시 왕신(王信)을 가두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지난 해에 보냈던 말을 돌려달라고 하자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주었다.

 

天成二年丁亥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 新羅王求救於太祖 太祖將出師 萱襲取高鬱府[今蔚州] 進軍族於始林[一云鷄林西郊] 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 由是甚敗. 萱强引夫人亂之 以王之族弟金傅嗣位. 然後虜王弟孝廉 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 兵仗 子女 百工之巧者 自隨以歸.

천성이년정해구월 훤공취근품성[금산양현]소지. 신라왕구구어태조 태조장출사 훤습취고울부[금울주] 진군족어시림[일운계림서교] 졸입신라왕도. 신라왕여부인출유포석정시 유시심패. 훤강인부인난지 이왕지족제김부사위. 연후노왕제효렴 재상영경 우취국탕진보 병장 자녀 백공지교자 자수이귀.

 

천성(天成) 2년 정해(서기 927)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이다.]을 공격하여 빼앗고 성에 불을 질렀다.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태조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이다.]를 습격하여 빼앗고 시림(始林)[계림 서쪽 교외라고도 한다.]으로 진격하여 순식간에 신라의 수도까지 들어갔다. 신라왕과 왕비는 포석정(鮑石亭)에 나와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더욱 크게 패하였다. 견훤은 부인을 끌어다 난행을 하고, 왕의 친척 동생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그런 연후에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나라의 보물과 병기를 빼앗고 자녀들과 기술이 뛰어난 장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 申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其貫.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縣]京山府康州 攻缶谷城. 又義成府之守洪述 拒戰而死 太祖聞之曰 吾失右手矣.

태조이정기오천 요훤어공산하대전 태조지장김락 신숭겸사지 제군패배 태조근이신면. 이불여상저 사영기관. 훤승승전략대목성[금약목현]경산부강주 공부곡성. 우의성부지수홍술 거전이사 태조문지왈 오실우수의.”

 

태조는 정예 기병 5,000으로 공산(公山)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지만,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전사하였고 모든 군대가 패하여 태조만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견훤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그가 맘대로 하도록 둘 수밖에 없었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성(大木城)[지금의 약목현(若木縣)이다.]ㆍ경산부(京山府)ㆍ강주(康州) 등을 약탈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의 태수 공술(洪述)은 항전하였지만 전사하였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나의 오른팔을 잃었구나!”

 

四十二年庚寅 萱欲攻古昌郡[今安東] 大擧而石山營寨. 太祖隔百步 而郡北甁山營寨. 累戰萱敗 獲侍郞金渥. 翌日萱收卒襲破順城州城 城主元逢不能禦 棄城宵遁. 太祖赫怒 貶爲下枝縣[今豊山縣 元逢 本順州城人故也].

사십이년경인 훤욕공고창군[금안동] 대거이석산영채 태조격백보 이군북병산영채 누전훤패획시랑김악. 익일훤수졸습파순성주성 성주원봉불능어 기성소둔. 태조혁노 핍위하지현[금풍산현 원봉 본순주성인고야]

 

42년 경인(庚寅)에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安東)이다.]을 공격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석산(石山)에 진을 쳤다. 태조도 100보쯤 떨어져서 그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웠지만 견훤이 패하였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포로가 되었다. 그 다음날 견훤이 병사들을 수습하여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깨뜨리자, 성주 원봉(元逢)이 막아내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을 쳤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서 순주를 하지현(下枝縣)[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다. 원봉이 본래 순주성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으로 강등시켰다.

 

新羅君臣 以衰季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萱聞之 又欲入王都作惡 恐太祖先之. 寄書于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鸚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奸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 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신라군신 이쇠계난이부흥 모인아태조결호위원. 훤문지 우욕입왕도닥악 공태조선지 기서우태조왈 작자국상김웅겸등 장소족하입경 유동별응원성 시욕양피준익 필사샹령도탄 종사구허. 복시이선착조편 독취한월 서백료여교일 유육부이의풍. 불의간신둔도 방군훙변. 수봉경명왕표재헌강왕지외손 권즉존위 재조위방 상군유군 어시호재.

