奈勿王 金堤上
[一作那密王]
[내물왕은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한다.]
第十七 那密王卽位三十六年庚寅 倭王遣使來朝曰 “寡君聞大王之神聖 使臣等以告百濟之罪於大王也 願大王遣一王子 表誠心於寡君也.”
제십칠 나밀왕즉위삼십육년경인 왜왕견사래조왈 “과군문대왕지신성 사신등이고백제지죄어대 왕야 원대왕견일왕자 표성심어과군야.”
제17대 나밀왕(那密王) 즉위 36년 경인(서기 390)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 왕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저희 임금님께서 대왕께서 신성하시다는 말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의 죄를 대왕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주시어, 저희 임금님께 성의를 보여주십시오.”
於是王使第三子美海[一作未吐喜] 以聘於倭 美海年十歲 言辭動止 猶未備具 故以內臣朴娑覽 爲副使而遣之. 倭王留而不送三十年.
어시왕사제삼자미해[일작미토희] 이빙어왜 미해년십세 언사동지 유미비구 고이내신박사람위부사이견지. 왜왕류이불송삼십년.
그러자 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에게 왜국을 방문하게 하였다. 당시 미해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해서 말과 행동이 아직 미숙하였기 때문에,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을 부사로 삼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왜왕이 이들을 억류시켜서 30년 동안이나 돌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至訥祗王卽位三年己未 句麗長壽王 遣使來朝云 “寡君聞大王之弟寶海 秀智才藝 願與相親 特遣小臣懇請.” 王聞之幸甚 因此和通. 命其弟寶海 遣於句麗 以內臣金武謁 爲輔而送之. 長壽王又留而不送.
지눌지왕즉위삼년기미 구려장수왕 견사래조운 “과군문대왕지제보해 수지재예 원여상친 특견소신간청.” 왕문지행심 인차화통. 명기제보해 견어구려 이내신김무알 위보이송지. 장수왕우류이불송.
눌지왕 3년인 기미(서기 419)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저희 임금님께서 대왕의 동생 보해(寶海)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서 특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게 하셨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두 나라가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고구려에 가도록 명하고,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관으로 삼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장수왕도 이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至十年乙丑 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 親賜御宴. 進酒三行 衆樂初作 王垂涕而謂群臣曰 “昔我聖考 誠心民事 故使愛子東聘於倭 不見而崩. 又朕卽位已來 隣兵甚熾 戰爭不息 句麗獨有結親之言 朕信其言 以其親弟聘於句麗. 句麗亦留而不送 朕雖處富貴 而未嘗一日暫忘而不哭. 若得見二弟 共謝於先主之廟 則能報恩於國人. 誰能成其謀策?” 時百官咸奏曰 “此事固非易也 必有智勇方可.”
지십년을축 왕소집군신급국중호협 친사어연. 진주삼행 중악초작 왕수체이위군신왈 “석아성고성심민사 고사애자동빙어왜 불견이붕. 우짐즉위이래 린병심치 전쟁불식 구려독유결친지언 짐신기언 이기친제빙어구려. 구려역류이불송 짐수처부귀 이미상일일잠망이불곡. 약득견이제 공사어선주지묘 즉능보은어국인. 수능성기모책?”. 시백관함주왈 ”차사고비이야 필유지용방가.“
눌지왕 10년 을축(서기 425)에 왕이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걸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번 돌고 온갖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들을 돌보셨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국에 보냈다가 다시는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또 짐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이웃나라의 군사가 너무나 강하여 전쟁을 그칠 날이 없었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고 말하였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고 동생을 고구려에 보냈소. 그런데 고구려도 동생을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짐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단 하루 잠시라도 이 일을 잊은 적이 없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소. 만일 두 동생을 만나 함께 선왕의 사당에 감사드릴 수 있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이오. 누가 이 일을 이룰 수가 있겠소?” 이때 모든 신하들이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슬기롭고 용맹스러운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臣等以爲歃羅郡太守堤上可也.” 於是王召問焉 堤上再拜對曰 “臣聞主憂臣辱 主辱臣死 若論難易而後行謂之不忠 圖死生而後動 謂之無勇 臣雖不肖 願受命行矣.” 王甚嘉之 分觴而飮 握手而別.
