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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二 奇異 券二 -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已見上]

[북부여는 이미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에서 다뤘다.]

 

扶餘郡者 前百濟王都也 或稱所夫里郡.

부여군자 전백제왕도야 혹칭소부리군.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의 수도인데,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按三國史記 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 注曰 其地名所夫里 泗沘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 扶餘之別號也 已上注.”

안삼국사기 백제성왕이십육년무오춘 이도어사비 국호남부여.” 주왈 기지명소부리 사비 금지고성진야 소부리자 부여지별호야 이상주.”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백제 성왕(聖王) 26년 무오(서기 538) 봄 사비(泗沘)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주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 지명은 소부리(所夫里)이고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니,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又按量田帳籍曰 所夫里郡田丁柱貼.” 今言扶餘郡者 復上古之名也. 百濟王姓扶氏 故稱之. 或稱餘州者 郡西資福寺高座之上 有繡帳焉 其繡文曰 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繡帳.” 又昔者 河南置林州刺史 其時圖籍之內 有餘州二字 林州 今佳林郡也 餘州 今之扶餘郡也.

우안량전장적왈 소부리군전정주첩.” 금언부여군자 복상고지명야. 백제왕성부씨 고칭지. 혹칭여주자 군서자복사고좌지상 유수장언 기수문왈 통화십오년정유오월 일여주공덕대사수장.” 우석자 하남치림주자사 기시도적지내 유여주이자 임주 금가림군야. 여주 금지부여군야.

 

양전장적(量田帳籍)에서는 소부리군은 전정주첩(田丁柱貼)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날의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이다. 백제왕의 성이 부씨(扶氏)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군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의 높은 자리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통화 15년 정유(서기 997) 5월 모일에 여주(餘州)' 공덕대사(功德大寺)의 수놓은 휘장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옛날에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의 그림과 서적 중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百濟地理志曰 後漢書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백제지리지왈 후한서왈 삼한칠십팔국 백제시기일국언.”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르기를,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중의 한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限大海 北際漢江 其都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북사운 백제동극신라 서남한대해 북제한강 기도왈거발성 우운고마성 기외경유오방성.”

 

북사(北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으며 북쪽 경계는 한강(漢江)이다.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인데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

 

通典云 百濟南接新羅 北距高麗 西限大海.”

통전운 백제남접신라 북거고려 서한대해.”

 

통전(通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였고, 북쪽으로는 고려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다.”

 

舊唐書云 百濟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구당서운 백제부여지별종 동북신라 서도해지월주 남도해지왜 북고려 기왕소거 유동서양성.”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동북은 신라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

 

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신당서운 백제서계월주 남왜 개유해 북고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다 바다를 건너야 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史本記云 百濟始祖溫祚 其父雛牟王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州之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州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사본기운 백제시조온조 기부추모왕 혹운주몽 .자북부여도난 지졸본부여 주지왕무자 지유삼녀. 견주몽지비상인 이제이녀첩지. 미기 부여주왕훙 주몽사위 생이자 장왈비류 차왈온조.

 

삼국사(三國史)』 「본기(本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 시조는 온조(溫祚)이며, 그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도망쳐서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그곳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이다.

 

恐後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雛忽居之.

공후태자소불용 수여오간마려등십신남행 백성종지다.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비류욕거해빈 십신간왈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저대해 기천험지리 난득지세 작도어사 불역의호 비류불청 분기민 귀미추홀거지.

 

이들은 후에 태자에게 위험을 느끼고 드디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갔는데, 그들을 따라오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는데,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려고 하자 10명의 신하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뜰을 바라보고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만큼 험하고 이로운 땅은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수도를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서 미추홀(彌雛忽)로 가서 살도록 하였다.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雛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城 後以來時百姓樂悅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後至聖王 移都於泗沘 今扶餘郡[彌雛忽 仁州 慰禮 今稷山].

