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聖大王
伊飡金周元 初爲上宰 王爲角干 居二宰 夢脫幞頭 著素笠 把十二絃琴 入於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 “脫幞頭者 失職之兆 把琴者 著枷之兆 入井 入獄之兆.”
이찬김주원 초위상재 왕위각간 거이재 몽탈복두 착소립 파십이현금 입어천궁사정중. 각이사인점지 왈 “탈복두자 실지지조 파금자 착가지조 입정 입옥지조.”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이 되어 재상 다음 자리에 있었다. 꿈에 머리에 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썼는데,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복두를 벗은 것은 벼슬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王聞之甚患 杜門不出 于時阿飡餘三[或本餘山]來通謁. 王辭以疾不出 再通曰 “願得一見.” 王諾之 阿飡曰 “公所忌何事?” 王具說占夢之由 阿飡興拜曰 “此乃吉祥之夢 公若登大位而不遺我 則爲公解之.”
왕문지심환 두문불출 우시아찬여삼[혹본여산]래통알. 왕사이질불출 재통왈 “원득일견.” 왕락지 아찬왈 “공소기하사?” 왕사설점몽지유 아찬흥배왈 “차내길상지몽 공약들대위이불유아 즉위공해지.”
왕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근심하여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에 아찬(阿飡) 여삼(餘三)[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였다. 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자, 다시 뵙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꼭 한 번 뵙기를 원하옵니다.” 왕이 허락하자 아찬이 말하였다. “공께서 꺼리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친 일을 말하였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말 상서로운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오르시어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王乃辟禁左右 而請解之 曰 “脫幞頭者 人無居上也 著素笠者 冕旒之兆也 把十二絃琴者 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宮井 入宮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 何居上位 阿飡曰 請密祀北川神可矣 從之
왕내피금좌우 아총해지 왈 “탈복두자 인무거상야 착소립자 면류지조야. 파십이현금자 십이계전세지조야. 입천궁정 입궁금지서야.” 왕왈 “상유주원 하거상위?” 아찬왈 “청밀사북천신가의.” 종지.
왕은 곧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몽을 청하였다. “복두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입니다.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 후손까지 왕위가 전해질 조짐입니다. 천관궁의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말하였다. “내 위에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르겠소?” 아찬이 말하였다. “북천신(北川神)에게 몰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未幾 宣德王崩 國人欲奉周元爲王 將迎入宮. 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宮卽位. 上宰之徒衆 皆來附之 拜賀新登之主. 是爲元聖大王 諱敬信 金氏 蓋厚夢之應也. 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 時餘山已卒矣. 召其子孫賜爵 王之孫有五人 惠忠太子憲平太子禮英匝干大龍夫人小龍夫人等也.
미기 선덕왕붕 국인욕봉주원위왕 장영입궁. 가재천북 홀천창부득도 왕선입궁즉위 상재지도중 개래부지 배하신등지주. 시위원성대왕 휘경신 김씨 개후몽지응야. 주원퇴거명주. 왕기등극 시여산이졸의. 소기자손사작 왕지손유오인 혜충탸자헌평태자예영잡간 대룡부인소룡부인등야.
얼마 뒤 선덕왕(宣德王)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은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궁궐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집이 북천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주원을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와서 따르며 새 왕에게 절을 하고 축하하였다. 이가 원성대왕으로 이름이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다. 좋은 꿈이 들어맞은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나 살았다. 왕이 등극하였으나 당시에 여산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그 자손을 불러서 벼슬을 내렸다. 왕은 다섯 명의 자손이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ㆍ헌평태자(憲平太子)ㆍ예영잡간(禮英匝干)ㆍ대룡부인(大龍夫人)ㆍ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王誠知窮達之變. 故有身空詞腦歌[歌亡未詳]
왕성지궁달지변. 고유신공사뇌가[가망미상]
대왕은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변화를 잘 알았다. 그래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노래가 없어져서 알 수 없다.]를 지었다.
王之考大角干孝讓 傳祖宗萬波息笛 乃傳於王 王得之 故厚荷天恩 其德遠輝
왕지고배각간효양 전조종만파식적 내전어왕 왕득지 고후하천은 기덕원휘.