 

신라의 여러 신하들은 나라가 쇠약해져서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기고, 우리 태조를 맞아들여서 우호관계를 맺고 구원을 받고자 하였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 수도를 공격하여 포악한 짓을 하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먼저 경주에 들어갈까봐 걱정이 되어서 였다. 그래서 태조에게 글을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신라 재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그대를 수도로 불러들이려 한다고 하니, 이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 소리에 대응하는 것과 같고 작은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사직을 폐허로 만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내가 먼저 어질지 못한 자를 쳐서, 모든 신하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의로운 풍모로 육부의 백성들을 타일렀소. 그런데 뜻밖에 간신은 도망을 치고 나라의 임금은 죽는 변고가 있었소. 그래서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동생이자 헌강왕(獻康王)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임금 없는 나라에 임금이 다시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소.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曝骸於美利寺前. 殺獲居多 追禽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족하물상충고 도청유언 백계규유 다방침요. 상불능견복마수 발복우모. 동초 도두색상속수어성산진하 월내 좌장김락폭해어미리사전. 살획거다 추금불소. 강리약차 승패가지. 소기자 괘궁어평양지루 음마어패강지수,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유언비어만 듣고서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면서 다방면으로 침략을 하고 있소. 그렇지만 아직도 나의 말 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내 소의 털도 뽑지 못하였소. 초겨울에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지 밑에서 붙잡혔고, 이번 달에는 좌장군 김낙(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죽었소. 죽이고 얻은 것도 많고 추격하여 사로잡은 자도 적지 않소.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다면 승패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和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연이전월칠일 오월국사반상서지 전왕조지. 지경여고려 구통화호 공계인맹 비인질자지양망 수실화친지구호 호침강경 불즙간과. 금전발사신 부경본도 우이문고려 의각상친비 영부우휴.

 

그런데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편지를 전하였소. 그 편지에서는 경은 고려와 오랫동안 화친을 맺고 서로 이웃나라로서 맹약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양국의 볼모가 죽자 드디어 옛날의 우호적인 관계를 깨고 서로 국경을 침략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전담할 사신을 경의 본도에도 보내고 고려에도 보내어서,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 영원히 평화롭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소.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兎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誡 無後悔之自貽.

복의독존왕 정심사대 금문조유 즉욕지승. 단려족하욕파불능 곤이유투. 금록조서기정 청유심상실 차토로실비 종필이기 방휼상지 역위소소. 의미복지위계 무후회지자이.

 

나는 의리로서 왕을 높이고 사대의 정을 깊이 해왔으므로 이 편지를 보고 즉시 받들어 행하려고 하였소.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자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곤란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오. 지금 이 편지를 써서 부치니 바라건대 유의해서 상세히 살피기를 바라오.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결국은 농부에게 모두 붙잡히게 되어 반드시 조롱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처럼 서로 버틴다면 역시 어부에게 둘 다 잡혀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땅히 끝까지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을 경계로 삼아 다시는 후회를 스스로 불러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오.”

 

天成二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班尙書所傳詔旨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 爰到制書 尺素好音 兼蒙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袵.

천성이년정월 태조답왈 복봉오월국통화사반상서소전조지서일도 겸몽족하욕시장서서사자 복이화초부사 원도제서 척소호음 겸몽교회. 봉지검이수증감격 벽화전이난견혐의. 금탁회헌 첩부위임.