신등이위삽라군태수제상가야.” 어시왕소문언 제상재배대왈 “신문주우신욕 주욕신사 약론난이이후행위지불충 도사생이후동 위지무용 신수불초 원수명행의.” 왕심가지 분상이음 악수이별.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인 제상(堤上)이 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래서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는데, 제상이 두 번 절을 하고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서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진 뒤에 행한다면 충성이 아니고,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린 뒤에 움직인다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못났지만 원하옵건대 명을 받들어 행하겠사옵니다.” 왕은 그를 매우 칭찬하고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은 뒤 헤어졌다.
堤上簾前受命 徑趨北海之路. 變服入句麗 進於寶海所 共謀逸期. 先以五月十五日 歸泊於高城水口而待. 期日將至 寶海稱病 數日不朝. 乃夜中逃出 行到高城海濱. 王知之 使數十人追之 至高城 而及之. 然寶海在句麗 常施恩於左右 故其軍士憫傷之 皆拔箭鏃而射之. 遂免而歸.
제상염전수명 경추북해지로. 변복입구려 진어보해소 공모일기. 선이오월십오일 귀박어고성수구이대. 기일장지 보해칭병 수일불조. 내야중도출 행지고성해빈. 왕지시 사수십인추지 지고성이급지. 연보해재구려 상시은어좌우 고기군사민상지 개발전촉이사지. 수면이귀.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을 받고 곧장 북해(北海) 길로 떠났다. 옷을 바꾸어 입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의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대고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보내어 뒤쫓게 하였는데 고성에 이르러 보해를 따라잡았다. 그렇지만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 그래서 드디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王旣見寶海 益思美海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 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왕기견보해 익사미해일흔일비 수루이위좌우왈 “여신유일비 일면일안 수득일이망일 하감불통호?”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더욱더 미해가 보고 싶어서, 한편으론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주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마치 몸 하나에 팔 하나만 있고 얼굴 하나에 눈 하나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를 얻었지만 하나는 잃었으니, 어떻게 마음이 아프지 않겠소?”
時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시제상문차언 재배사조이기마. 불입가이행 직지어율포지빈. 기처문지 주마추지율포 견기부이재강상의. 처호지절간 제산단요수이불주,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을 하고 임금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출발하여 곧장 율포(栗浦)의 해변에 이르렀다. 제상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지만, 남편은 벌써 배에 올라타 있었다. 그 아내가 간절하게 불렀지만, 제상은 단지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行至倭國 詐言曰 雞林王以不罪殺我父兄 故逃來至此矣.“ 倭王信之 賜室家而安之. 時堤上常陪美海遊海濱 逐捕魚鳥 以其所獲 每獻於倭王. 王甚喜之 而無疑焉.
행지왜국 사언왈 “계림왕이불죄살아부형 고도래지차의, 왜왕신지 사실가이안지. 시제상상배미해유해빈 축포어조 이기소획 매헌어왜왕. 왕심희지 이무의언.
제상은 왜국에 이르러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였다. “계림의 왕이 아무런 죄도 없는 제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도망쳐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노닐다가 물고기나 새를 잡으면 매번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매우 기뻐하여 조금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適曉霧濛晦 堤上曰 可行矣 美海曰 然則偕行 堤上曰 臣若行 恐倭人覺而追之 願臣留而止其追也 美海曰 今我與汝如父兄焉 何得棄汝而獨歸
마침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제상이 미해에게 말하였다. “떠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신이 만일 함께 간다면 왜나라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쫓아올까 걱정됩니다. 원하옵건대 신은 여기 남아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대를 버리고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오?”
