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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券 第二 奇異 券二- 金傅大王

金傅大王

 

第五十六 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 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我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제오십육 김부대왕 시경순. 천성이년정해구월 백제견훤 침라지고울부. 경애왕청그어아태조 명장이경병일만왕구지. 구병미지 훤이동십일월암입왕경.

 

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서기 927) 9월에 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해 고울부(高鬱府)에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이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날쌘 군사 1만으로 구원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구원병이 채 이르기도 전에 견훤이 겨울 11월에 수도 경주를 급습하였다.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蔔匐 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왕여비빈종척 유포석정연오 불각병지 창졸부지소위. 왕여비분입후궁 종척급공경대부사여 사산분주 위적소노 무귀천포복복 걸위노비. 훤종병표략공사재물 입처왕궁 내명좌우색왕.

 

이때 왕은 비빈 및 왕족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노닐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치자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왕비는 후궁으로 달아났고 왕족과 공경대부와 그 외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지만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엎드려서 노비가 되겠다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나라와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왕궁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왕을 찾아내라고 명령하였다.

 

王與妃妾數人 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왕여비첩수인 닉재후궁 처치군중. 핍령왕자진 이강음왕비 종기하난기비첩. 내입왕지족제부위왕.

 

왕과 왕비 및 첩 몇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잡혀서 군사 속으로 끌려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범하였으며 부하들을 시켜 빈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 왕의 일가 동생인 부()를 왕으로 세웠다.

 

王爲萱所擧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我太祖遣使吊祭.

왕위훤소거즉위. 전왕시빈어서당 여군하통곡. 아태조유사조제.

 

왕은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 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우리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 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侵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명년무자춘삼월 태조솔오십여기 순도경기. 왕여백관교영 입궁상대. 곡진정예 치연임해전. 주감 왕언왈 오이불천 침치화란 견훤자행불의 상아국가 하통여지?” 인현연체읍좌우말불명인. 태조역유체.

 

다음 해 무자년(서기 928)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행하여서 왕도 근처에 이르렀다. 왕과 백관이 성밖으로 나와 맞이하고 궁궐로 들어와 서로 마주하였다. 마음과 예를 다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얼큰해지니 왕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침략을 당하여 난리를 불러 일으켰고, 견훤이 불의한 일을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니 신하들도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도 눈물을 흘렸다.

 

因留數旬 乃廻駕 麾下肅靜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인유수순 내회가 휘하숙정 불범추호. 도인사여상경왈 석견씨지래야 여봉시호 금왕공지지 여견부모.”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정숙하고 조용했으며 조금도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도성의 남녀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였다.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이 왔을 때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

 

八月 太祖遣使 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팔월 태조유사 유왕금삼안마 병사준료장사유차.

 

8월에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안장을 한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선물을 주었다.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已自安. 乃與群下 謀擧土降太祖 群臣可否. 紛然不已.

청태이년을미시월 이사방지진위차유 국약세고 불이자안. 내여군하 모거사항태조 군신가부. 분연불이.

 

청태(淸泰) 2년 을미(서기 935) 10,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나라의 것이 되었고 나라는 약해지고 형세는 고립되어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곧 왕은 여러 신하들과 국토를 태조에게 바쳐 항복하는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찬성과 반대가 분분하여 끝이 없었다.

 

王太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當與忠臣義士 收合民心 力盡而後已. 豈可以一千年之社稷 輕以與人?”

왕태자왈 국지존망 필유천명. 당여충신의사 수합민심 역진이후이. 기가이일천년지사직 경이여인?”

 

왕태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입니다. 당연히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힘을 다한 후에야 그만둘 뿐입니다. 어떻게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를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齎書 請降於太祖.

앙왈 고위약차 세불능전 기불능강 우불능약 지사무고지민 간뇌도지 오소불능인야.” 내사시랑김봉휴재서 청항어태조.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곧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太子哭泣辭王 徑往皆骨山 麻衣草食 以終其身. 季子視髮隷華嚴 爲浮圖 名梵空 後住法水 海印寺云.

태자곡읍사왕 경왕개골산 마의초식 이종기신. 계자친발대화엄 위부도 명범공 후왕법수 해인사운.

 

태자는 통곡을 하면서 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종신하였고 막내 아들은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을 범공(세상)이라 하였다. 후에는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太祖受書 送太相王鐵迎之. 王率百僚 歸于我太祖. 香車寶馬 連亙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 勞賜宮東一區[今正承院]. 以長女樂浪公主妻之. 以王謝自國居他國 故以鸞喩之 改號神鸞公主 諡孝穆. 封爲正丞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태조수서 송태상왕철영지. 왕솔백료 귀우아태조. 향거보마 연호삽십여리 도로전인 관자여도. 태조출교영 노사궁동일구[금정승원]. 이장녀낙랑공주처지. 이왕사자국거타국 고인난유지 개호신난공주 시효목. 봉위정승 위재탸자지상 급록일천석. 시종원장 개록용지. 개신라위경주 이위공지식읍.