 

천성(天成) 2(서기 927) 정월에 태조가 편서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오월국 사신 반상서가 보낸 편지도 받았고 그대가 길게 써서 보낸 편지도 받았고 또 사신이 편지와 좋은 소식을 가져왔고 아울러 그대의 가르침도 받았소. 오월국 왕의 편지를 보고 감격스러웠지만 의심스러운 점도 피하기는 어려웠소. 지금 돌아가는 사신에게 내 심정을 말하려 하오.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其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爲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복앙승천가 부박인추 과도장수지권 획부경륜지회. 경이삼한액회 구토흉황. 검려다속서황건 전야무비기적토. 서기미풍진지경 유이구방국지재 원자선린 어위결호. 과견수천리농상악업 칠팔년사졸한면,

 

 

나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추대되어,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맡아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소. 지난번 삼한(三韓)에 액운이 들어 전국에 흉년이 들었고 많은 백성들이 도둑떼가 되었으며, 논밭은 황무지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소. 그래서 전쟁의 위험을 없애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고자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려고 우호관계를 맺었소. 그랬더니 과연 수천 리의 농민이 생업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7~8년 간 병사들이 한가하게 쉴 수 있었소.

 

及至乙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乃交兵. 足下始輕敵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卽我有大德於南人也.

급지을유년 유시양월 홀언생사 지급교병. 족하시경적이직전 약당랑지거철 종기난이용퇴 여문자지부산. 공수진사 지천작서 금일지후 영세환화 구혹투맹 신기극의.’ 복역상지과지무 기불살지인 수해중위 이휴피졸 불사질자 단욕안민. 차즉아유대덕어남인야.

 

그런데 을유년(서기 925) 10월에 이르러 갑자기 일이 생겨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소. 그대는 처음에 적을 가볍게 여겨 곧바로 진격하기를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처럼 하다가,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하게 후퇴하기를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 같았소. 그대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말을 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영원히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만일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소. 나도 또한 전쟁을 그치게 하는 무()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을 지키기 위해, 드디어 겹겹이 에워싼 포위를 풀어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볼모를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소. 이는 다만 백성들이 편안해지기만을 바란 것이오.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오.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急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奸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社稷.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무리가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과 같은 독으로 백성들을 해치고, 이리와 호랑이 같은 미친 짓으로 경주 주변을 가로막고 신라의 궁궐을 어려운 상태에 빠뜨려 왕궁을 놀라게 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대의를 지켜 주나라를 높이는데 있어서 누가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이 이룬 패업(覇業)만 하겠소? 기회를 엿보며 한나라를 차지하려던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같은 간사한 자만 보았을 뿐이오. 지극히 존귀한 신라의 왕을 굽혀서 그대에게 아들이라 부르게 하였으니, 높고 낮음이 그 차례를 잃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걱정하게 하였소. 그러니 크게 보필하는 충성과 순수함이 없다면 어찌 다시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소?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主 焚燒宮闕 葅醢卿佐 虔劉士民 姬妾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相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이복심무닉악 초절존왕 장원치어조정. 사부위어방국 족하견호리지소리 망천지후은 참륙군주 분소궁궐 저해경좌 건유사민 희첩즉취이동거 진보즉탈지상재 원악부어걸주 불인심어경효.

 

나의 마음은 사악함이 없고 나의 뜻은 간절히 신라 왕실을 높여서, 장차 조정을 안정시키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제하려고 하였소. 그런데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망각하여 임금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으며,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군사와 백성을 살해했으며 궁녀는 잡아서 수레에 태웠고 보물은 약탈해 수레에 실었소. 그 포악함은 폭군 걸()과 주()보다 더 하였고 잔인함은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올빼미보다도 더 심하였소.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約効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激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卿於海岸 積甲如山 禽雛造於城邊 伏屍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疑伊山郡]城邊 戮隨晤於纛下 拔任存[今大興郡]之日 刑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川縣[尙州領內縣名]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今桐華寺]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心 竟息風波 永淸寰海.