왕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상 대대로 전하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하였고 왕은 이를 받았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받아서 그 덕을 멀리 빛냈다.
貞元二年丙寅十月十一日 日本王文慶[按日本帝紀 第五十五主文德王 疑是也. 餘無文慶. 或本云 是王太子] 擧兵欲伐新羅 聞新羅有萬波息笛退兵 以金五十兩 遣使請其笛 王謂使曰 “朕聞上世眞平王代有之耳 今不知所在.”
정원이년병인시월십일일 일본왕문경[안일본제지 제오십오주문덕왕 의시야. 여무문경. 혹본운 시왕태자] 거병욕벌신라 문신라유만파식적퇴병 이금오십량 견사청기적 왕위사왈 “짐문상세진평왕대유지이 금부지소재.”
정원(貞元) 2년 병인(서기 786) 10월 11일에 일본 왕 문경(文慶)[『일본제기(日本帝紀)』를 살펴보면, 제55대 군주인 문덕왕인 듯하다. 그 외에는 ‘문경’이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고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신라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있어 군사를 물리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황금 50냥과 피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왕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짐은 윗세대 진평왕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
明年七月七日 更遣使 以金一千兩請之曰 寡人願得見神物 而還之矣 王亦辭以前對 以銀三千兩賜其使 還金而不受 八月 使還 藏其笛於內黃殿.
명년칠월칠일 경견사 이금일천냥청지왈 “과인원득견신물 이환지의.” 왕역사이전대 이은삼찬냥사기사 환금이불수. 팔월 사환 장기적어내황전.
그 다음 해 7월 7일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황금 1,000냥을 주면서 청하였다. “과인이 원하는 것은, 신물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드리려는 것입니다.” 왕이 또한 지난번처럼 말하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고 금도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하였다.
王卽位十一年乙亥 唐使來京 留一朔而還 後一日 有二女 進內庭 奏曰 “妾等乃東池靑池[靑池卽東泉寺之泉也. 寺記云 泉乃東海龍往來聽法之地 寺乃眞平王所造 五百聖衆 五層塔 幷納田民焉] 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國二人而來 呪我夫二龍及芬皇寺井等三龍 變爲小魚 筒貯而歸. 願陛下勅二人 留我夫等護國龍也.”
왕즉위시일년을해 당사래경 유일삭이환 후일일 유이녀 진내정 주왈 “첩등내동지청지[청지즉동천사지천야. 사기운 찬내동해용왕래청법지지 사내진평왕소조 오백성중 오층탑 병남전민언] 이용지처야. 당사장하서국이인이해 주아부이횽급분황사정등삼횽변위소아 통저이귀. 원폐하칙이인 유아부들호국용야.”
왕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인 을해년(서기 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 경주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궁궐 안뜰로 들어와서 아뢰었다. “첩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청지는 동천사(東泉寺)의 연못이다. 절의 기록에는, 이 샘은 곧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을 듣던 곳이며 절은 진평왕이 지었는데 500나한과 5층탑과 밭과 일하는 사람을 함께 헌납했다고 한다.]에 살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두 명을 데리고 왔는데, 저희들 남편인 두 용과 또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저희 남편인 호국용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王追至河陽館 親賜享宴 勅河西人曰 “爾輩何得取我三龍至此? 若不以實告 必加極刑.” 於是出三魚獻之. 使放於三處 各湧水丈餘 喜躍而逝 唐人服王之明聖.
왕추지하양관 친사향연 칙하서인왈 “이배하득취아삼룡지차? 약불이실거 필가극형.” 어시출삼어헌지. 사방어삼처 각용수장여 희약이서 당인복왕지명성.
왕이 사신을 쫓아 하양관(河陽館)에 이르러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에까지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리라.” 그러자 세 마리 물고기를 바쳤다. 이들을 세 곳에 놓아주게 하였더니, 각기 물에서 한 길이나 솟아오르며 기뻐 뛰면서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하고 성스러움에 탄복하였다.
王一日請皇龍寺[或本云 華嚴寺又金剛寺者 蓋以寺名經名 交混之也] 釋智海入內 講華嚴經五旬. 沙彌妙正 每洗鉢於金光井[因大賢法師得名]邊 有一黿浮沈井中 沙彌每以殘食 餽而爲戲. 席將罷 沙彌謂黿曰 “吾德汝日久 何以報之?”
