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鄒王 竹葉軍
第十三 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蓋以金氏始登王位 故後代金氏諸王 皆以未鄒爲始祖 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제십삼 미추이사금[일작미조 우미고] 김알지칠세손. 혁세자영 잉유성덕 수선우이해 시등왕위[금속칭왕지릉위시조당 개이김씨등왕위 고후대김씨제왕 개시미추위시조 의의]. 재위이십삼년이붕 능재흥륜사동.
제13대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또 훌륭한 덕을 지녔으므로, 이해(理解, 점해왕)의 뒤를 이어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지금 세간에서 미추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 하는 것은, 김씨 중에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후대 김씨 왕들이 모두 미추왕을 시조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왕릉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第十四儒禮王代 伊西國人 來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 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 乃知先王陰騭有功. 因呼竹現陵
제십사유례왕대 이서국인 래공금성 아대거방어 구불능항. 홀유이병래조 개이죽엽. 여아군병력격적파지. 군퇴후부지소귀. 단견죽엽적어미추능전 내지선왕음즐유공. 인호죽현릉.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에 쳐들어왔는데, 우리도 군사를 많이 동원하여 막았지만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모두들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가신 임금님께서 도와주셔서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일로 인해서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越三十七世 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 四十許人 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 有輔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攘災救患之心 暫無渝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 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王允之.
월십삼세 혜공왕대 댜력십사년기미사월 홀유선풍 종유신공총기. 중유일인승준마 여장군의상. 역유의갑기장자 사십허인 수종이랴 입어죽현릉. 아이능중사유진동곧읍성 혹여고소지음 기언왈 “신평생 유보시구란광합지공 금위혼백 진호방국 양재구환지심 잠무투개. 왕자경술년 신지자손 무죄피주. 군신불념아지공열 신욕원이타소 불복노근. 원왕윤지.”
제36대1) 혜공왕(惠恭王) 때인 대력(大曆) 14년 기미(서기 779) 4월 어느 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장군과 모습이 비슷하였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왕릉 속에서 우는 듯한 소리가 진동을 했고 혹 호소하는 소리 같기도 했으니, 그 말은 이러하였다. “신은 평생토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서기 770)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가 제 공적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왕께서는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王答曰 惟我與公 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王聞之懼 乃遣工大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遏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躋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왕문지구 내견공대신김경신 취김공능사과언 위공립공덕보전삼십결우취선사 이자명복. 사네김공토평양후 식복소치고야. 비미추지령 무이알김공지노 왕지호국 불위불대의. 시이방인회덕 여삼산동사이불추 제질우오능시상 칭대묘운.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어 김유신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유신 공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하였을 것이니, 미추왕이 나라를 지키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그 덕을 사모하여 삼산(三山, 신라에서 크게 제사 지내는 세 산으로 내림(奈林)ㆍ골화(骨化)ㆍ혈례(穴禮)를 말한다.)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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