온조도하남위례성 이십신위보익 국호십제. 시한성제홍가삼년야. 비류이미추홀토습소함 부득안거. 귀견위례 도음정정 인민안태 수점회이사. 기신민개귀어위례성 후이래시백성요열 개호백제. 기세셰여고구려동출부여 고이해위씨 후지성왈이도어사비 금부여군[미추홀 인주 위례 금직산]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기원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결국 뉘우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다 위례성으로 돌아왔는데, 후에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하였고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백제의 계통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를 성씨로 삼았다. 뒤에 성왕에 이르러서 수도를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이고, 위례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 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 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 元徽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一百二十年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金庾信與蘇定方討平之.“

안고전기운 동명왕제삼자온조 이전한홍가삼년계묘 자졸본부여 지위례성 입도칭왕. 십사년병진 이도한산[금광주] 역삼백팔십구년 지십삼세근초고왕 함안원년 취고구려밤평양 이도 북한성[금양주] 역일백오년 지이십이세문주왕즉위 원휘삼년을묘 이도웅천[금공주] 역육십삼년지이십육세성왕 이도소부리 국호남부여 지삼십일세의자왕 역일백이십년 지당현경오년 시의자왕재위이십년 신라김유신여소정방토평지.”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서기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이다.]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왕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한 원휘(元徽) 3년 을묘(서기 475)에 수도를 웅천(熊川)[지금의 공주(公州)이다.]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26대 성왕에 이르러 수도를 소부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는데, 31대 의자왕(義慈王)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은 바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째 되는 해이다.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百濟國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二百濟餘城 七十六萬戶. 唐以其地 分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仍以其酋長爲都督刺史. 未幾 新羅盡幷其地 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

백제국구유오부 분통삼십칠군 이백제여성 칠십육만호. 당이기지 분치웅진마한동명금연덕안등오도독부 잉이기추장위도독자사. 미기 신라진병기지 치웅전무삼주금제군현.

 

백제국은 옛날에 오부(五部)가 있어서 37200여 개의 성 76만호를 나누어 통치하였다. 당나라는 그 땅에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漣)ㆍ덕안(德安) 등의 5도독부를 두고 그 우두머리로 도독자사(都督刺史)를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병합하고 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의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又虎巖寺有政事巖 國家將議宰相 則書當選者名或三四 函封置巖上. 須臾取看 名上有印跡者爲相. 故名之.

우호암사유정사암 국가장의재상 즉서당선자명혹삼사 함봉치암상. 수유취간 명상유인적자위상. 고명지.

 

또 호암사(虎巖寺)에 정사암(政事巖)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재상감을 의논할 때면, 뽑힐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 속에 넣고 봉해서 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상자를 가져다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인()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이 재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又泗沘河邊有一巖 蘇定方嘗坐此上 釣魚龍而出 故巖上有龍跪之跡. 因名龍巖.

우사비하변유일암 소정방상좌차상 조어용이출 고암상유룡궤이적. 인명용암.

또 사비하(泗沘河) 강변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은 자국이 있다. 그래서 이름을 용암(龍巖)이라고 하였다.

 

又郡中有三山 曰日山吳山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居其上 飛相往來 朝夕不絶.

우군중유삼산 왈일산오산부산. 국자전성지시 각유신인거기상 비상왕래 조석부절.

 

또 부여군에는 세 개의 산이 있으니,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라 하였다. 백제가 전성기였을 때는 각각 산 위에 신이 살았는데 서로 날아다니면서 아침 저녁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又泗沘崖 又有一石 可坐十餘人 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煖 因名火突石.

우사비애 우유일석 가좌십여인 백제왕욕행왕흥사예불 선어차석망배불 기석자온 인명화돌석.

 

또 사비 언덕에는 한 바위가 있었는데 10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예불하러 행차할 때면 먼저 이 바위 위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는데, 그러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기 때문에 이름을 화돌석(火突石)이라고 하였다.

 

又泗沘河兩崖如畫屛 百濟王每遊宴歌舞 故至今稱爲大王浦.

우사비하양애여화병 백제왕매유연가무 고지금칭위대왕포.

 

또 사비하의 양쪽 언덕이 마치 그림 병풍 같이 펼쳐져 있었는데, 백제왕이 늘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又始祖溫祚 乃東明王第三子 體洪大 性孝友 善騎射.

우시조온조 내동명왕제삼자 체홍대 성효우 선기사.

 

또 시조 온조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체구가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又多婁王 寬厚有威望.

우다루왕 관후유위망.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위엄과 명망이 있었다.

 

又沙沸王[一作沙伊王]仇首崩 嗣位 而幼少不能政 卽廢而立古爾王 或云 至景初三年己未 乃崩 古爾方立.

우사비왕[일작사이왕]구수붕 사위 이유소불능정 즉폐이입고이왕 혹운 지경초삼년기미 내붕고이방립.

 

또 사비왕(沙沸王)[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돌아가시자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너무 어려서 정사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폐위시키고 고이왕(古爾王)을 왕으로 삼았는데, 혹은 경초(景初) 3년 기미(서기 239)에 왕이 세상을 떠나자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