堤上曰 臣能救公之命而慰大王之情 則足矣 何願生乎 取酒獻美海
그러자 제상이 말하였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時雞林人康仇麗在倭國 以其人從而送之 堤上入美海房 至於明旦 左右欲入見之 堤上出止之曰 昨日馳走於捕獵 病甚未起
당시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있었는데, 그에게 미해를 따라 가게 하여 보냈다. 그리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고 하였지만, 제상이 나와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어제 사냥을 하느라 말을 타고 달렸는데, 병이 심하게 나서 아직까지 못 일어나셨다.”
及乎日昃 左右怪之而更問焉 對曰 美海行已久矣 左右奔告於王 王使騎兵逐之 不及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주변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제상이 대답하였다. “미해 공이 떠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이 기병을 시켜 쫓게 하였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다.
於是囚堤上問曰 汝何竊遣汝國王子耶 對曰 臣是雞林之臣 非倭國之臣 今欲成吾君之志耳 何敢言於君乎
그러자 제상을 가두어 놓고 심문하여 물었다. “너는 어찌해서 너희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하였다.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뿐인데, 내 어찌 그대에게 말을 하겠는가?”
倭王怒曰 今汝已爲我臣 而言雞林之臣 則必具五刑 若言倭國之臣者 必賞重祿
왜왕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이다. 그런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온갖 형벌을 가하겠지만, 만일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큰 상을 내려주겠다.”
對曰 寧爲雞林之犬imagefont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
그러자 제상이 말하였다.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매질을 당할지언정 왜국의 벼슬을 받지는 않겠다.”
王怒 命屠剝堤上脚下之皮 刈蒹葭使趨其上[今蒹葭上 有血痕 俗云堤上之血]
왕이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벗겨내고 갈대를 베어놓고 그 위를 걷게 하고는[지금도 갈대 위에 피 흔적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
更問曰 汝何國臣乎 曰 雞林之臣也 又使立於熱鐵上 問 何國之臣乎 曰 雞林之臣也 倭王知不可屈 燒殺於木島中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고?” “계림의 신하이다.”
그러자 또다시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는 어느 나라 신하인지 물었다. “계림의 신하이다.”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도(木島)에서 불에 태워서 죽였다.
美海渡而來 使康仇麗先告於國中. 王驚喜 命百官迎於屈歇驛. 王與親弟寶海迎於南郊 入闕設宴. 大赦國內. 冊其妻爲國大夫人 以其女子爲美海公夫人
미해도이래 사강구려선고국중. 왕경희 명백관영어굴헐역. 왕여친제보해영어남교 입궐설연.
대사국내. 책기처위국대부인 이기여자위미해공부인.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도록 시켰다. 왕은 놀랍고 기뻐하여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왕이 친동생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로 가서 맞이하고 대궐에 들어와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識者曰 昔漢臣周苛在滎陽 爲楚兵所虜. 項羽謂周苛曰 汝爲我臣 封爲萬祿侯 周苛罵而不屈 爲楚王所殺. 堤上之忠烈 無愧於周苛矣.
식자왈 “석한신주가재형양 위초병소노.” 항우위주가왈 ‘여위아신 봉위만록후.’ 주가매이불굴 위초왕소살. 제상지충열 무괴어주가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에서 초(楚)나라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항우(項羽)는 주가에게 ‘네가 내 신하가 된다면 만록후(萬祿侯)에 봉해주겠다.’ 하였지만, 주가는 욕을 하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초왕에게 살해되었다. 제상의 충성은 주가보다 못할 것이 없다.”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 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 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초제상지발거야 부인문지추불급 급지망덕사문남사상 방와장호. 인명기사 왈장사. 친척이인 부액장환 부인서각 좌불기 명기지. 왈벌지지 구후부인불승기모 솔삼랑자상치술령 망왜국통곡이종 잉위지술신모. 금사당재언.
애초에 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쫓아왔으나 따라잡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의 문 남쪽 모래사장 위에 이르러서는 드러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그래서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고 한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해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 위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곧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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