왕일일청황룡사[혹본운 화엄사우금강사자 개이사명경명 교혼지야] 석지해입내 강화엄경오순. 사미묘장 해세발어금광정[인대현법사득명]변 유일원부침정중 사미매이잔식 궤이위희. 석장파 사미위원왈 “오덕여일구 하이보지?”
왕이 하루는 황룡사(皇龍寺)[화엄사(華嚴寺)라고 한 곳도 있고 금강사(金剛寺)라고 한 곳도 있다. 아마도 절의 이름과 불경의 이름이 서로 뒤섞였을 것이다.]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들게 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강의하게 하였다. 사미승인 묘정(妙正)이 매일 금광정(金光井)[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가에서 밥그릇을 씻었는데, 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 잠겼다 하였다. 사미승은 매번 먹고 남은 밥을 주면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법회가 끝날 무렵 사미승이 자라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여러 날 동안 은덕을 베풀었는데, 너는 무엇으로 보답할 거냐?”
隔數日 黿吐一小珠 如欲贈遺. 沙彌得其珠 繫於帶端. 自後大王見沙彌愛重 邀致內殿 不離左右. 時有一匝干 奉使於唐 亦愛沙彌. 請與俱行 王許之 同入於唐.
격수일 원토일소주 여욕증유. 사미득기주 계어대단. 자후대왕견사미애중 격치내전 불리좌우. 시유일잡간 봉사어당 역애사미. 청여구행 왕허지 동입어당.
며칠이 지났는데 자라가 작은 구슬 하나를 토해내더니 마치 사미승에게 주려는 것 같았다. 사미승은 그 구슬을 받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그런데 이후로 대왕이 사미승을 보고는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겨 내전에 들어오게 하고는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 어떤 잡간(匝干)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사미승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왕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함께 당나라로 갔다.
唐帝亦見沙彌而寵愛. 丞相左右莫不尊信. 有一相士奏曰 “審此沙彌 無一吉相 得人信敬 必有所持異物.”
당제역견사미이총애. 승상좌우막불존신. 우일상가주왈 “심차사미 무일길상 득인신경 필유소지이물.”
당나라 황제도 사미승을 보고는 총애하고 사랑해 주었다. 재상과 신하들도 모두들 존경하고 신뢰하였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 사미승을 살펴보니 좋은 상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필시 기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使人撿看 得帶端小珠. 帝曰 “朕有如意珠四枚 前年失一个 今見此珠 乃吾所失也.”
사인검잔 득대단소주. 제왈 “짐유여의주사매 전년실일개 금견차주 내오소실야.”
그래서 사람을 시켜 뒤져보았더니, 허리띠 끝에 작은 구슬이 있었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작년에 하나를 잃어버렸다. 지금 보니 이 구슬이 곧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帝問沙彌 沙彌具陳其事. 帝內失珠之日 與沙彌得珠同日. 帝留其珠而遣之. 後人無愛信此沙彌者.
제문사미 사미구진기사. 제내실주지일 여사미득주동일. 제유기주이견지. 후인무애신차사미자.
그리고 황제는 사미승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그 일을 갖추어서 말하였다. 황제가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승이 구슬을 얻은 날짜가 같았다. 황제는 그 구슬을 빼앗은 뒤에 그를 돌려보냈다. 그 뒤로는 사미승을 사랑하거나 신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 有崔致遠撰碑. 又刱報恩寺 又望德樓. 追封祖訓入匝干爲興平大王 曾祖義官匝干爲神英大王 高祖法宣大阿干爲玄聖大王. 玄聖之考 卽摩叱次匝干.
왕지능재토함악사동곡사[금숭복사] 유최치원찬비. 우창보은사 우망덕루. 추봉조훈입잡간위흥평대왕 증조의관잡간위신영대왕 고조법선대아간위현겅대왕. 현성지고 즉마질차잡간.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지금은 숭복사(崇福寺)라 한다.]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석이 있다. 왕이 또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訓入) 잡간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 할아버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 할아버지 법선(高祖) 대아간(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봉하였다. 현성의 아버지는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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