劒君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 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검군 구문대사지자 위사량궁사인 건복사십사년정해추팔월 운상살제곡 명년춘하대기 민매자이식. 어시 궁중제사인동모 도창예창곡분지 검군독불수. 제사인왈 “중인개수 군독각지 하야? 약혐소 청경가지.”
검군(劒君)은 대사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 사인으로 있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서기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해치고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잇는 형편이 되었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모든 사인들이 말했다. “뭇 사람이 모두 받는데 그대만이 유독 거절하니 무슨 일인가? 만약 양이 적어서 꺼린다면 더 주겠다.”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검군소왈 복편명어근랑지도 수행어풍월지정 구비기의 수천금지리 부동심언.
검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근랑(近郞)의 무리에 이름을 두었고 풍월(風月:화랑)의 집에서 수행을 하였으니, 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時大日伊飡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시대일이찬지자 위화랑 호근랑 고운이 검군출지근랑지문. 사인등밀의불살차인 필유누언 수소지 .검순지기모살 사근랑왈 “금일지후 불복상견.”
이때 이찬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은 그곳을 나와 근랑의 집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은밀히 논의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말이 새어나갈까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음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랑문지 검군불언 재삼문지 내력언기유 랑왈 “호불언어유사?” 검군왈 “외기사 사중인입죄 정소인야.” 연즉합도호?“ 왈 ”피유아직 이반자도 비장부야.“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다가 두세 번 거듭 물으니 그 이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말했다. “어찌하여 담당 관청에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신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을 죄에 걸려들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 “저들은 잘못되고 저는 바른데 도리어 제가 도망한다면 장부답지 못합니다.”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수왕 제사인치주사지 필이약치식. 검군지이강식 내사.
드디어 사인들에게로 가니 여러 사인들이 술자리를 벌여놓고 사과하며 몰래 음식에 약을 넣었다. 검군은 이를 알고도 먹고 그만 죽었다.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군자왈 “검군사비기소 가위경태산어홍모자야.
군자(君子)들은 말한다 “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죽었으니 태산같이 소중한 목숨을 새털보다 가벼이 여긴 것이다.”