복원극붕천 성심각일 약효응전지축 이신견마지근 재거간과 양경괴류. 육격즉뇌치전격 수공즉호박용등 동필성공 거무허발 축윤경어해안 적갑여산 금추조어성변 복시폐야 연산군반 참길환어군전 마리[의이산군]성변 육수오어독하 발임존[금대흥군]지일 형적등수백인연구 파청천현[상주영냐현명]지시 작심등사오배수수. 동수[금동화사]망기이궤산 경산형벽이투항 강주즉 자남이래 라부즉가서이속. 침공약차 수복영요? 필기저수영중 설장이천선지한 오강안상 성한왕일첩지심 경식풍파 영청환해.

 

나의 원한은 신라왕이 죽자 극에 달하여, 크나큰 정성으로 큰 매가 참새를 쫓듯이 개와 말이 충정을 다하듯이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되었소. 땅에서 공격할 때는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듯이 재빨랐고 물에서 공격할 때는 호랑이가 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군대를 일으키면 헛수고한 적이 없었소. 윤경(尹卿)을 바닷가에서 추격할 때는 갑옷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추조(雛造)를 성 부근에서 잡았을 때는 시체가 들판을 덮었으며,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대 앞에서 목 베었고, 마리성(馬利城)[이산군(伊山郡)인 듯하다.] 주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에서 죽였으며, 임존성(任存城)[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이다.]을 뿌리 뽑은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청천현(淸川縣)[상주(尙州) 영내의 현 이름이다.]을 깨뜨렸을 때는 직심(直心) 4~5명이 머리를 거뒀소. 동수(桐藪)[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다.]에서는 깃발만 바라보고도 궤멸되어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항복했고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했으며, 나부(羅府)는 서쪽으로부터 예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복하는데 어찌 오랜 시간이 걸리겠소? 반드시 저수(泜水)의 군대에서 장이(張耳)의 천 가지 원한을 씻어주고, 오강(烏江)의 언덕에서 한왕(漢王)이 한 번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풍파가 그치고 영원히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謨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唯副上國之仁恩 抑亦可紹東海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書乃崔致遠作也].”

천지소조 명욕하귀? 황승오월왕전하 덕흡포황 인신자소 특출윤어단금 유즙난어청구. 기봉훈모감불존봉? 역족하지승예지 슬즙흉기 불유부상국지인은 억역가소동해지절서. 약불과이능개 기여회불가추.”[선내최치원작야]

 

하늘이 돕거늘 천명이 어디로 귀결되겠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이 먼 지방까지 미치고 어짊으로 백성들까지 깊이 사랑하시어, 특별히 대궐에서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에서 전쟁을 그치라고 하였소. 이미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 만일 그대도 이 글을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잘못을 하였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捉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日 取鹽白眞三州船一百艘 焚之而去云云.

장흥삼년 견훤신공직 용이유지략 래항태조. 훤착공직이자일녀 낙단고근. 추구월 훤견일길 이강병입고려예성강 유삼일 취염백진삼주선일백수 분지이거운운.

 

장흥(長興) 3년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이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어버렸다. 가을 9월에 견훤이 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으로 고려의 예성강(禮城江)에 침입하여 3일 동안 머물면서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진주(眞三) 세 주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태우고 돌아갔다고 한다.

 

淸泰元年甲午 萱聞太祖屯運州[未詳] 遂簡甲土 蓐食而至. 未及營壘 將軍黔弼以勁騎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 醫者之謙勇將尙達崔弼等 降於太祖.

청태원년갑오 훤문태조둔운주[미상] 수간갑사 욕식이지. 미급영루 장군검필이경기격지 참뢱삼천여급 웅진이북삼십여성 문풍자항. 훤휘하술사종훈 의저지겸용장상달최필등 항어태조.

 

청태 원년 갑오(서기 934)에 견훤이 태조가 운주(運州)[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하였다는 것을 알고 정예병을 뽑아서 새벽 일찍 밥을 먹고 떠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군영에 이르기도 전에 장군 검필(黔弼)이 날랜 기병으로 공격하여서 3,000여 명을 베어 죽였다. 그러자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이 소문을 듣고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인 술사 종훈(宗訓)과 의원 지겸(之謙), 그리고 용감한 장수인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등도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丙申正月 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 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 尙爾不利 殆天假手爲高麗. 盍歸順於北王 保首領矣?” 其子神劒龍劒良劒等三人皆不應.