 

태조가 국서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어 맞이하도록 하였다. 왕은 모든 관료를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해왔다. 아름답게 꾸민 수레와 호화로운 말들이 30여 리나 늘어서 있어 도로가 꽉 막혔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처럼 늘어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이다.]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녀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하였는데,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왕을 정승(政丞)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의 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初王納土來降 太祖喜甚 待之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婚於宗室 以永甥舅之好.”

초왕납토래항 태조희심 대지후례. 사고왈 금왕이국여관인 기쉬사대의 원결혼어종실이영생구지호.”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하여 오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과인에게 주시니 그 주신 것이 너무나 큽니다. 원하건대 왕실과 혼인해 영원히 사위와 장인의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王答曰 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 追封神興大王之弟也] 有女子 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娶之 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郞金寬毅所撰王代宗錄云 神成王后李氏 本慶州大尉李正言爲陜州守時 太祖王幸此州 納爲妃 故或云陜州君 願堂玄化寺 三月二十五日 立忌 葬貞陵 生一子 安宗也.” 此外二十五妃主中 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 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왕답왈 아백부억렴[왕지고효종각간 추봉신흥대왕지제야] 유여자 덕용쌍미 비시무이비내정.” 태조취지. 시이신성왕후김씨[본조등사랑김관의소천왕대종록운 신성왕후이씨본경구대위이정언위협주수시 태조왕행차주 납위비 고혹운협주군 원당현화사 삼월이십오일 입기 장정릉 생일자 안종야.“ 차외이십오비주중 부재김씨지사 미상. 연이사신지론 역이안종위신라외손 당이사전위시]

 

그러자 왕이 답하였다. “우리 큰아버지 억렴(億廉)[왕의 아버지인 효종(孝宗) 각간으로 추봉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동생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면 내정을 잘 갖출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태조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 분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우리나라의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합주(陜州)를 다스리고 있을 때 태조가 이 고을에 행차하였다가 왕비로 삼았다. 그래서 합주군(陜州君)이라고도 한다.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은 현화사(玄化寺), 제삿날은 325일이고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이다.”이 외에 25명의 왕비 중 김씨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사신(史臣)의 의론에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하겠다.]

 

太祖之孫景宗伷 聘政承公之女爲妃 是爲憲承皇后. 仍封政承爲尙父. 太平興國三年戊寅崩. 諡曰敬順.

태조지손경종주 빙정승공지여위비 시위헌승왕후. 잉봉정승위상보. 태평흥국삼년무인붕. 시왕경순.

 

태조의 손자인 경종(景宗) ()는 정승공(김부대왕, 즉 경순왕)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정승을 상보(尙父)로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서기 978)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册尙父詰曰 勅 姬周啓聖之初 先封呂望 割漢興王之始 首册蕭何 自定大寰區 廣開基業 立龍圖三十代 躡麟趾四百年 日月重明 乾坤交泰 雖自無爲之主 乃開致理之臣

 

상보로 책봉한 글은 이러하다. “조칙을 내리노라. ()나라가 나라를 연 초기에 먼저 여망(呂望)을 봉하였고, ()나라가 나라를 일으킨 처음에 소하(蕭何)를 제일 먼저 봉하였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안정되고 기업을 널리 열 수 있었다. 주나라는 30대를 이어 400년 동안 이어지면서 해와 달은 더욱 밝아지고 하늘과 땅은 평화로웠다. 비록 무위(無爲: 무위이치(無爲而治),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형벌을 사용하지 않아도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뜻이다.)의 군왕에서 시작되었지만 잘 다스리는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丞 食邑八千戶 金傅 世處雞林 官分王爵. 英烈振凌雲之氣 文章騰擲地之才. 富有春秋 貴居茅土. 六韜三略 恂入胸襟 七縱五申 撮皈指掌.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오 깁부 세처계림 관분왕작. 영열진능운지기 문장등척지지재. 부유춘추 귀거모토. 육도삼략 순입흉금 칠종오신 찰귀지장.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丞) 식읍 8,000호 김부(金傅)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의 지위였다. 영특하고 초탈한 기상을 지녔고 문장의 재주는 땅을 뒤흔들정도였다. 부유함은 춘추로 계속되었고 귀함은 봉토를 누렸다. 육도(六韜)삼략(三略)같은 뛰어난 지략이 가슴 속에 품고있어서 제갈량처럼 뛰어난 능력도 그 손바닥 안에 있었다.

 

我太祖 好修睦鄰擲之好 早認餘風. 尋時頒駙馬之姻 內酬大節. 家國旣歸於一統 君臣宛合於三韓 顯播令名 光崇懿範. 可加號尙父都省令 仍賜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號. 勳封如故 食邑通前爲一万戶. 有司擇日備禮册命 主者施行.

아태조 호수목린척지호 조인여풍. 심시반부마지인 내수대절. 국가기귀어일통 군신완합어삼한 현파영명 광숭의범. 가가호상보도성령 잉사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호. 훈봉여고 식읍통전위일만호. 유사택일비례책명 주자시행.