병신정월 훤위자왈 노부신라지계 입후백제명 유년우금의 병배어북군 상이불리 태천가수위고려 개귀순어북왕 보수영의?” 기자신검용검양검등삼인개불응.

 

병신년(서기 936) 정월에 견훤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병사가 북군보다 배나 많은 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도와주는 것 같구나.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아들 신검(神劒)ㆍ용검(龍劒)ㆍ양검(良劒) 등 세 사람이 모두 듣지 않았다.

 

李磾家記云 萱有九子 長曰神劒[一云甄成] 二子太師謙腦 三子佐承龍述 四子太師聰智 五子大阿干宗祐 六子闕 七子佐承位興 八子太師靑丘 一女國大夫人 皆上院夫人所生也.

이제가기운 훤유구자 장왈신검[일운견성] 이자태사염뇌 삼다좌승용술 사자태사총지 오자대아간종우 육자궐 칠자좌승위흥 팔자태사청구 일여국대부인 개상원부인소생야.”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이렇게 기록되길 견훤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신검[견성(甄成)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태사(太師) 염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 째는 궐(), 일곱 째는 좌승 위홍(位興), 여덟째는 태사 청구(靑丘)이고, 딸 하나는 국내부인(國大夫人)으로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이 낳았다.”

 

萱多妻妾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位. 其兄神劒良劒龍劒知之憂憫.

훤다처첩 유자십여인 제사자금강 신장이다지 훤특애지 의역전위. 기형신검양거용검지지우민.

 

견훤은 첩이 많아 아들이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서 견훤이 특별이 사랑하여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 형인 신검과 양검, 그리고 용검이 이를 알고 걱정하고 있었다.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飡能奐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謀. 至淸泰二年乙未春三月 與英順等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赦境內.

시영검위강주도독 용검위무주도독 독신검재측. 이찬능환사인왕가무이주 여양검등모. 지청태이년을미춘삼월 여영순등권신검 유훤어금산불우 견인살금강. 신검자칭대왕 사경내.

 

당시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이었고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이어서, 신검만이 견훤 옆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 두 곳에 보내, 양검 등과 몰래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청태 2년 을미(서기 935) 3월에 영순(英順)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서,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신검이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는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용서해 풀어 주었다.

 

初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是何聲歟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劒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초훤침미기 요문궁정호함성 문시하성여 고부왈 왕연노 암어군국정요 장사신검섭부왕위 이제장환하성야. 아이부어금산불우 이파달등장사삼십인수지.

 

애초에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사 불당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童謠曰 可憐完山兒 失父涕連洒.

동요왈 가련완산아 실부체연쇄.

 

이 당시 이러한 동요가 있었다. 불쌍하구나 완산(完山) 아이 아비 잃고 눈물 흘리네.

 

萱與後宮年少男女二人 侍婢古比女 內人能又男等囚繫. 至四月 釀酒而飮醉卒三十人 而與小元甫香乂吳淡忠質等以海路迎之. 旣至 以萱爲十年之長 尊號爲尙父 安置于南宮 賜楊州食邑田庄 奴婢四十口 馬九匹 以其國先來降者信康爲衙前.

훤여후궁년소남여이인 시비고비녀 내입능우남들수계. 지사월 양주이음취졸삼십인 이여소원보향애오담충질등이해로영지 지기 이훤위십년지장 존호위상보 안치우남궁 사영주식음전장 노비사십구 마구필 이기국선래항자신강위어전.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과 시녀 고비녀(古比女), 나인 능우남(能又男) 등과 갇혀 있었다. 4월이 되자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을 취하게 하고 탈출하였다. 태조는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 오담(吳淡), 충질(忠質) 등에게 바닷길로 가서 견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이미 견훤이 도착하자, 태조는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많다고 하여 상보(尙父)라고 부르며 남궁(南宮)에 모시고, 양주(楊州)의 식읍전장과 노비 40, 9필을 주고, 그 나라에 먼저 와서 항복한 신강(信康)을 아전으로 삼았다.