 

우리 태조께서 비로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셨기에 일찍이 그 풍모를 아셨다. 때를 기다렸다가 사위로 맞아들여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하셨다. 국가가 이미 하나로 통일되었고 임금과 신하가 완연히 삼한(三韓)에 합쳐졌으니, 그대의 훌륭한 이름은 널리 전해지고 그 아름다운 규범은 빛날 것이다. 그대에게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내리노라. 훈작과 봉호는 예전과 같고 식읍은 이전 것과 합해 10,000호에 봉하노라. 담당 관원은 날을 정하여서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開寶八年十月日

大匡內議令兼摠翰林臣翮宣奉行 奉勅如右 牒到奉行.

개보팔년시월일

대광내의령겸총한림신

 

개보(開寶) 8(서기 975) 10월 모일.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 겸총한림(兼摠翰林) 신 핵선(翮宣)은 봉행하되, 위와 같은 칙명을 받들어 직첩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하라.

 

開寶八年十月日 侍中署 侍中署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評侍郞署 廣評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卿署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개보 810월 모일.

시중(侍中) - 서명

시중(侍中) - 서명

내봉령(內奉令) - 서명

군부령(軍部令) - 서명

군부령(軍部令) - 서명 없음

병부령(兵部令) - 서명 없음

병부령(兵部令) -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 서명 없음

내봉시랑(內奉侍郞) - 서명 없음

내봉시랑(內奉侍郞) - 서명

군부경(軍部卿) - 서명 없음

군부경(軍部卿) - 서명

병부경(兵部卿) - 서명 없음

병부경(兵部卿) - 서명

 

告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尙父都省令上柱國樂浪郡王食邑一萬戶金傅 奉勅如右 符到奉行 主事無名 郞中無名 書令史無名 孔目無名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식읍(食邑) 일만호(一萬戶) 김부에게 고한다. 칙명이 위와 같으니 직첩이 이르는 대로 봉행하라.

 

주사(主事) - 이름 없음

낭중(郞中) - 이름 없음

서령사(書令史) - 이름 없음

공목(孔目) - 이름 없음

 

開寶八年十月日下

개보 810월 모일에 내린다.”

 

史論曰 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爲實事

 

사관의 논평은 이러하다.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김씨는 금상자 속에 있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도 한다. 이것은 더욱 허황되어서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서로 전해내려 오면서 이것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畧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爲郡縣之 可謂盛矣.

금단원궐초 재상자 기위기야검 기위인야관 기설관야약 기행사야간. 이지성사중국 제항조빙지사 상속부절 상견자제 조조이숙위 입학이송습 우이습성현지풍화 혁홍황지속 위예의지방 우빙왕사지위영 평백제고구려 취기지위군현지 가위성의.

 

지금 그 시초를 살펴보자. 위에 있는 자들이 그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에게는 너그러웠으며, 관직을 설치한 것은 간략했고 그 일을 행한 것은 간소하였다.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가는 사신들이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나가 황제를 호위하게 하고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켰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모와 교화를 배워서 미개한 풍속을 교화하여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군사의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으니,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 景哀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衛衍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연이봉부도지법 부지기폐 지사여리비기탑묘 제민도어치갈 병농침소. 이국가일쇠 기하기불난차망야재? 어시시 경애왕가지이황락 여궁인좌우 출유포석정 치주연위연 부지견훤지지. 여부문오한금호 루두장려화 무이이의.

 

그러나 불법을 받아들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고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하였다. 백성들이 승려가 되어 도피하자 군사와 농민은 점차 줄어들고 나라는 나날이 쇠약해졌다. 그러니 이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고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경애왕은 황음과 쾌락을 즐겨, 궁인과 주변 신하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과 잔치를 베푸느라 견훤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 견훤을 비유한 것이다. 한금호는 500명으로 진()나라 수도 금릉(金陵)을 장악하고 진나라 후주(後主)를 사로잡았다.)나 누대 위의 장려화(張麗華: 경애왕의 왕비를 비유한 것이다. 한금호가 쳐들어오자 후주와 함께 우물 속에 숨었다가 잡혀 죽었다.)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家族 害及於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 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甚大.

약경순왕귀명태조 수비획이 역가가의. 향약열전수사 이갱왕사 지어역굴세궁 즉필복기가족 해급어무고지민. 이내부대고명 봉부고 적군현 이귀지 기유공어조정 유덕어생민심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죽음으로 항전하여 태조의 군사에게 항거했다면,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해져서 반드시 그 가족들이 멸망하고 해악이 죄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항복하라는 명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군현의 문서를 작성해 귀순하였으니, 아마도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也歟.

석전씨이오월입송 소자첨위지충신. 금신라공덕 과어피원의. 아태조비빈중다 기자손역번연 이현종자신라외손즉보위 차후계통자 개기자손 기비음덕야여.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가지고 송()나라에 귀순하자, 소식(蘇軾)이 그를 일러 충신이라고 하였다.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더 클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번창하였다. 하지만 현종(顯宗)이 신라의 외손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로, 그 왕통을 계승한 이들이 모두 다 그의 자손들이었으니, 어찌 음덕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 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

신라기납토국제 아간신회 파외서환 견도성이궤 유서리리탄 내작가 가망미상.

 

신라는 이미 국토를 바치고 나라가 없어졌다.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지방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가 서울의 성이 무너진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서러움에 슬피 탄식하며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