 

甄萱婿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以家人之禍 失地從於高麗 夫貞女不可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 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懃儉 以得人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慇懃於王公 以圖後來之福乎?”

견훤서장군영규 밀어기처왈 대왕근로사십여년 공업수성 일단이가인지화 실지종어고려 부정녀불가이부 충신불사이주. 약사기자 이사역자 즉하안이견천하지의사호? 황문고려왕공 인후근검 이득인민심 태천계야 필위삼한지주. 합치서이안위아왕 겸은근어왕공 이도후래지복호?”

 

어느 날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英規)가 몰래 아내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40여 년 동안 부지런히 애써 대업을 이루셨는데, 하루아침에 가족 간의 불화로 땅을 잃고 고려로 가셨소. 무릇 정조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며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 법이요. 만약 자기의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들을 볼 수 있겠소? 하물며 듣자 하니, 고려의 왕은 어질고 후덕하며 검소하여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오. 아마도 하늘이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이니,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오. 그러하니 글을 보내 우리 왕을 위로하고 아울러 왕공에게도 은근한 마음을 전하여서 후일의 복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妻曰 子之言是吾意也.” 於是天福元年丙申二月 遣人致意於太祖曰 君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처왈 자지언시오의야 어시천복원년병신이월 견인치의어태조왈 군거의기 청위내응 이영왕사.”

 

그러자 그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의 말씀이 곧 제 뜻입니다.” 그래서 천복 원년 병신(서기 936)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뜻을 전하며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대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太祖喜 厚賜其使者遣之 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卽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姊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語.

태조희 후사기사자견지 사영규왈 약몽은일합 무도로지경 즉선치알어장군 연후승당배부인 형사이자존지 필종유이후보지. 천지귀신 개문차어.”

 

그러자 태조가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세하여 길에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뵌 다음에 대청에 올라 부인에게 절을 하고, 형님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들도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六月 萱告太祖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臣雖死無憾.” 太祖曰 非不欲討之 待其時也.

유월 훤고태조 노신소이투신어전하자 원장전하위능 이주역자이 복망대왕차이신병 섬기적난신수사무감 태조왈 비불욕토지 대기시야.”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하였다. “늙은 신하가 전하에게 투신한 이유는 전하의 위엄을 빌려서 반역한 자식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이 신병을 빌려주어서 그 못된 자식과 신하를 섬멸하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말하였다.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先遣太子武及將軍述希 領步騎十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相對 王師背艮向坤而陣 太祖與萱觀兵 忽白雲狀如劍戟 起我師向彼行焉 乃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哀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在中軍.”

선견태자무급장군술희 영보기십만 취천안부. 추구월 태조솔삼군지천안 합병진차일선 신검이병역지. 갑오 격일리천상대 왕사배간향곤이진. 태조여훤관병 홀백운상여검극 기아사향피행언내고행이진. 백제장군효봉덕술애술명길등 망병세대이정 기갑항어진전. 태조노위지 문장수소재 효봉등왈 원수신검재중군.”

 

태조는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희(述希)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서 군사를 합하여 일선(一善)까지 진군하자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맞섰다. 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 태조의 군사는 동북쪽을 등지고 진을 쳤다. 태조가 견훤과 함께 군대의 위용을 보이고 있는데, 갑자기 칼과 창처럼 생긴 하얀 구름이 우리 군사 쪽에서 일어나 적진을 향하여 갔다. 이때 북을 치며 전진하였는데, 백제 장군 효봉(孝奉), 덕술(德述), 애술(哀述), 명고(明吉) 등이 군대의 위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군대 앞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는 그들을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묻자 효봉 등이 말하였다.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

 

太祖命將軍公萱等 三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至黃山炭峴 神劒與二弟將軍富達能奐等四十餘人生出降. 太祖受降 餘皆勞之 許令與妻子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 當如是乎?”

태조명장군공훤등 사군제진협격 백제군궤배. 지황산탄현 신검여이제장군부달능환등사십여인생출항. 태조수항 여개노지 허영여처자상경 문능환왈 시여양검등밀모 수대왕입기자자 여지모야 위신지의 당여시호?”

 

태조가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령하여, 삼군이 나란히 진군하며 양쪽에서 협공하자 백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러 신검이 두 아우 및 장군 부달(富達)과 능환(能奐)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태조가 항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로하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오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능환만은 문책하여 말하였다. “애초에 양검 등과 몰래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자식을 세운 것은 너의 꾀였다. 신하의 의리가 마땅히 이러한 것인가?”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九月八日也 壽七十.

능환면수불능언. 수명주지. 이신검잠위위인소협 비기본심 우차귀명걸죄 특원기사. 견훤우만발저. 수일졸어황산불사 구월팔일야 수칠십.

 

그러자 능환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명을 내려 목을 베었다. 신검이 함부로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이 위협하였기 때문이지 그 본심이 아니었고, 또 귀순하여 죄를 빌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견훤은 울화가 치밀어서 등창이 났다. 결국 며칠 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었으니, 98일로 그의 나이 70세였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州縣安堵 老幼皆呼萬歲. 謂英規曰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之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태조군영엄명 사졸불범추호 주현안도 노유개호만세. 위영규왈 전왕실국후 기신자무일인위지자 독경부처 천리사음 이치성의 겸귀미어과인 기의불가망?”

 

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추호도 범하지 않으니, 주현의 백성들이 안도하였고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하였다. “전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신하된 자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도 글을 보내어 성의를 보이고, 아울러 과인에게 아름다운 명예가 돌아오도록 하였으니, 그 의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소?”

 

許職左承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 丙申滅.

허직좌승 사전일천경 허차역마삼십오필 이영가인 사기이자이관. 견훤기당경복원년 지진천복원년 공사십오년 병인멸.

 

태조는 영규에게 좌승의 벼슬을 내리고 밭 1,000경을 주었으며, 또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가족들을 맞이하게 하였고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서기 892)에 나라를 열어서 진()나라 천복 원년까지 이르렀으니 모두 45년 만인 병신년(서기 936)에 멸망하였다.

 

史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本新羅王子 而反以家國爲讎 至斬先祖之畫像 其爲不仁甚矣. 甄萱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若禽獸 實天下之元惡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사론왈 신라수궁도상 천무소조 민무소귀. 어시군도역극이작 약위모연 기극자 궁예견훤이인이이. 궁예본신라왕자 이반이가국위수 지참선조지화상 기위불인심의. 견훤기자신라지민 식신라지록 이포장화심 향국지위 침일도읍 건유군신약금수 실천하지원악 고궁예견기어기신 견훤산화어기자 갸자취지야. 우수구야? 수항우이밀지웅재 불능적한당지흥. 이황예훤지흉인 기가여아태조상항여.”

 

사관은 이렇게 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여 올바른 도를 잃자 하늘이 돕지 않았고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도적들이 이 틈을 타고 일어났으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는데도 도리어 자기 나라를 원수로 여겨 선조의 화상에 칼질까지 하였으니 그 어질지 못한 것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었는데도 나쁜 마음을 먹고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도읍을 침략하였고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실로 천하의 흉악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궁예는 자기 신하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재앙이 일어났다. 이것은 모두 다 자기 스스로 취한 것이다. 그리니 또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항우(項羽)와 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악한 이들이 어떻게 우리 태조에게 항거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